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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태인 시인 / 새둥지를 그리세요* 외 4건

by 파스칼바이런 2023. 5. 7.

제11회 시산맥 신인상

김태인 시인 / 새둥지를 그리세요*

 

 

애착은 없었으므로

한 치 망설임 없이 빈 둥지를 그렸다

추락은 비상(飛上)의 동력이라지만

어린 새는 공중을 날다 곤두박질쳤다

아가야 세상은 혼자 일어서는 거란다

나뭇가지는 약해 내용물을 울컥 쏟을 뻔했다

둥지는 바닥이 없어 기울이면 밑 빠진 독처럼

내려앉았지

공간을 접어 몇 겹의 시공을 밀어 넣었음에도

충분한 양력이 나오지 않았던 거야

단지 왼손잡이여서

왼쪽 구석에 작은 둥지를 그려 넣었다

4B 연필을 집어 든 건

잿빛 눈빛이 친숙했기 때문

마침내 굵은 선의 파공으로 지나간다

둥지를 엎고 도화지를 찢을 만큼 둔탁하게

쏟아진 빈 둥지 옆에 한 아기가 울고 있다

부모는 둥지를 버리고 다른 차원의 높이로 날아갔지

아이들에 둘러싸인 한 소년이 울고 있다

울고 있는 아기 옆에 한 청년이 서 있다

치러야 할 것들을 치르고 있는 것인가

애초에 애착은 없었으므로

바닥이 없는 마음처럼 지붕 없는 둥지를 이고

부화할 날들을 뒤로 한 채

늙은 나무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린 새는 빈 둥지를 허물고 도화지를 떠났다

 

* 애착안정성 진단을 위한 투사검사(BND)

 


 

 

김태인 시인 / 지문

 

1번과 3번 지문의 영역 사이에

이중긍정과 이중부정의 문장들이 꿈틀댄다

이해는 지문이 만든 미로를 뚫고

출제 의도는 몇 년 째 퇴로를 헤맨다

옳지 않은 것을 고르는 과정은 4번 지문의 출생으로부터

성장 그리고 죽음의 묘비명을 이해하기까지

 

3번 나뭇잎과 1번 잎사귀 중 옳지 않은 것은?

가장 나뭇잎 같지 않은 것을 고르라는 질문에 모든 잎사귀들은

말문의 잎맥을 막고 치를 떤다

가장 고양이 같지 않던 울음소리만 긴 복도 끝에서

울려 퍼진다

 

사람이 동물이 되는 순간은 질문과 사고의 이종교배이다

가장 자식 같지 않은 자식은 몇째일까요?

문제 같지 않은 문제가

가장 꽃 같지 않은 꽃을 고르라는 질문을 던지고 간다

 

똑똑 물방울 돋는 약수터 바위틈에

5번 물결이 수면에 등장할 기회를 잃고

가장 꽃잎 같은 분홍 벚 꽃잎 아래로 숨어든다

열한 번 한숨과 아홉 번 어긋난 관절은

지면에 등장할 기회를 잃고

우리들 기억 속에서 희미해져갔다

 

나는, 당신의 몇 번째 지문이었을까요?

 


 

 

김태인 시인 / 순간기억상실

 

 강한 휘발성을 띤 순간의 장소에서 당신의 기억은 웜홀로 증발된다 예상치 못한 순간은 블랙홀의 가공할 중력과도 같아서 지나가는 모든 현상을 끌어당겨 전혀 다른 차원의 시공간으로 배출한다 실로 눈빛 깜박할 순간이다 서울역 앞 내 앞을 빠르게 지나는 한 여인의 손에 들린 에스프레소 커피 잔이 균형을 잃고 두 시선을 직선의 관성을 한 순간에 집 어 삼 켜 버 렸 다 방향을 잃고 쏟아지는 커피 잔에 흙빛 기억을 왈칵 토해내며 핑그르 순식간에 비켜선 찰나 마주 오던 한 남자 나를 피해 급히 직진 괘도를 선회할 무렵 휴대전화 통화에 한쪽 기억을 먹혀버린 한 여성의 스텝과 엉켜 탱고의 피날레를 연출하고 만다 서로의 방향성 기억은 가방이 서로 부딪치며 사방으로 튕겨나간다 놀람과 통증과 불쾌감이 교차하는 연쇄반응으로 엉켜버린 공황은 순간기억상실증 옆을 지나가는 새 한 마리 이 광경에 정신을 빼앗겨 유리창에 부딪히고 순간 걸음을 멈춘 바람에 날려가지 못한 미세먼지는 서울 상공에 쌓이며 지표면 1mm를 덮어 수백만 마리의 미생물이 중금속으로 사라졌다 이 이야기를 도저히 믿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순간 당신은 이미 순간기억상실의 연쇄반응에 걸려들었다 당신은 방금 전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서울역 대합실은 진한 에스프레소 향기로 서서히 물들어 간다

 


 

 

김태인 시인 / 틈새

 

얼굴 틈으로 날아오는 새, 생의 어스름 골목에서 호락호락하지 않다. 어제와 오늘 사이로 말과 행동을 자주 흘린다.

 

화장실 깨진 벽거울에 비춰진 조각난 얼굴, 나뭇가지 쪼개놓은 낮달처럼 틈새 파고든 눈코입은 온전히 꿰매내지 못한다.

 

찔끔찔끔 녹물 흘리는 수도꼭지, 전립선이 막혔는지 꽉 깍 나오는 울음이 길다. 한번 구겼다 펼친 살림처럼 모든 각이 흩어지듯 놓아두고 지우고 가야 할 것들.

 

휴지에 싸서 버린 얼굴이 넘쳐난다. 형광등 속이 까맣다. 한쪽 기억을 뜯어낸 벽지 여백이 길다. 미닫이문으로 바람이 스미고 대들보가 벌어진다.

 

한 귀퉁이 부서져 내린 계단으로 깃털구름이 몰려든다. 거울 속으로 한 줄 훈풍이 불고, 햇볕 든 꿰맨 틈으로 죽지 않은 뇌신경을 뻗는다.

 

얼굴 중앙으로 사납게 몰려오는 실금, 조각조각 붙은 파편이 흩어지듯 수십 개의 얼굴이 다시 부화한다. 푸드득

 

주름지고 패인 틈에서 솟구쳐 오르는 새 떼, 생의 어스름 골목에서 헐렁하지도 호락하지도 않다.

 


 

 

김태인 시인 / 겨울, 유전자

 

 

하늘에 닳아가는 새들의 잊힌 무릎이어서

나는 둥근 손거울 안에 오랜 문명처럼 희미하게 닳아간다

할아버지가 오래된 물고기의 뼈를 대면하는 일처럼

 

나는

거울 위에 눕는 또 하나의 혈연

 

주먹도끼를 들고 오랜 자폐를 깨고 나오는 날

무르팍을 흐르는 달빛의 기도는 단말마 비명으로 깨져 한꺼번에 와장창 쏟아질 것이라 한다

 

깨어진 조각마다 고스란히 녹화된 아버지 얼굴과 내 눈빛이 바라보는 아이들

서로의 거울을 바라보며 부레가 닮아가는 예감을 터득하는지도 모른다

 

곱슬머리를 기억하기 위해 쌍꺼풀 닮은 눈빛이 더듬어가는

유전자 지도 속에서, 물고기 뼈를 바라보는 염색체 한 쌍이 잊힌 새의 무릎임을 안다

 

"그렇게 아버지는 눈보라와 폭풍과 강추위를 이끌고 거울로 뛰어든 후 그 속에서 소리 없는 겨울이 되었습니다 손짓을 해도 대답이 없던 무성영화 같았던 거울 속에는 혈연으로 뭉쳐진 응고된 구름에서 잊힌 문명들이 펑펑 쏟아져 내립니다"

 

 


 

김태인 시인

1974년 전북 남원 출생. 동국대 일반대학원 졸업. 2013년 5.18 문학상, 2015년《시산맥》 등단, 2016년 《강원일보》 신춘문예 당선. 공무원문예대전 시 부문 은상수상.(2015). 현재 강원대학교 국제무역학과 교수. 시집 <누군가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