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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종숙 시인(리움) / 불멸의 청년 1941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5. 3.

<윤동주 신인상 당선작>

​​김종숙 시인(리움) / 불멸의 청년 1941

 

소년은 파란 하늘에 물들이고

애틋한 사랑은 강물 속에서

어른거리는데

맑은 순정을 가진 소년에게

푹 빠졌던 시절이 나에게도 있었던가?

생각하게 하는 초저녁

하얀 광목 행주치마에 시를 쓰고

파란 물감으로 그림을 그리는

손글씨 작가의 별 헤는 이 밤에

당신의 그리움을 읽습니다

그거 아세요?

내 이름자 묻힌 언덕 위에도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 거라 하신 말

스물아홉 살 불멸의 청년인 당신이 하신 말

억장이 무너지는 말

문설주에 내리는 햇살이

냉골인 당신 방에 깊숙이 파고들었으면


​​

 

김종숙 시인(리움) / 아가 1939

 

북간도의 아기의 새벽빛은 따뜻했다네

대청마루 끝에 앉아 젖을 물린

엄마 눈 속에

큰달 하나 품고 있었다네

옹알옹알 젖 물린

아가 눈 속에도

큰 별 하나 들어 있었네

반짝반짝반짝

별빛 달빛 눈빛


 

 

김종숙 시인(리움) / 가슴앓이

 

침묵이라는 글자가 쓰여있는 예배당의 뜨락

나이테만큼 온 산을 덮은 나무 아래에 들어섰다

내 안에 늘어난 고통의 창문은 수십 개

고요의 대문은 꽉 잠가놓은지 오래

몸을 낮추고서 허공을 바라보았다

바람이 일자 살아가면서 생의 마지막까지

아름답게 흩어지는 이파리 하나

잠가놓은 대문을 밀고 들어와

온 마당을 걸어 다니는데

그것도 잠시,

창문에 부딪히는 나뭇잎 위에

소금 같은 싸락눈이 차갑게 떨어진다


 

 

김종숙 시인(리움) / 감추고 싶은 그리움

 

저 산 너머에는 은빛 여울진 몸짓으로 흰 눈이 춤판을 벌렸다

날망에 세 번 눈이 내리면 감출 수 없는 그리움을 나르러

뜰 안에도 흥얼흥얼 흰 눈이 얼굴을 내민다는데

삼밭 울타리에도 무주 할머니 굽은 허리에

짐 하나 얹어 놓을 만큼 눈이 쌓였겠다

울퉁 불퉁 더덕 손이 된 손가락으로

묻어두었던 무랑 당근이랑

깎아드시며 아들딸 손주 생각나시겠다

저 눈 녹으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금세 토방 끝으로 날아온 민들레 싹이 트고

장독대 앞 소담스러운 움막 위로

연둣빛 엉금 엉금 기어올라

웅크린 봄나물이 돋아나겠지

뒷마당 살구나무에 햇빛 가지런히 내려오고

줄기마다 꽃송이 번지면

어른어른 손주들 목소리만 들린다 하시겠다

모퉁이마다 새싹처럼 자라나는 그리움을

감추고 안고 사는 엄마 바보

사랑해요 쑥스러워 말도 못 하는 아들바보

저 눈 녹고 아지랑이 아른거리는 봄날이면

연분홍빛으로 다시 핀다


 

김종숙 시인(리움) / 그 섬에 너를 두고 왔네

 

겹겹이 포장된 시집을 들고

분침과 초침이 사이좋게 걷는 시간

기적처럼 신비로운 오름길에 혼자 서있다

불규칙하게 헐덕이는 파도 소리

가쁘게 울컥 토해낸 바다

바람에 서걱거리는 풀벌레 소리로 가득하다

저 파도 누군가에게는 설렘으로 한나절 듣다 갈 것이고

또 아픔으로 다녀갔을 가슴 검게 그을린 이를 생각한다

그들도 먼 옛날 아이 손잡고 새소리 물소리 들었을 것이다

조천에서 조천으로 전화를 걸었다

시인의 집에 부끄러움이 담긴 느낌표와

시처럼 살다가 가라한 마침표가 시인과 조우했다

누군가 시집 한 권으로 수다스러울 수 있다는 걸 알기에

 

 


 

김종숙 시인(리움)

전북 부안 출생. 2020년 『문예 마을』 시 등단. 2020년 『한양 문학』 수필 등단. 『시야 시야 동인』을 통해 작품 활동 시작. 2022년 제3회 <월간시> 윤동주 신인상 당선. 『서울시인협회 』회원. 『강동 문인회 』회원. 공저 시집 『여백 01, 『여백 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