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연 시인 / 자연으로부터
혼자 있을 때에나 더러는 혼자가 아닐 때에도 창유리를 통해 겨울산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숱 많은 머리채가 겨울산으로 끌려들어 가는 것을 수수하게 방관하고 있습니다.
환하게 드러나는 하체, 몸을 부끄럽게 움직입니다. 몸을 움직이는 게 부끄럽습니다. 오늘은 다 끝났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그 끝에서 버릇처럼 무심한 문장을 씁니다. 아무도 읽을 수 없는 시작을 시작합니다.
아직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길 위에 떠도는 숱 많은 여인의 머리채를 무엇이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는 채 몸을 뒤척입니다. 몸을 뒤척일수록 시간은 시간을 계산하지 않습니다. 계산은 어떤 것도 무섭습니다.
겨울산이 가벼워질수록 유리창이 더러워집니다.
누가 버린 검은 비닐봉지가 굴러 내려오다 멈춘 거기서 경사가 시작되기도 하고 끝나기도 합니다. 오늘은 좀 더 기다려야 겨울산에서 내려오는 흰 짐승을 만날 것 같습니다.
잘 드러나지 않는 아침 일찍 혹은 오후 늦게 같이 있으면서 홀로 있습니다 흰 옷 입은 겨울산은 먼 곳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계간 『시인수첩』 2018년 봄호 발표
이재연 시인 / 장미의 경우
장미는 드높아지고 내 얼굴에 주름살이 쌓여간다. 릴케의 속살에 파고들었던 장미의 가시는 화가 많이 나 있었나보다 화도 낼 수 없고 소리조차 낼 수 없는 오월 한낮 네 이름을 정원에서 발견한다. 내가 왜 너를 읽지 않았을까, 봐라. 너 외에 어떤 것을 읽을 수 있다는 것인지. 발음할 수 있다는 것인지. 그동안 나는 왜 너를 상상하지 않았겠는가. 상상하고 싶지 않았겠는가. 정원에서 난간에서 교외에서 전체보다 더 많이 민감한 너의 영혼을 생각하지 않았겠는가. 보이지 않는 것은 보이지 않는 까닭이 있어 신은 말없이 붉은 피를 땅에 떨어뜨려 주었다. 일생 후생을 염려하여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말을 다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 장미는 늙어간다.
계간 『다층』 2018년 여름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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