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한옥 시인 / 대나무 꿀에 빠지다
부산에서 전학 온 나를 아이들은 미국에서 온 아이보다 더 귀하게 여겼다. 삶은 고구마와 찐쌀과 생쌀을 주머니에 담아 주고 컴컴한 헛간마다 귀신이 나오는 곳이니 조심하라 알려주고 감밭 아래 모인 아이들은 하얀 감꽃을 실에 꿰어 내 목에 걸어 주었다.
바람 사납게 불던 어느 날, 아이들은 나를 데리고 대밭 속으로 들어갔다. 긴 담뱃대를 들고있는 청도할배 대밭 바람만 불면 시퍼런 바다 속 파도소리가 났다. 너무 깊이 들어가면 길을 잃을 것 같은 음산하고 무서운 곳이다.
대나무에는 대꽃이 피었다. 어른들은 대꽃이 피면 난리가 난다고 수군거렸다. 그러나 아이들은 신이 난거다 꽃 아래 반짝이며 매달린 꿀을 따먹을 수 있으니 나도 가지를 휘어 잡고 쫀득쫀득 먹었다. 과자도 귀한데 꿀아제비 넣고 밀을 볶아 먹거나 찐쌀 뿐인데 천혜의 꿀이 온 나무에 달렸으니 청도할배만 안 오시면 되는거다.
대밭에서 대꿀을 따먹은 뒤 온 몸에 두드러기가 돋았다. 코가 모과처럼 울퉁불퉁 붓고 입술도 땡깔처럼 부풀고 손과 발 엉덩이까지 부어 올랐다. 두드러기에 효험있다는 껌정 옷을 덮어쓰고 찾아간 돌팔이 의원은 신장염으로 위독하다는 진단을 내렸다. 팔랑개비처럼 사방팔방 돌아다니지만 가스나 하나 잃을까. 놀란 엄마는 부기 빠지는 문어를 삶아 먹이고 또 먹였다. 신통방통 문어물을 먹은 나는 부기가 빠져 내렸다.
대나무 벌레가 뱉은 진물만 핥아 먹을 일인데 나는 벌레집을 통째 따먹은 식중독이었던 것이다. 대꽃처럼 온몸에 난리 꽃이 피던 때 지금도 주홍빛 그 벌레집 오래 쫀득거린다.
웹진 『시인광장』 2019년 1월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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