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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서형국 시인 / 꽃이 꽃배달 하면 외 2건

by 파스칼바이런 2023. 5. 13.

서형국 시인 / 꽃이 꽃배달 하면

 

 

뒤틀린 왼팔로 바지춤을 내리고

꽃 흐드러진 들에다

시원하게 물을 뿌린다

 

고추 모종 심는 아낙들 깔깔대다

ㅡ올해는 고추농사 풍년이겠네

 

꽃 한 다발 꺾어 쥐고

어눌한 발음으로

ㅡ어바 어바바

 

아랫도리 건수는 잊고서 환하게 웃는다

 

다섯 살부터

나이를 꽃밭에 뿌린 총각

 

그 남자

 

분명

꽃집 총각이겠지

 

온 동네

꽃밭

주인이겠지

 

 


 

 

서형국 시인 / 개고생

 

 

짤 만큼 짜낸 시를 탈수기로 돌리면

돌돌 원심력은 최대한 멀리 생각을 떨어냅니다

그러면 낡은 문장이 행여 돌아올 길 잃을까 미련으로 묻어오다

자음과 모음으로 부서져

그림 형제 동화처럼 빵가루로 흘려집니다

 

다시 돌아오지 않겠다는 눅눅한 약속을 탱탱한 다짐에 널면

반성은 마를수록 먼 황무지 보름달로 뜹니다

그 달 띄워놓고 마누라 구멍 난 검정 스타킹이라 쓰다가

새로 산 바지에 지져진 담뱃빵이라 읽다가

캄캄한 앞날에 밝혀진 등대 빛으로 덮고 눈을 감기도 합니다

 

그러다

방법 없는 고민에 문득 배가 고파지면

나는 채 마르지도 못한 활자를 주섬주섬 주워 먹으면서

어느새 탈수길 삼류로로 돌아오는 것이었습니다

어쩌면 좋을까요

 

 


 

 

서형국 시인 / 지병

 

 

 동창들 술자리에 나갔더니 저마다 보는 눈이 정확하다고 자랑질이었다 누구는 내가 뽑은 사람이 도지사가 되었다 했고 누구는 조연만 하던 무명배우가 뜰 줄 알았다고 우쭐대다가

 종업원이 마시던 맥주는 300cc라고 그렇게 일러 주었는데 여기 오 백 한 잔 더 달라고 외쳤다 적게 마시고 많이 지불하려는 것인데 밝은 눈에 귀먹은 사람의 아름다운 습관이었다

 

 나는 어떠한가

 

 오랫동안 연탄불 고깃집을 운영하면서 연탄 구멍이 몇 개인지도 몰랐네 낯이 뜨거워 멀치감치 눈질로 구멍을 세려는데 어째 오른쪽으로만 도는 것이다 게다가 직접 듣지 않으면 믿지 못하는 성격 탓에 다섯, 여섯 소리를 내는데 따르지 못하는 눈 때문에 자꾸 헛걸음만 한 것 같아 뒤를 돌아보았다 밝은 귀에 눈이 어두운 사람의 미심쩍은 습관이었다

 

 거슬러 어느 먼 연도에 수많은 눈을 쬐면서 습관은 습관을 잊고 연애를 하였다

 여행을 떠나도 서로에 환승하는 법을 몰랐던 이들의 종착역은 스스로였는데

 

 이런 느낌

 

 일곱, 여덟

 당신은 몇 번째 간이역에서 놓쳤을까요

 

 나는 오른손잡이

 당신을 오른쪽으로만 파고들다 늦은 사람

 한 바퀴를 조여도 풀어도

 다시는 마주할 수 없는

 

 다시 연애하라면 눈이 멀지언정 왼쪽부터 살펴보겠지만 이 몹쓸 버릇이 지구를 한 바퀴 돌아오는 동안

 

 나는 모든 도전과 불편해진 터라서

 

 


 

서형국 시인

1973년 창원에서 출생. 2018년 월간《모던포엠》 최우수 신인상으로 등단. 현재 월간 『모던포엠』 사무국장. 全人文學 회원. 시나무 동인. 문학동인 volume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