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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손한옥 시인 / 대나무 꿀에 빠지다

by 파스칼바이런 2019. 4. 1.

손한옥  시인 / 대나무 꿀에 빠지다

 

 

부산에서 전학 온 나를 아이들은 미국에서 온 아이보다 더 귀하게 여겼다.

삶은 고구마와 찐쌀과 생쌀을 주머니에 담아 주고 컴컴한 헛간마다 귀신이 나오는 곳이니 조심하라 알려주고 감밭 아래 모인 아이들은 하얀 감꽃을 실에 꿰어 내 목에 걸어 주었다.

 

바람 사납게 불던 어느 날, 아이들은 나를 데리고 대밭 속으로 들어갔다. 긴 담뱃대를 들고있는 청도할배 대밭 바람만 불면 시퍼런 바다 속 파도소리가 났다. 너무 깊이 들어가면 길을 잃을 것 같은 음산하고 무서운 곳이다.

 

대나무에는 대꽃이 피었다. 어른들은 대꽃이 피면 난리가 난다고 수군거렸다. 그러나 아이들은 신이 난거다 꽃 아래 반짝이며 매달린 꿀을 따먹을 수 있으니 나도 가지를 휘어 잡고 쫀득쫀득 먹었다. 과자도 귀한데 꿀아제비 넣고 밀을 볶아 먹거나 찐쌀 뿐인데 천혜의 꿀이 온 나무에 달렸으니 청도할배만 안 오시면 되는거다.

 

대밭에서 대꿀을 따먹은 뒤 온 몸에 두드러기가 돋았다. 코가 모과처럼 울퉁불퉁 붓고 입술도 땡깔처럼 부풀고 손과 발 엉덩이까지 부어 올랐다. 두드러기에 효험있다는 껌정 옷을 덮어쓰고 찾아간 돌팔이 의원은 신장염으로 위독하다는 진단을 내렸다. 팔랑개비처럼 사방팔방 돌아다니지만 가스나 하나 잃을까. 놀란 엄마는 부기 빠지는 문어를 삶아 먹이고 또 먹였다. 신통방통 문어물을 먹은 나는 부기가 빠져 내렸다.

 

대나무 벌레가 뱉은 진물만 핥아 먹을 일인데 나는 벌레집을 통째 따먹은 식중독이었던 것이다. 대꽃처럼 온몸에 난리 꽃이 피던 때 지금도 주홍빛 그 벌레집 오래 쫀득거린다.

 

웹진 『시인광장』 2019년 1월호 발표

 


 

손한옥 시인

경남 밀양에서 출생. 2002년 《미네르바》를 통해 등단. 시집으로 『목화꽃 위에 지던 꽃』(시평사, 2006)과 『직설적, 아주 직설적인』(천년의시작, 2010),  『13월 바람』(시산맥, 2017)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