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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한강 시인 / 거울 저편의 겨울 4 외 5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5. 21.

한강 시인 / 거울 저편의 겨울 4

-개기일식

 

 

생각하고 싶었다

(아직 피투성이로)

 

태양보다 400배 작은 달이

태양보다 400배 지구에 가깝기 때문에

달의 원이

태양의 원과 정확하게 겹쳐지는 기적에 대하여

 

검은 코트 소매에 떨어진 눈송이의 정육각형,

1초/ 또는 더 짧게

그 결정의 형상을 지켜보는 시간에 대하여

 

나의 도시가

거울 저편의 도시에 겹쳐지는 시간

타오르는

붉은 테두리만 남기는 시간

 

거울 저편의 도시가

잠시 나의 도시를 관통하는

(뜨거운)그림자

 

마주 보는 두 개의 눈동자가

동그랗게 서로를 가리는 순간

완전하게 응시를 지우는 순간

얼음의 고요한 모서리

 

(아직 피투성이로)

짧게 응시하는 겨울

의 겉불꽃

 

 


 

 

한강 시인 / 거울 저편의 겨울 5

 

 

시계를 다시 맞추지 않아도 된다.

시차는 열두 시간

아침 여덟 시

 

덜덜덜

가방을 끌고

 

입원 가방도

퇴원 가방도 아닌 가방을 끌고

 

핏자국 없이

흉터도 없이 덜컥거리며

 

저녁의 뒷면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한강 시인 / 거울 저편의 겨울 6

-중력의 선

 

 

사물이 떨어지는 선.

허공에서 지면으로

명료하게

 

한 점과

다른 점을 가장 빠르게 잇는

 

가혹하거나 잔인하게.

직선

 

깃털 달린 사물.

육각형의 눈송이

넓고 팔락거리는 무엇

이 아니라면 피할 수 없는 선

 

백인들이 건설한

백인들의 거리를 걷다가.

완전한 살육의 기억을 말의 발굽으로 디딘

로카의 동상을 올려다보다가

 

거울 이편과 반대편의 학살을 생각하는 나는

 

난자하는

죽음의 직선들을 생각하는 나는

 

단 한 군데에도 직선을 숨겨놓지 못한

사람의 몸의 부드러움과

 

꼭 한 번

완전하게 찾아올

중력의 직선을 생각하는 나는

 

신도

인간도 믿지 않는

네 침묵을 기억하는 나는

 

 


 

 

한강 시인 / 거울 저편의 겨울 7

-오후의 미소

 

 

거울 뒤편의

백화점 푸드코트

 

초로의 지친 여자가

선명한 파랑색 블라우스를 입고

두 병째 맥주를 마시고 있다

 

스티로폼 접시에

감자튀김이 쌓여 있다

 

일회용 소스 봉지는 뜯겨 있다

 

너덜너덜 뜯긴 경계에

달고 끈끈한 소스가 묻어 있다

 

텅 빈 눈 한 쌍이 나를 응시한다

 

너를 공격할 생각은 없어

라는 암호가

끌어올린 입꼬리에 새겨진다

 

수십 개의 더러운 테이블들이

수십 명의 지친 쇼핑객들이

수백 조각의 뜨거운 감자튀김들이

나를 공격할 생각은 마

 

너덜너덜 뜯긴

식욕을 기다리며,

 

 


 

 

한강 시인 / 거울 저편의 겨울 8

 

 

흰 지팡이를 짚은 백발의 눈먼 남자 둘이서

앞뒤로 나란히

구두와 지팡이의 리듬에 맞춰 걷고 있었다

 

앞의 남자가

더듬더듬 상점 문을 열고 들어가자

 

뒤의 남자는 앞의 남자의 등을

보호하듯 팔로 감싸며 따라 들어갔다

 

미소 띤 얼굴로

유리문을 닫았다

 

 


 

 

한강 시인 / 거울 저편의 겨울 9

-탱고 극장의 플라멩코

 

 

정면을 보며 발을 구를 것

 

발목이 흔들리거나, 부러지거나

리듬이 흩어지거나, 부스러지거나

 

얼굴은 정면을 향할 것

두 눈은 이글거릴 것

 

마주 볼 수 없는 걸 똑바로 쏘아볼 것

그러니까 태양 또는 죽음,

공포 또는 슬픔

 

그것들을 이길 수만 있다면

심장에 바람을 넣고

미끄러질 것, 비스듬히

 

(흐느끼는 빵처럼

악기들이 부풀고)

 

그것들을 이길 수만 있다면

당신을 가질 수도,

죽일 수도 있다고

 

중력을 타고 비스듬히,

더 팽팽한 사선으로 미끄러질 것

 

 


 

한강 시인

1970년 광주출생. 연세대 국문과 졸업. 소설가. 1993년 [문학과사회]에 시를 발표하고, 1994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붉은 닻]이 당선되어 작품활동. 장편소설 [검은 사슴] [그대의 차가운 손] [채식주의자] [바람이 분다, 가라] [희랍어 시간], 소설집 [여수의 사랑] [내 여자의 열매] [노랑무늬영원], 시집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등. 수상 : 만해문학상, 동리문학상, 이상문학상, 2016년 『채식주의자』로 맨부커상, 2017년 『소년이 온다』로 말라파르테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