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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광희 시인 / 잠의 파수꾼

by 파스칼바이런 2019. 3. 25.

김광희 시인 / 잠의 파수꾼

 

 

액자 속 돛배가 벽의 대양을 항해 한다.

영감이 서랍장 위에서 할멈의 꼬부라진 잠을 굽어보고

칼이 베개 밑에서 한 번도 순항을 하지 못한 그녀 잠에 동행한다.

잠은 깊은 숨을 몰아쉬며 꿈속으로 출항한다.

 

사십년 넘게 회를 떴던 물가자미 상자떼기 무겁게 끌고 들어간다.

늘 중심잡지 못하고 출렁이다 창자 속에서 썩어가는 파랑을 꺼내

빳빳하게 물살 헤쳐보지 못한 자존심의 등뼈를 발라내고 밑바닥 헤엄으로 납작해진 근육을 떠낸다.

덮쳐오는 해일을 잘라 뭉툭하게 닳은 날, 잠의 숫돌에 쓱쓱 벼린다.

 

화투장 들고 저승까지 한 판을 거는 아들의 노름을 자르고

아침저녁 대문 밖으로 냄비 바가지 날아나가는 며느리의 풍비박산을 자른다.

저승서도 주사 못 버리고 찾아온 영감이 쥐어지를 땐 ‘정말이지 제발 좀 끊고 살자’ 칼부림을 한다.

접시 물에 허우적대다 바닥없는 심해로 까무룩 끌어내리는 가위눌림을 자르고

시퍼렇게 날뛰는 풍파의 비린 피 맛을 찾아 번쩍일수록 그녀 생의 서슬이 무디어져 간다.

 

가끔은 분홍고래를 탄 꿈이 큰 소리로 웃을 때는

오래 부려 먹어 푹 파인 도마처럼 날이 안으로 욱어져 신들신들 웃기도 하는

훠이훠이 흰 돛배 까마득한 산까지 휘적휘적 휘저어 간다.

산자락에 칡넝쿨 오리나무 우거진 숲들이 허리 꼬부라진 발목을 잡아챈다.

꿈이 깊을수록 녹의 더께가 두터워져도 자르고 자르며 그녀의 잠을 지킨다.

숨결 고른 잠 순항을 향해

 

웹진 『시인광장』 2018년 7월호 발표

 

 


 

김광희 시인

2006년 《전북도민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2016년 《농민신문》 신춘문예 시조 당선. 2013년 <경주문학>상 수상. 2015년 오누이시조 신인상 수상. 시집으로 『발뒤꿈치도 들어 올리면 날개가 된다』가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