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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재연 시인 / 자연으로부터 외 1

by 파스칼바이런 2019. 4. 14.

이재연 시인 / 자연으로부터

 

 

혼자 있을 때에나

더러는 혼자가 아닐 때에도

창유리를 통해 겨울산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숱 많은 머리채가 겨울산으로 끌려들어 가는 것을 수수하게 방관하고 있습니다.

 

환하게 드러나는 하체, 몸을 부끄럽게 움직입니다. 몸을 움직이는 게 부끄럽습니다. 오늘은 다 끝났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그 끝에서 버릇처럼 무심한 문장을 씁니다. 아무도 읽을 수 없는 시작을 시작합니다.

 

아직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길 위에 떠도는 숱 많은 여인의 머리채를 무엇이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는 채 몸을 뒤척입니다. 몸을 뒤척일수록 시간은 시간을 계산하지 않습니다. 계산은 어떤 것도 무섭습니다.

 

겨울산이 가벼워질수록 유리창이 더러워집니다.

 

누가 버린 검은 비닐봉지가 굴러 내려오다 멈춘 거기서

경사가 시작되기도 하고 끝나기도 합니다.

오늘은 좀 더 기다려야 겨울산에서 내려오는

흰 짐승을 만날 것 같습니다.

 

잘 드러나지 않는 아침 일찍 혹은 오후 늦게

같이 있으면서 홀로 있습니다 흰 옷 입은

겨울산은 먼 곳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계간 『시인수첩』 2018년 봄호 발표

 

 


 

 

이재연 시인 / 장미의 경우

 

 

장미는 드높아지고

내 얼굴에 주름살이 쌓여간다.

릴케의 속살에 파고들었던 장미의 가시는

화가 많이 나 있었나보다

화도 낼 수 없고 소리조차 낼 수 없는

오월 한낮 네 이름을 정원에서 발견한다.

내가 왜 너를 읽지 않았을까, 봐라.

너 외에 어떤 것을 읽을 수 있다는 것인지.

발음할 수 있다는 것인지.

그동안 나는 왜

너를 상상하지 않았겠는가.

상상하고 싶지 않았겠는가.

정원에서 난간에서 교외에서

전체보다 더 많이 민감한

너의 영혼을 생각하지 않았겠는가.

보이지 않는 것은 보이지 않는 까닭이 있어

신은 말없이 붉은 피를 땅에 떨어뜨려 주었다.

일생 후생을 염려하여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말을

다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

장미는 늙어간다.

 

계간 『다층』 2018년 여름호 발표

 

 


 

이재연 시인

전남 장흥 출생 2005년 《전남일보》 신춘문예 시부문 당선. 2012년 제1회 오장환 신인문학상 당선. 시집으로 『쓸쓸함이 아직도 신비로웠다』(실천문학사, 2017)가 있음. 현재 웹진 『시인광장』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