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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의 성인들] (9) 성 잔나 베레타 몰라 [우리 시대의 성인들] (9) 성 잔나 베레타 몰라 1922~1962, 축일 4월 28일 “태아와 내 생명, 둘 중 하나만 구할 수 있다면 아이를 살려주세요” 가톨릭신문 2023-04-30 [제3341호, 12면] 성 잔나 베레타 몰라가 1959년 아들 피에르루이지(오른쪽)와 딸 마리올리나를 안고 있는 모습. 성 잔나 베레타 몰라(Gianna Beretta Molla)는 어머니와 의사, 태아의 수호성인이다. 이탈리아의 소아과 의사로 네 자녀를 둔 잔나 베레타 몰라는 네 번째 임신 중 자궁에 종양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자신이 살기 위해서는 당장 낙태를 하고 치료를 받아야 했지만, 태중의 아이를 살리기 위해 치료를 거부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잔나 베레타 몰라의 시성식 강론에서 “그녀는 단순하지.. 2023. 5. 5.
이인자 시인 / 어느 움집에서 외 2건 이인자 시인 / 어느 움집에서 당신은 이 별에서 만난 내 첫 번째 남자 후빙기를 건너, 미개한 시절 생선을 잘 굽는 착한 아내인 나와 고기를 잡던 내 아들과 도토리를 곧잘 줍던 어린 딸과 더불어 한강변, 네다섯 평 움집에서 처음 행복을 가르쳐 주던 남자 자랑스러운 무기였던 돌화살촉과 하나뿐이던 부엌살림, 빗살무늬토기 그래도 아궁이가 환히 달아오를 때면 시린 등을 토닥토닥거려주던 숱 많고 머리 긴, 저기 저 남자 사냥을 떠나기 전날 밤 돌화살촉을 다듬고 또 다듬던 날 닳아지는 건 돌뿐이 아니라, 떠나보내는 마음도 함께 일 텐데 어느 짐승의 먹이가 되었는지 꽁꽁 얼어붙은 후빙기를 지나도록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던 내 생애 첫 번째 남자를 다시 만났다. 암사동 선사 유적지 어느 움집에서 이인자 시인 / 하나님과.. 2023. 5. 5.
박송이 시인 / 소심한 책방 외 2건 박송이 시인 / 소심한 책방 ​ ​ 짧아지는 연필을 사랑해야겠다는 생각 딱딱한 솔방울을 궁굴리며 궁굴리며 용기의 얼굴을 내밀고 가야겠다는 생각 손바닥 같은 숲속 작은 사람들 곁에서 우산을 펼쳐야겠다는 생각 신앙을 가져야겠다는 생각 첫 시집을 내고 예술가라기보다는 생활인에 가까워졌다는 생각 시집을 팔아야겠다는 생각 깨진 보도블록 탓하지 않으면서 까인 무릎을 껴안아 줘야겠다는 생각 저마다 바다를 띄우고 그마다 닻을 품고 이마다 파도를 버틴다는 생각 쓰러진 볏잎들을 묶어 줘야겠다는 생각 도탑게 도탑게 골목을 돌 때마다 툭툭 솔방울이 떨어지고 작은 시집을 파는 책방이 문을 연다 똑똑 문을 열면 낱말들이 몰려와 슬픔이 무사하다는 생각 ​ ​ ​ 박송이 시인 / 나무항구 3 ​ ​ 잘 삶아진 옥수수를 입에 물고 죽.. 2023. 5. 5.
​강빛나 시인 / 방 탈출 강빛나 시인 / 방 탈출 한탕하고 싶었을까, 폼나게 오늘을 살아본 적 없어서 탕진하기 좋은 밤처럼 폭 싹 너는 짐 빠져나간 배낭 같다 피로한 한숨이 앙상한 쇄골에 걸려 바둥거리고 어두워서, 저 혼자 용감해지는 암막 커튼 뒤에 숨어 코인 지수가 웅덩이에 풍덩 할 때마다 왼쪽 머리를 쥐어뜯는다 누구나 매혹당하는 동안에는 방 탈출은 쉽지 않아서 너에 대한 연민이랄까 피의 끌림이랄까 손을 내밀자 산 중턱을 넘어가는 목소리로 돌아가기엔 너무 멀리 왔다고 한다 먼저 올라왔다고 길을 다 아는 건 아니어서 어쩌면 냉정한 사랑으로 대신 길을 걸어줄까도 생각하지만 내 피가 흐르다 멈추는 듯하다 심심해서, 희한한 기적이 일어날 것 같은 예감과 능한 위장으로 기분 띄워주는 일이 많다는 변명의 금고는 열지 말아야 하는데 황금꼬.. 2023. 5. 5.
김명국 시인 / 봄의 기지개 외 1건 김명국 시인 / 봄의 기지개 ​ 죽었는지 살았는지 통 소식 없다가 설 명절도 다 끝나 찾아온 외갓집 사돈네 일가붙이마냥 두꺼비 개구리 땅속 흙을 헤집고 어섯눈 뜨듯, ​ 볕 좋은 날 골라 밭에다가 비닐이며 쓰레기 주워 태우는 소골양반이 냉갈 피워 올리는 자리 옆에서 어정쩡 오줌을 싸고 있다 ​ 미동 사는 김수옥 씨 세상살이 가정사 마음대로 되지 않는가, 낮술이라도 한잔 걸쳐 자셨는지 물청 논에 지푸라기를 어거지로 끄집어내려다가 경운기 오도가도 못하게 꼬라박아놓고 내력 없는 헛삽질만 질탕 해대고 있다 ​ 아직 제비는 오지 않았다, ​ 이 모든 것이 입춘도 한참 지나서 할 일 없어진 할망구 둘이 냉이나 찾겠다며 봉다리 하나씩 들고 띄엄띄엄 밭두둑이나 훑고 다닐 적에 버들개지 망울 돋아 오르는 경칩도 닷새쯤 .. 2023. 5. 5.
​신승민 시인 / 구직求職 신승민 시인 / 구직求職 저물녘 안산 대로변 입간판이 부러진 철물점 귀퉁이에 아직 팔리지 않은 자재들이 쌓여있다 노을빛에 참아낸 눈물을 말리는 목재 더미 먼지 묵은 비닐 몇 장이 그의 유일한 이력서다 4 년의 공정 동안 여유를 자르고 낭만을 깎아 부단한 대패질로 다듬어놓은 외모와 품질도 까다로운 규격 앞에선 재고 신세일 뿐이다 이왕이면 얼굴과 몸을 더 깎아 날씬해지고 급료도 뚝 잘라서 열정을 보여 달라는 세상 정작 얇아진 부피는 각목으로도 쓰지 않고 가느다란 체형은 부적합 판정을 내리면서 소매상들은 애꿎은 나뭇결을 탓하는구나 톱밥 같은 일회용품만 매입해가는 시절 어느새 아름드리 고목은 철모르는 꿈이 되고 친구들은 일찌감치 합판으로 목표를 잡았다 외딴 공사판에 헐값도 못 받고 처분될 바에야 차라리 구청의 .. 2023. 5. 4.
김종훈 시인 / 자유형 외 2편 김종훈 시인 / 자유형 탯줄을 끊고 처음 벌린 입은 음식이 필요했던 것일까 숨이 필요했던 것일까 오른팔과 왼팔이 엇갈려 물을 당긴다 입은 온전히 숨 쉬는 데 집중한다 곡기를 끊고 숨을 거둔 사람을 네 명 안다 세 명은 시인이고 다른 한 명은 시를 썼을 것이다 팔을 쭉 뻗고 책을 읽거나 비뚤거리는 서체로 글을 썼을지 모른다 아침 찬거리에 대해 헤엄치며 생겨났던 포말에 대해 아 오 우 아 모음들이 그의 입을 벌렸을 것이다 양치질 후에 몇 개의 발음을 가지고 산책을 했을 것이다 눈썹의 굵은 털처럼 걸음 옆으로 풀이 자랐을 것이다 수영은 아름답다 오른팔과 왼팔이 언니와 동생 같다 함께 엇갈리며 물을 당긴다 물은 밖으로 빠져나간 몸을 바로 잊는다 숲에도 장마가 시작되었다 산책로가 곧 덮일 것이다 김종훈 시인 / .. 2023. 5. 4.
​김정미 시인 / 그를 이팝나무라 부르면 김정미 시인 / 그를 이팝나무라 부르면 봄밤을 축문으로 써놓고 그의 장례를 치른다 지상에서 기꺼이 질 줄 아는 것들은 꽃의 부족인지 모른다 탄생이 호들갑스럽지 않았으니 북향으로 질 때도 죽음을 애도하는 검은 눈물 따윈 없다 아직 오전의 온도가 남아있는 오후가 통째로 사라졌다 고양이가 튀어 오르는 골목마다 켜진 이팝나무에는 별빛인지 그림자인지 알 수없는 근처들이 자라기 시작한다 두고 간 산책과 고양이 사이 제 몸보다 큰 저녁을 고양이걸음으로 건너간다 미처 당도하지 못한 환한 달빛 부록 몇 권쯤, 흰 서표로 꽂아 놓았을 한그루 나무 같은 한 사람이 이팝나무로 눈부시게 서있다 보이지 않아도 이미 봄인 그를 이팝나무라 부르면 부서지거나 흩어진 것도 한 줌씩 모으면 둥글어질 수 있다는 것을 골목 끝, 정류장이 어.. 2023. 5. 4.
조미희 시인 / 일기의 언덕을 넘어 조미희 시인 / 일기의 언덕을 넘어 마음의 날씨를 위로하는 습관이 생겼다 습관은 언덕 너머 골짜기의 연약한 새 한 마리, 아무도 보지 못하게 꼭꼭 싸맨 그곳처럼 우울한 우산과 쫑긋한 예민함이 뒤에서 격렬하게 다투고 있는 계절이다 오늘의 기분은 가래침 맛이라고 쓰고 감정을 토했다 하얀 종이 위에 질펀한 오물 이성을 묶어놓기 위해 소비하는 감정을 누군가 슬며시 커튼을 젖혀 훔쳐보고 있다 날씨와 계절은 매번 오늘 위에서 맑음과 흐림, 비와 눈을 데리고 지나간다 언덕 아래는 어떤 기분들이 모여 가끔 자신도 모르게 고이고 흘러간다 네가 던진 폭설과 내가 던진 꽃이 우리의 세계에 이상기후를 가져왔다 새가 실낱같은 발바닥을 떨며 종이에 앉아 일기의 페이지를 찢는다 페이지를 빠져나온 날씨들이 흩어져 울타리를 벗어나 거.. 2023. 5. 4.
최향란 시인 / 생각의 말 외 2편 최향란 시인 / 생각의 말 한 바구니 가득한 잘 익은 석류 받아 들고 붉은 틈에 정박한 하얀 시절 만나고 있네요 마당가 허물어 깊은 협곡 스스로 만들어 놓고 당연히, 손 놓은 쪽이 아버지라고 꽃다운 젊은 여자 만났으니 끌어주는 이 없다고 홀로 길 잃은 바람이 되었겠지요 오래도록 내 안에 존재하지 않은 아버지 서로를 밀어내는 게 운명인체 그 만큼 더 멀어진 남겨진 사람들 가슴 후벼 파는 말 서로 직접 한 적 없지만 생각의 말이란 입 밖에 내뱉지 않아도 상처에 덧을 내고 지독한 긴 겨울이 되어 서로의 등만을 보게 했지요 미련한 시간아, 어서 빨리 지나가라고 기도한 몇몇 밤 설마 없었겠습니까? 그냥 살짝 벌렸을 뿐인데 아이고, 눈물 별 쏟아지네요 서둘러 허우적허우적 쓸어 담는데 마른 손 마디마디 손톱 끝까지 .. 2023. 5. 4.
김희업 시인 / 전신마취 외 2편 김희업 시인 / 전신마취 흰옷 입은 사내가 달콤한 잠옷을 내게 건네 주었어 그걸 채 입기도 전에 나를 잃어버리고 말았어 무아의 경지였어 그렇다고 꿈을 꾸는 건 절대 아니야 어떠한 꿈도 내게는 사치에 불과해 사실은, 언제부터인지 몰라도 꿈불감증을 앓고 있어 빠르게 도망가는 잠을 놓치지 않겠어 잠 등에 올라타기만 하면 죽음의 국경선에 놓인 잠의 나라에 쉽게 도달할 수 있어 내가 잠을 자든 잠이 나를 재우든 상관없어 가난한 영혼은 나보다 먼저 잠들어 있을 테니 내 몸을 탐하거라 암울한 사자使者여 반납하고 싶어 안달하는 내 것이 아닌 내 몸을 가져가시라 나도 나를 알아보지 못하도록 새롭게 태어나겠어 마취의 눈꺼풀이 열리자 없어진 머리가 서서히 제자리로 돌아왔어 오오 악몽 같은 낡은 세계여 낯선 나는 왜 여기에 .. 2023. 5. 4.
안은숙 시인 / 위 안은숙 시인 / 위 날개를 수저처럼 사용하는 새들 활강하는 것들로 배를 채우는 저 투명한 위에는 가끔 날아가는 풍경이 보인다 흔들리는 잎눈 먼지의 시야 움직이는 것들로 배를 불린다 지상으로부터 새어 나온 연기가 빨려 들어가는 곳 흩어지는 소화법을 갖고 있어 굴뚝의 끝을 좋아하는 식성이다 무거운 것들은 모두 아래에 주고 가벼운 것들만 편식하는 공활(空豁)한 위(胃) 간혹 굉음의 혈관이 생겨나고 때론 천천히 움직이는 무늬를 소화하는 저 위의 표정엔 폭발하는 불꽃이 있다 눈발은 위에서 하품으로 녹아내리는 역류다 소각로도 없이 지구 어느 강변에선 몇 구 죽음이 흩어졌다 그럴 때면 허공엔 기류 따라 태풍의 눈이 생기기도 하고 천둥의 날개를 보이기도 한다 내려앉지 못하는 날개는 굉음의 식욕을 갖고 있다 폭염으로 붉.. 2023. 5.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