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최승호 시인 / 눈사람 자살 사건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5. 21.

최승호 시인 / 눈사람 자살 사건

 

 

 그날 눈사람은 텅 빈 욕조에 누워 있었다.

 뜨거운 물을 들기 전에 그는 더 살아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더 살아야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 자살의 이유가 될 수는 없었으며

 죽어야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 사는 이유 또한 될 수 없었다.

 죽어야 할 이유도 없었고 더 살아야 할 이유도 없었다.

 아무런 이유 없이 텅 빈 욕조에 혼자 누워 있을 때 뜨거운 물과 찬물 중에서 어떤 물을 들어야 하는 것일까.

 눈사람은 그 결과는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뜨거운 물에는 빨리 녹고 찬물에는 좀 천천히 녹겠지만 녹아 사라진다는 점에서는 다를 게 없었다.

 나는 따뜻한 물에 녹고 싶다.

 오랫동안 너무 춥게만 살지 않았는가. 눈사람은 온수를 들고 자신의 몸이 점점 녹아 물이 되는 것을 지켜보다 잠이 들었다.

 욕조에서는 무럭무럭 김이 피어올랐다

 

 


 

 

최승호 시인 / 공터

 

 

아마 무너뜨릴 수 없는 고요가

공터를 지배하는 왕일 것이다

빈 듯하면서도 공터는

늘 무엇인가로 가득 차 있다

공터에 자는 바람, 붐비는 바람,

때때로 바람은

솜털에 싸인 풀씨들을 던져

공터에 꽃을 피운다

그들의 늙고 시듦에

공터는 말이 없다

있는 흙을 베풀어주고

그들이 지나가는 것을 무심히 바라볼 뿐.

밝은 날

공터를 지나가는 도마뱀

스쳐가는 새가 발자국을 남긴다 해도

그렇게 오래가지 않을 것이다

하늘의 빗방울에 자리를 바꾸는 모래들,

공터는 흔적을 지우고 있다

아마 흔적을 남기지 않는 고요가

공터를 지배하는 왕일 것이다.

 

-시집 <고슴도치의 마을>(1994)-

 

 


 

 

최승호 시인 / 북

 

 

고래들이 꼬리를 들어

바다를 친다

탕탕탕

 

바다가 커다란 북이다

하늘에서는 천둥이 친다

쾅 콰앙 쾅

하늘이 커다란 북이다

 

내 가슴에서는 심장이 뛴다

쿵쿵쿵

가슴이 북이다

 

 


 

최승호 시인

1954년 강원도 춘천 출생. 춘천교육대학 졸업. 1977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으로 『대설주의보』 『고슴도치의 마을』 『진흙소를 타고』 『세속도시의 즐거움』 『회저의 밤』 『반딧불 보호구역』 『눈사람』 『여백』 『그로테스크』 『모래인간』 등과 산문집으로 『황금털 사자』『달마의 침묵』『물렁물렁한 책』 등과 그림책으로 『누가 웃었니?』 『이상한 집』이 있음. 1982년 '오늘의 작가상', 1985년 '김수영문학상', 1990년 '이산문학상', 2000년 '대산문학상' 수상. 숭실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