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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권용욱 시인 / 사소한가 외 1건

by 파스칼바이런 2023. 5. 7.

권용욱 시인 / 사소한가

 

 

지리산 발가락의 발톱에 집을 지었다

비 그치면 무듬이 들판의 구름이 몰려와

멀리 산줄기 허리 아래를 걷우고

섬처럼 봉우리들만 남는

경주 고향집 앞 남산 풍경과 닮아서

연고도 없는 곳이지만

오래 산 듯하다

 

이 낯선 곳을

느지막이 왜 왔냐고들 묻는다

 

여기 와서 가까이 보는 것이 많다

허물 벗고 지상의 남은 며칠을 만끽하는 매미

제 몸의 마지막 습기를

작은 꽃잎으로 지우는 시월의 들꽃

돌아누운 나를 피하지 않는 별

가을이면 어느 것 하나 다툴 일 모르고

가야 할 곳을 떠나는 여기

종이보다

흙에 낙서하는 날이 많다

연필 대신 삽날의 필기체가 몸에 익다

새들이 비록 눈여겨보지 않고 지나쳐도

읽지 않고 나뭇잎들이 덮어버려도

쉼표든 느낌표든 몇 개쯤

뿌리에 스며들어 봄날을 기억할 것이다

겨드랑이에 날개가 있었다면

몸에 맞는 바람을 다시 만난 것도 같다

지난밤엔 사람들 모르게 첫눈이 내려

구겨진 세상을 잠시 펴주는데

텅 빈 겨울도 가끔 제구실하는 여기,

 

너와 내 사이

낯선 내가 깨어나기를 기다린다

 

 


 

 

권용욱 시인 / 작곡 이전의 노래

 

 

너를 사랑하기 전날로 편지를 부쳤다

수취인불명으로 돌아온 것은 당연하다

 

내가 사랑하기 전날까지 나는 그 집에 살았다

내 없어도 너는 저녁밥을 먹고 노래를 불렀다

 

내가 너의 노래를 다시 듣고 싶을 때

그러니까 신발 가지런히 고인 섬돌을 괴고

 

그 돌 아래 눌러서 다시 너의 노래를 듣고

아니다. 다시 네 노래를 듣지 않아도 좋다

 

내가 너를 사랑하기 전날의 그 집에서

노래하기 전의 너는 있고 나는 없어도 좋다

 

반송된 편지가 하늘나라우체통에 가득해도

나는 그저 하루 전날의 너만 있으면 된다

 

*하늘나라우체통 : 전도 팽목항에 있다

 

 


 

권용욱 시인

1964년 경북 경주에서 출생. 2014년 《시에》로 수필, 2016년 《포엠포엠》으로 시 등단. '詩作나무' 동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