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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인 시인 / 새둥지를 그리세요* 외 4건 제11회 시산맥 신인상 김태인 시인 / 새둥지를 그리세요* 애착은 없었으므로 한 치 망설임 없이 빈 둥지를 그렸다 추락은 비상(飛上)의 동력이라지만 어린 새는 공중을 날다 곤두박질쳤다 아가야 세상은 혼자 일어서는 거란다 나뭇가지는 약해 내용물을 울컥 쏟을 뻔했다 둥지는 바닥이 없어 기울이면 밑 빠진 독처럼 내려앉았지 공간을 접어 몇 겹의 시공을 밀어 넣었음에도 충분한 양력이 나오지 않았던 거야 단지 왼손잡이여서 왼쪽 구석에 작은 둥지를 그려 넣었다 4B 연필을 집어 든 건 잿빛 눈빛이 친숙했기 때문 마침내 굵은 선의 파공으로 지나간다 둥지를 엎고 도화지를 찢을 만큼 둔탁하게 쏟아진 빈 둥지 옆에 한 아기가 울고 있다 부모는 둥지를 버리고 다른 차원의 높이로 날아갔지 아이들에 둘러싸인 한 소년이 울고 있다.. 2023. 5. 7.
신혜솔 시인 / 끼어들다 외 1건 신혜솔 시인 / 끼어들다 그때 바다보다 더 깊고 푸른 하늘 위로 멍 때리던 중 느닷없이 다가와 까마득히 멀어진 시간을 퍼질러놓고 가는 바람 상촌면 민주지산로 49번 국도변 감나무길엔 까치밥이 주렁주렁 눈송이 펑펑 쏟아져 쌓인 꼬불꼬불 도로 위로 떨어뜨린 그 겨울의 비애 계절을 잊은 도시의 하늘로 풍덩 위로가 끼어든다 신혜솔 시인 / 연습 생각 없이 내던져진 한마디 말이 허공을 맴돌다 내게로 다가와 가슴 후비며 파고든다 뼈마디를 깎는 듯한 고통으로 꽃이 된다 삶을 함께한 죄 값으로 지그시 눈감고 흘려보낸 그 부대낌의 시간들 어느새 푸른 이끼 되어 텅 빈 마음속을 채우고 있다 혼자가 아니기에 많이 흐느꼈던 날들을 행복했다 할 수 있을까 앞만 보고 걷는 발자국 그 뒤를 따라가며 말과 생각과 웃음을 잃은채 뛰어.. 2023. 5. 7.
박민경 시인 / 귓속, 물음표 외 1건 박민경 시인 / 귓속, 물음표 따뜻한 체온을 건져 올리던 풀의 축축한 아랫도리 툭 꺾여졌다 물결의 호흡이 멈춘 때. 낯선 발자국은 시간을 유린하고 당신이 만든 시멘트가 군데군데 덧칠을 한다 귀를 울리는 삶의 불면 밤도 잊은 채 여름 같은 봄이라 말하지 않아도 변증의 계절이다 개 같은 오월의 몸살, 골목마다 막차를 탄 바람이 스며들어와 이명의 고리들이 철 이른 아지랑이에 출렁거린다. 연분홍 꽃들 환장할 듯 피어 있던 날 고장난 기억은 사랑하는, 혹은 사랑한 이에 대한 짧은 명복을 빌어주었다 귓속, 물음표 하나가 떠올랐다 천천히 침묵했다 당신, 꺾여지면 다시 일어나지 못할 풀잎같은 계집, 조금이라도 좋아하긴 했었나? 박민경 시인 / 끈을 잇는 거짓말 ㅡ 여기서 표정으로 나타나고 상상이 되고 이해되고 떠난 몸.. 2023. 5. 7.
권용욱 시인 / 사소한가 외 1건 권용욱 시인 / 사소한가 지리산 발가락의 발톱에 집을 지었다 비 그치면 무듬이 들판의 구름이 몰려와 멀리 산줄기 허리 아래를 걷우고 섬처럼 봉우리들만 남는 경주 고향집 앞 남산 풍경과 닮아서 연고도 없는 곳이지만 오래 산 듯하다 이 낯선 곳을 느지막이 왜 왔냐고들 묻는다 여기 와서 가까이 보는 것이 많다 허물 벗고 지상의 남은 며칠을 만끽하는 매미 제 몸의 마지막 습기를 작은 꽃잎으로 지우는 시월의 들꽃 돌아누운 나를 피하지 않는 별 가을이면 어느 것 하나 다툴 일 모르고 가야 할 곳을 떠나는 여기 종이보다 흙에 낙서하는 날이 많다 연필 대신 삽날의 필기체가 몸에 익다 새들이 비록 눈여겨보지 않고 지나쳐도 읽지 않고 나뭇잎들이 덮어버려도 쉼표든 느낌표든 몇 개쯤 뿌리에 스며들어 봄날을 기억할 것이다 겨드.. 2023. 5. 7.
[글로벌칼럼] (125) 자신의 복사를 대주교로 임명한 반성직주의 교황 [글로벌칼럼] (125) 자신의 복사를 대주교로 임명한 반성직주의 교황 로버트 미켄스 가톨릭신문 2023-05-07 [제3342호, 6면] 굳이 교황청 예절 담당자를 대주교로 임명한 것에 의문 지역교회에 대한 책임 없다면 그의 주교품은 신학적 논쟁거리 실망이다. 아마도 이게 가장 적합한 표현일 것이다. 교황청은 4월 21일 프란치스코 교황이 올해 57세인 교황전례원장 디에고 라벨리 몬시뇰을 레카나티의 명의대주교로 임명했다고 발표했다. 이게 왜 실망스러운가? 일단 교황청 관리 혹은 한 교구의 직권자가 아닌 사람을 주교로 임명하는 것은 신학적으로도 성사적으로도 문제가 있다. 이건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자. 우선 가톨릭교회에서 예절 담당자가 주교는 말할 것도 없고 부제나 사제일 필요는 전혀 없다. 성품이 필요 .. 2023. 5. 7.
이현협 시인 / 벽을 찾아 외 1건 이현협 시인 / 벽을 찾아 얼어붙은 기쁨도 부서지는 것이다 타들어 가는 시간처럼 바람이 일고 진눈깨비가 한창이다 싸구려 연기로 얼어붙은 생을 녹일 수 있을까 낮술 한 사발로 잠들지 못해 문턱에 찰랑이다가 雨期의 숨죽인 애벌레처럼 쪼그라진 가슴은 문밖을 흘끔거린다 벽을 지나 또 다른 벽을 찾아 짓무른 아랫도리를 움켜쥐고, 물고개로 가는 길 문판소리가 눈꽃처럼 내린다 -《다시올문학》 2016년 봄 이현협 시인 / 고원의 배 사철 고드름을 단 몸뚱이는 겸허했다 험로의 관목을 지나 밀가루 같은 먼지에 콧속이 찢어지고 살갗이 탄다 종일 덩어리 소금을 깬 뿔이 멍들어갈 때, 마른 똥에 달아오른 밤은 헝클어진 기도보다 짧다 송곳 바람이 갈라진 발굽을 파고드는 소금사막, 앞질러 간 결빙이 짓무른 뿔을 깨웠다 흐물흐물해.. 2023. 5. 7.
김다연 시인(천안) / 물든다는 것 외 1건 김다연 시인(천안) / 물든다는 것 ​ 천지사방 마음 가는대로 사는 이 얼마나 있다고 ​ 매순간 선택과 집중의 필요 속에서 모든 것의 경계를 허물고 삶인 듯 아닌 듯 살아갈 수 있다면 꽃보다 붉은 빛 흐드러진 순간을 누군들 꿈꾸지 않으랴 ​ 단지 밥벌이에 겨웠다는 핑계를 대어서라도 그 붉은 빛에 더불어 물들지 못하고 하루하루 낯선 生을 감당하느라 분주했음을 자책해 보아도 ​ 환대란 의미를 잊은 지도 이미 오래라 ​ 물들지 못해 아쉬웠던 그 많은 순간을 단숨에 돌이켜 다시 물들 수야 없을 것을, 누구나 한순간만이라도 그렇게 마음 가는대로 물들 수만 있다면 ​ 먼 곳을 오래 바라본 적도 없는 것처럼 잘 익은 계절이 다하기 전 그 붉은 빛의 결따라 함께 붉어지고 싶었을 뿐 ​ 남들에겐 더할 나위없는 호사 이었.. 2023. 5. 7.
[교구 수도회 영성을 찾아서] 프란치스코 전교 봉사 수녀회(하) [교구 수도회 영성을 찾아서] 프란치스코 전교 봉사 수녀회(하) 가장 낮은 곳에서 그리스도 사랑 실천 가톨릭신문 2023-04-30 [제3341호, 4면] 프란치스코 전교 봉사 수녀회 수녀가 페루 선교지에서 어린이들과 시간을 보내고 있다. “주님을 현양함과 전교 사업에 능동적으로 협력하며 가난한 사람, 아픈 사람, 도움을 필요로 하는 모든 사람을 위해 봉사하는 사회사업을 사랑으로 실천한다.”(회헌 1장 2조) 프란치스코 전교 봉사 수녀회 수도자들은 이 회헌에 따라 노인 요양원·병원·장애인 시설 등 다양한 사회복지 분야에서 사도직 활동을 펼치고 있다. 수도자들의 국내외 모든 활동은 전교와 봉사 영성의 실현이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실행하는 일이다. 주님께서 보내신 삶의 현장에서 하느님의 영광을 드높이고,.. 2023. 5. 6.
김혜숙 시인(강릉) / 빨래 김혜숙 시인(강릉) / 빨래 빨래로 널려야지 부끄럼 한 점 없는 나는 빨래로 널려야지 피얼룩 기름때 숨어 살던 눈물 또 서툰 사랑도 이젠 다 떨어버려야지 다시 살아나야지 밝은 햇볕 아래 종횡무진 바람 속에 젖은 몸 다 말리고 하얀 나래 퍼득여야지 한 점 부끄러움 없는 하얀 나래 퍼득여야지 김혜숙 시인(강릉) 1937년 강원도 강릉 출생. 이화여자대학교 국문과 졸업. 서울진명여고, 대구신명여고에서 교직 생활. 1981년 제26회 현대문학상 수상. 시집 그림 그리기> 등. 1981년 제26회 현대문학상 수상. "청미' 동인으로 활동. 2023. 5. 6.
이용주 시인 / 그 안개 외 1건 이용주 시인 / 그 안개 타인이기 전 이미 남이 되어버린 그 내 등 뒤로 사라지고 있었다 그와 누워있는 틈 사이 나는 밤의 무대에 서서 악기를 연주 하고 있었다 나무뿌리는 오래된詩로 자라나고 있었다 어둠이 몰려온 조그만 그 다락방 나는 그의 안에 있었다 낮고 습한 곳에서 핀다는 달개비꽃 죽음을 부르는 사물의 세계로구나 소금이 흩어졌고 사과나무가 나의 뼈를 달래곤 했었다 자정이 오고 있는 동안 지금도 그의 맨살을 만지는 것 같았다 이용주 시인 / 꽃잎과 바람 화단에 비친 꽃나무가 울고 있다 나무가 거리에 한눈을 판다 생의 비밀을 새하얀 꽃무리처럼 잃어버린 어떤 사물도 아니고, 뒷모습이 앞모습으로 다닐 알몸이다 이승과 저승의 경계속에 세상을 흔든다 겨울나무를 흔든다 나를 흔든다 물고기 떼를 지어 사이사이 합.. 2023. 5. 6.
김구슬 시인 / 골 깊은 수밀도 외 2건 김구슬 시인 / 골 깊은 수밀도 복숭아를 잘못 샀나보다 깨물어보니 단단하고 도발적이다. 삼킬 수가 없다. 익어가면서 부드럽고 섬세해지는 법이다. 오늘 설익은 복숭아처럼 굴었다. 주변 사람에게 고함을 질렀다. 후련하다. 후련하다는 건 덜 여물어 빽빽하다는 것이다. 상대는 마음으로 나를 뱉어버렸을 것이다. 수밀도 풍부한 과육은 익을수록 봉합선의 골 깊어진 스스로 휘어짐의 생성 결과다. 내겐 언제 깊은 골 생길까? 김구슬 시인 / 라프로그에게서 엘리엇은 라프로그에게서 말하는 법을 배웠다. 보들레르에게서는 가장 비시적인 것도 시의 소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배웠다. 단테에게서는 인간 영혼의 깊이와 높이를 배웠다. 엘리엇은 스스로 은폐하며 폭로하는 법을 익혔다. 그리하여 축축하고 황량한 세계를 창조했다. 말 할 .. 2023. 5. 6.
신형주 시인 / 바람의 여울목 신형주 시인 / 바람의 여울목 ​ ​ 바람의 여울목 한가운데 서 있다 바람은 여울처럼, 빠르고 급하게 흐른다 바람을 만지는 손, 물갈퀴가 나오려는지 간질간질하다 바짓단 무릎까지 걷고 있으면 흰 종아리를 스쳐 콸콸, 세차게 흘러가는 바람 몸이 휘청거린다 발가락에 힘을 주고 버틴다 ​ 허공에 마음의 투망 멀 리 멀리 던진다 이국의 낯선 내음 꽃향기들 새소리들 헤엄치다 그물에 걸린다 펄떡펄떡 살아 움직인다 ​ 휘돌아 가는 바람 속에서 얼핏 나타났다 사라지는 그리움 한 마리 지느러미가 크다 -시집 『내일 헤어진 사람』에서 신형주 시인 경기도 수원 출생. 수원여대 간호과 졸업. 2010년 계간 《시에》로 등단. 2017년 시집 『젬피』 『내일 헤어진 사람』 출간. 2010년 마로니에 백일장 우수상 수상. 2022.. 2023. 5.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