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용욱 시인 / 사소한가
지리산 발가락의 발톱에 집을 지었다 비 그치면 무듬이 들판의 구름이 몰려와 멀리 산줄기 허리 아래를 걷우고 섬처럼 봉우리들만 남는 경주 고향집 앞 남산 풍경과 닮아서 연고도 없는 곳이지만 오래 산 듯하다
이 낯선 곳을 느지막이 왜 왔냐고들 묻는다
여기 와서 가까이 보는 것이 많다 허물 벗고 지상의 남은 며칠을 만끽하는 매미 제 몸의 마지막 습기를 작은 꽃잎으로 지우는 시월의 들꽃 돌아누운 나를 피하지 않는 별 가을이면 어느 것 하나 다툴 일 모르고 가야 할 곳을 떠나는 여기 종이보다 흙에 낙서하는 날이 많다 연필 대신 삽날의 필기체가 몸에 익다 새들이 비록 눈여겨보지 않고 지나쳐도 읽지 않고 나뭇잎들이 덮어버려도 쉼표든 느낌표든 몇 개쯤 뿌리에 스며들어 봄날을 기억할 것이다 겨드랑이에 날개가 있었다면 몸에 맞는 바람을 다시 만난 것도 같다 지난밤엔 사람들 모르게 첫눈이 내려 구겨진 세상을 잠시 펴주는데 텅 빈 겨울도 가끔 제구실하는 여기,
너와 내 사이 낯선 내가 깨어나기를 기다린다
권용욱 시인 / 작곡 이전의 노래
너를 사랑하기 전날로 편지를 부쳤다 수취인불명으로 돌아온 것은 당연하다
내가 사랑하기 전날까지 나는 그 집에 살았다 내 없어도 너는 저녁밥을 먹고 노래를 불렀다
내가 너의 노래를 다시 듣고 싶을 때 그러니까 신발 가지런히 고인 섬돌을 괴고
그 돌 아래 눌러서 다시 너의 노래를 듣고 아니다. 다시 네 노래를 듣지 않아도 좋다
내가 너를 사랑하기 전날의 그 집에서 노래하기 전의 너는 있고 나는 없어도 좋다
반송된 편지가 하늘나라우체통에 가득해도 나는 그저 하루 전날의 너만 있으면 된다
*하늘나라우체통 : 전도 팽목항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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