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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박민경 시인 / 귓속, 물음표 외 1건

by 파스칼바이런 2023. 5. 7.

박민경 시인 / 귓속, 물음표

 

 

따뜻한 체온을 건져 올리던 풀의 축축한 아랫도리 툭 꺾여졌다

물결의 호흡이 멈춘 때.

낯선 발자국은 시간을 유린하고 당신이 만든 시멘트가 군데군데 덧칠을 한다

귀를 울리는 삶의 불면 밤도 잊은 채

여름 같은 봄이라 말하지 않아도 변증의 계절이다

개 같은 오월의 몸살, 골목마다 막차를 탄 바람이 스며들어와

이명의 고리들이 철 이른 아지랑이에 출렁거린다.

연분홍 꽃들 환장할 듯 피어 있던 날 고장난 기억은

사랑하는, 혹은 사랑한 이에 대한 짧은 명복을 빌어주었다

 

귓속, 물음표 하나가 떠올랐다 천천히 침묵했다

 

당신,

꺾여지면 다시 일어나지 못할 풀잎같은 계집, 조금이라도 좋아하긴 했었나?

 

 


 

 

박민경 시인 / 끈을 잇는 거짓말

 

 

ㅡ 여기서 표정으로 나타나고 상상이 되고 이해되고 떠난 몸으로 돌아오는 어느 시선의 직관(페르난두 페소아)

 

 

피아노 치듯 거미가 다리를 벌린다

가로등 빛이 잠식하는 거리 추위가 몰아친다고 예보가 말했어

굴러가는 입들을 본다

어디선가 빠져나온 입들이 바람 따라 구른다

내 입일까 네 입일까

깊이도 없이 텅 빈 바깥을 꿈꾸는 사람들이 모이는 겨울 숲

나뭇가지에 걸린 거미가 줄을 타고 내려와 또 다리를 벌린다

검은 건반을 눌리듯 힘을 주고 집을 짓는다

 

저기 아프리카를 건넌 달이 혀 밑 숨겨논 말을 던져

이봐, 거미라는 놈은 음흉해

흥이 날 땐 다리를 비틀어

꼭 ‘라’ 음을 빼먹고 집을 짓거든

 

말라버릴 때만 죄짓는 글자 말고

저녁이면 도망가는 노을 말고

혀 없이도 굴러가는 입 말고

더 이상 성스러울 것 없는 자리에서

어젯밤 현질하다 손해 본 게임 말고

 

그렇군!

거미를 쳐다보는 순간

얼어버린 거짓말 하나 툭 입술 위로 떨어진다

 

-『공정한 시인의 사회』(2019, 3월호)

 

 


 

박민경 시인

부산에서 출생. 부산대학교 불문과 졸업. 부산 가톨릭대학교 신학원 졸업. 2016년 《포엠포엠》 겨울호 신인상 수상. 2004년 제16회 가톨릭문예작품공모전 우수상 수상(시). 현재 포엠포엠 작가회, 詩詩동인 활동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