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형국 시인 / 꽃이 꽃배달 하면
뒤틀린 왼팔로 바지춤을 내리고 꽃 흐드러진 들에다 시원하게 물을 뿌린다
고추 모종 심는 아낙들 깔깔대다 ㅡ올해는 고추농사 풍년이겠네
꽃 한 다발 꺾어 쥐고 어눌한 발음으로 ㅡ어바 어바바
아랫도리 건수는 잊고서 환하게 웃는다
다섯 살부터 나이를 꽃밭에 뿌린 총각
그 남자
분명 꽃집 총각이겠지
온 동네 꽃밭 주인이겠지
서형국 시인 / 개고생
짤 만큼 짜낸 시를 탈수기로 돌리면 돌돌 원심력은 최대한 멀리 생각을 떨어냅니다 그러면 낡은 문장이 행여 돌아올 길 잃을까 미련으로 묻어오다 자음과 모음으로 부서져 그림 형제 동화처럼 빵가루로 흘려집니다
다시 돌아오지 않겠다는 눅눅한 약속을 탱탱한 다짐에 널면 반성은 마를수록 먼 황무지 보름달로 뜹니다 그 달 띄워놓고 마누라 구멍 난 검정 스타킹이라 쓰다가 새로 산 바지에 지져진 담뱃빵이라 읽다가 캄캄한 앞날에 밝혀진 등대 빛으로 덮고 눈을 감기도 합니다
그러다 방법 없는 고민에 문득 배가 고파지면 나는 채 마르지도 못한 활자를 주섬주섬 주워 먹으면서 어느새 탈수길 삼류로로 돌아오는 것이었습니다 어쩌면 좋을까요
서형국 시인 / 지병
동창들 술자리에 나갔더니 저마다 보는 눈이 정확하다고 자랑질이었다 누구는 내가 뽑은 사람이 도지사가 되었다 했고 누구는 조연만 하던 무명배우가 뜰 줄 알았다고 우쭐대다가 종업원이 마시던 맥주는 300cc라고 그렇게 일러 주었는데 여기 오 백 한 잔 더 달라고 외쳤다 적게 마시고 많이 지불하려는 것인데 밝은 눈에 귀먹은 사람의 아름다운 습관이었다
나는 어떠한가
오랫동안 연탄불 고깃집을 운영하면서 연탄 구멍이 몇 개인지도 몰랐네 낯이 뜨거워 멀치감치 눈질로 구멍을 세려는데 어째 오른쪽으로만 도는 것이다 게다가 직접 듣지 않으면 믿지 못하는 성격 탓에 다섯, 여섯 소리를 내는데 따르지 못하는 눈 때문에 자꾸 헛걸음만 한 것 같아 뒤를 돌아보았다 밝은 귀에 눈이 어두운 사람의 미심쩍은 습관이었다
거슬러 어느 먼 연도에 수많은 눈을 쬐면서 습관은 습관을 잊고 연애를 하였다 여행을 떠나도 서로에 환승하는 법을 몰랐던 이들의 종착역은 스스로였는데
이런 느낌
일곱, 여덟 당신은 몇 번째 간이역에서 놓쳤을까요
나는 오른손잡이 당신을 오른쪽으로만 파고들다 늦은 사람 한 바퀴를 조여도 풀어도 다시는 마주할 수 없는
다시 연애하라면 눈이 멀지언정 왼쪽부터 살펴보겠지만 이 몹쓸 버릇이 지구를 한 바퀴 돌아오는 동안
나는 모든 도전과 불편해진 터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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