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석주 시인 / 명자나무
불행을 질투할 권리를 네게 준 적이 없으니 불행의 터럭 하나 건드리지 마라!
불행 앞에서 비굴하지 말 것, 허리를 곧추세울 것. 헤프게 울지 말 것. 물음으로 타인의 연민을 구하지 말 것. 꼭 물어야 야만 한다면 흩날리는 진눈깨비 앞에서 울 것. 외양간이나 마른 우물로 휘몰려가는 진눈깨비를 바라보며 울 것. 비겁하게 피하지 말 것. 저녁마다 술집을 순례하지 말 것. 서양 모자를 쓰지 말 것. 콧수염을 기르지 말 것. 딱딱한 씨앗이나 마른 과일을 천천히 씹을 것. 다만 쐐기풀을 견디듯 외로움을 혼자 견딜 것.
쓸쓸히 걷는 습관을 가진 자들은 안다. 불행은 장엄 열반이다. 너도우니? 울어라, 울음이 견딤의 한 형식인 것을. 달의 뒤편에서 명자나무가 자란다는 것을 잊지 마라.
장석주 시인 / 우리에게 더 좋은 날이 올 것이다
너무 멀리 와버리고 말았구나 그대와 나 돌아갈 길 가늠하지 않고 이렇게 멀리까지 와버리고 말았구나
구두는 낡고, 차는 끊겨버렸다 그대 옷자락에 빗방울이 달라붙는데 나는 무책임하게 바라본다. 그대 눈동자만을 그대 눈동자에 떠오른 한줄기 길을 그대 눈동자에 떠오른 별의 궤도를
너무 멀리 와버렸다 한들 이제 와서 어쩌랴
우리 인생은 너무 무겁지 않았던가 그 무거움 때문에 우리는 얼마나 고단하게 날개를 퍼덕였던가
더이상 묻지 말자 우리 앞에 어떤 운명이 놓여 있는가를 묻지 말고 가자 멀리 왔다면 더 멀리 한없이 가버리자
장석주 시인 / 새들은 황혼 속에 집을 짓는다
나는 안다, 내 깃발은 찢기고 더이상 나는 청춘이 아니다. 내 방황 속에 시작보다 끝이 더 많아지기 시작한다.
한번 흘러간 물에 두 번 다시 손을 씻을 수 없다. 내 어찌 살아온 세월을 거슬러올라 여길 다시 찾아올 수 있으랴.
- 쉽게 스러지는 가을 석양 탓이다. - 잃어버린 지도 탓이다.
얼비치는 벗은 나무들의 그림자를 안고 흐르는 계곡의 물이여, 여긴 어딘가, 내 새로 발 디디는 곳 암암히 황혼이 지는 곳.
- 서편 하늘에 풀씨처럼 흩어져 불타는 새들. - 어둠에 멱살 잽혀 가는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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