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49215 이재섭 시인 / 참 사랑은 가까이 머문다 외 1편 이재섭 시인 / 참 사랑은 가까이 머문다 멀리 있는 숲은 아름답다. 그 숲은 시가 되고 노래가 된다. 하지만, 가까이 가면 거기 가시덤불이 있다. 엉겅퀴에 긁히고 송층이에 물린다. 멀리 있는 바다는 신비롭다. 그 바다는 꿈이 된다. 하지만, 가까이 가면 거기 노도가 있다. 그 곳에선 때로 배가 전복된다. 멀리 있는 사람은 향기롭다. 그래서 그리움이 된다. 하지만, 가까이 가면 그에겐 가시가 있다. 같이 살면 때로 생살이 찔리고 피가 난다. 그렇다. 가까이 있어주는 사랑이 큰 사랑이다. 가까이서 견뎌주는 사랑이 참 사랑이다. 이재섭 시인 / 무사하지 않은 사랑을 꿈꾸며 진짜 사랑은 무사하지 않은 거란다. 가슴 설레는 '사랑'이라는 그 말이 실은 어떤 분이 지상에 몰래 심으신 위험한 종자 씨란.. 2023. 5. 9. 김기화 시인 / 낙관 외 1편 김기화 시인 / 낙관 내 의지와 상관없이 세상이라는 도화지에 발도장이 찍힌 거래 바람을 가른 울음과 맞바꾼 족장이었다지 성별에 따라 변하지 않는 바코드를 신고 날마다 현관을 나섰던 거야 문을 통과하기 위한 문서를 타고 났지만 때때로 발가벗겨지고 찢기기도 했다는군 견고한 이력이 아무 소용없어 덩그마니 던져진 광장의 오후는 서로의 거리를 지켜봐야만 했지 반지하 푸른 가방은 어두운 우울로 채워졌고 불어난 체중은 더 깊은 지하로 끙끙 들어앉았어 발도장이여 제발 왈츠로 걷게 해주세요 모자를 쓰고 벗을 때마다 주문처럼 중얼거렸던 현관의 기억, 탈출의 통로인 줄 알았던 그곳이 서서히 낯설어졌어 철컥 뒤통수를 환청이 휘감고 있을 때 꿈틀거리는 서곡처럼 택배가 왔어 문을 연 순간 내 무너진 투지가 햇살을 만난 순간이었지.. 2023. 5. 9. 이흔복 시인 / 가을 편지 외 3건 이흔복 시인 / 가을 편지 고죽을 향한 홍랑의 일편심 사랑이 붉어서 가을은 달빛도 한층 높아만 갑니다. 당신은 물로 만든 몸 당신은 벌써 오랫동안 진리보다는 애정에 살고 있습니다. 나는 누군가의 꿈이 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발 헛디딘 나 사랑에 아팠습니다. 사랑을 사랑했던 자신에게만 들키고 싶은 낯선 시간 저 아래 저 아래로 흘러흘러 나 스스로 어디에서 몽리청춘夢裏靑春을 닫고 있을지요? 당신은 내게 꿈이 되어 준 한 사람. 나를 백번 용서하고 천 번 길을 헤매는 동안 꿈을 이어주는, 산울림엔 산울림으로 답하는 당신의 가을 깊은 산에 가고 싶습니다. 간밤에는 바람 냉정하고 상강 물소리 좋은 이 고마움 당신 다 가져도 좋습니다. 이흔복 시인 / 미황사 법당의 작은 종은 백팔 번은 운다 땅끝 사자봉 높은 산.. 2023. 5. 9. 고영서 시인 / 푸른 손 외 1편 고영서 시인 / 푸른 손 손 하나 들이밀고 시집 왔니라 너로 허먼 시할애빈디 내게는 영 마뜩찮은 분이었제 아무렴, 글만 아는 집안이래두 풀 한 포기에 베인 손이 물 한 방울 안 묻히고 열흘을 가야? 논으로 밭으로 내달리다 흰 쌀밥 고봉으로 퍼드리먼 에미 손은 머슴손이어, 오장이 뒤틀리게 사무쳤니라 마당 한 귀퉁이 무쇠솥이 끓는데 어머닌 행주도 대지 않은 손으로 뚜껑을 열고 뜨건 물을 푹푹 퍼 나르시네 -『경북매일/이성혁의 열린 시세상』 고영서 시인 / 됴화(桃花) 됴화, 하고 부르면 좋아진다 물큰한 살냄새를 풍기며 애인이 저만치서 다가오는 것만 같고 염문 같고 뜬구름 같은 해서는 안 될 사랑이 있다더냐 농익은 과육의 즙을 흘리며 팔순 노파가 황도를 먹는다 분홍빛 입술 주름이 펼쳐졌다, 오므려지는 사이 공.. 2023. 5. 9. 김성신 시인 / 드론 외 1편 김성신 시인 / 드론 어떤 날은 동그랗게 날아야 나를 빠져나갈 수 있다 비자나무숲 새들도 내 그림자를 돌아가느라 울음이 한 박자 늦다 볕 쬐러 산양들이 떼로 몰려왔을 때 가는 눈 뜨고 주린 배 움켜쥐면 날아간다, 날기 위해 날아갈 뿐 왜 나는 것들은 꿈이 가벼울까 앉고 걷고 품어내는 것의 바람은 이마를 간질이기도 할 텐데, 어제는 닳은 무릎을 편다 흘러간 노래를 흥얼거린다 거짓은 비로소 활짝 날개를 편다 내 머리 위로 상상이 겹치면 세로줄 무늬 바퀴만 있어 구름이 정좌로 돌려세운 기차는 직선으로 굽이친다 어떤 날은 슬픔을 주렁주렁 매달아 놓고는 끌어안는 자세로 잠을 잔다 지상으로 툭, 떨어지는 한 마리의 공벌레 아무렇지도 않게 내일은 순한 표정으로.. 2023. 5. 9. 김춘 시인 / 술래가 사라졌다 외 1편 김춘 시인 / 술래가 사라졌다 내가 내 속에 숨어드는 사이 술래는 슬퍼졌다. 얼굴을 감싸고 있던 짧은 손가락을 기억해. 내가 내 속에 숨어있는 사이 술래는 사라졌다. 변두리 쪽방에 나왔을 때 네가 없다는 걸 알았다. 지상에 왔던 길 하나 지워지는 순간이었다. 이제 나는 한 순간도 숨지 않겠다고 다짐해. 술래는 늙지 않아 짧은 손가락이 길어지지 않아. 오늘, 창을 닦았다. 앞산으로 오르는 길이 투명하다. 칡넝쿨이 돌돌 말고 있던 고요가 잘근잘근 씹힌다. 평평한 산돌, 산돌의 잔등이 아직 따뜻한데 저만치 덤불 속에서 푸득 산새가 날아오른다. 누구일까. 나의 길어진 손가락이 습관처럼 너를 기억 한다. 김춘 시인 / 강물이 발목을 묶다 강은 귀를 열어 놓는다. 귓속에서 풀려나오는 소리들을 건져 올리던 부리가 긴.. 2023. 5. 9. 김하경 시인 / 공중그네 외 2건 김하경 시인 / 공중그네 우리 동네 공사장 18층 빌딩에 한 사내 줄타기 한다 공중정원에 사방팔방 스치는 바람 속 삶을 꿈꾸는 페인트공 손끝이 환하다 하늘을 팽팽히 버티는 시간 손때는 언제나 반질반질 윤기가 난다 지루한 녹물이 벗겨진 자리 늙은 부모와 자식 얼굴처럼 동그랗다 대롱대롱 외줄에 몸을 맡기고 벽면에 붙은 제 그림자를 따라 색칠하던 한낮 붓끝이 만난 그림자 언저리 2시 30분 방향의 시침과 분침처럼 찰칵거린다 시간은 언제나 과거가 되지만 새로 그린 그림 오늘 하늘에 꽃이 핀다 낡은 시간을 잡고 앉아있는 페인트공 고개 들고 바라보는 어린 눈망울을 의지한다 벽면에 환한 해가 뜬다 김하경 시인 / 도마 속의 삼족오(三足烏) 꿩을 다루는 주인 창을 던지듯 칼을 흔든다 고구려 왕릉에서 발굴된 예맥족들이 .. 2023. 5. 9. 권순진 시인 / 만사형통 외 1편 권순진 시인 / 만사형통 책상에 수북 쌓인 개봉 안 된 우편물 꾹꾹 손가락 힘주고 눌러쓴 편지는 한 통 없고 죄다 돈을 내놓으시라는 엄한 명령이다 거리로 나서니 우르르 밀려드는 간판들 (아마 이것 바닥에 쫙 펼치면 지구를 덮고도 남을 거야) 모두 나 좀 먹여살려주세요 하는데 누구 하나 내 밥그릇에 밥 한 술 보태줄 위인은 없다 (만약 있다면 정말 위대한 사람일 텐데) 전화번호부만큼 생활정보지는 두꺼워지고 글씨는 작아져 사람들의 일상은 조바심으로 팍팍하다 다시 집으로 와 바닥에 몸을 누이니 출구 없는 부채와 온기 잃은 채권의 숫자만 뇌하수체에서 뒤범벅이다 아, 만사 가벼워지고 형통될 그날은 언제일지 천장 사방팔방 무늬를 보며 스르르 눈을 감는다 -시집 『낙법』, 《문학공원》에서 권순진 시인 / 기춘 아지매.. 2023. 5. 9. 이영재 시인 / 암묵 외 1편 이영재 시인 / 암묵 문장은 욕망의 한 방향에 놓여 있다고 본다 뭐 생각도 별반 다르지 않다 어쩌면 욕망은, 욕망의 반대를 향해 있는 것 같다고 언뜻 생각하지 않고자 노력한다 사랑을 하고 비켜나고, 사랑을 하고 합리화하고 토론하는 사람들을 보고, 싸우는 사람들을 보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보고 나면 나는 어디에도 관여돼 있지 않다고 생각할 수 있게 된다 충분하다고 착각하면서, 솔직해진다 솔직하는 말이 얼마나 솔직하지 않은 말인지 생각하면서 생각하지 않아도 생각은 되고 만다 되는 것들에 굳이 관여하는 것만큼 쓸데없는 짓은 없다고 또 생각하면서 썼던 문장을 지운다 지운 문장을 다시 쓰고 고친다 고친 문장은 지워진다. 문장에 관여하는 것처럼, 타인을 포함한 나의 욕망에 관여하는 행위마저 불필요하다는 걸 이영재 .. 2023. 5. 9. 윤재철 시인 / 거꾸로 가자 외 1건 윤재철 시인 / 거꾸로 가자 짧게 가자 빠르게 가자 무의미하게 가자 그녀는 잊기 위해 드라마로 간다 그녀는 알레고리에 익숙하다 판타지에 익숙하다 리얼리즘은 천박해 부담스러워 상징적으로 가자 모자 쓰고 가자 가리마도 가리고 바로 클라이맥스로 간다 한일강제합병은 모른다 진주가 어디 붙어 있는 지도 모른다 그녀는 내비게이션과 스마트폰에 익숙하고 온갖 암호와 예측에 충분히 익숙하다 나는 거꾸로 가자 예측 불가능하게 가자 벌거벗은 몸뚱이로 가자 저 강변 항하사 같은 금모래밭 남풍에 반짝이며 팔랑이는 미루나무 이파리 그 오르가슴을 나는 잊지 못한다 윤재철 시인 / 생은 아름다울지라도 달리는 고속버스 차창으로 곁에 함께 달리는 화물차 뒤 칸에 실린 돼지들을 본다 서울 가는 길이 도축장 가는 길일 텐데 달리면서도 기를.. 2023. 5. 9. 함태숙 시인 / 수태고지 외 1건 함태숙 시인 / 수태고지 너를 기다리다 문득 한 소식 받으니 너는 몇 겹 하늘 위 공허를 다 데리고 네게서 소멸된 모든 빛을 다 데리고 죄 받듯 온단다 벌 받듯 온단다 간 밤 계면조 비탄조로 서럽게 울던 소름 돋게 지르던 귀성에 실려 세세생생 풀지 못할 원한 보듬고 잊어도 잊히지 않는 노여움 살뜰히 한탄하듯 구름 너울너울 억장너머 뭉게뭉게 복 지으러 온단다 몸 지으러 온단다 큰 기쁨을 뒤로하고 큰 슬픔을 앞세워서 그 슬픔에 거한 영원의 이름으로 영원을 품은 찰나의 인연으로 업 지으러 온단다 업 지우러 온단다 아주 오는 것은 아니게 아주 오지 않는 것도 아니게 너를 기다리다 몇 겁을 다해 너를 기다리다 오늘은 돌덩이에 성령이 깃든다 -월간 2002년 《현대시》 등단시 함태숙 시인 / 쥴리라고 불리는 것들 .. 2023. 5. 8. 이수 시인 / 길을 위하여 외 1건 이수 시인 / 길을 위하여 꽃 진 라일락 가지가 드리우는 그늘 아래 앉아 공원 내 음악방송에 귀 기울여 보기도 하며 머언 거리에서 서성거릴 피멍 든 내 삶의 경골의 구둣소리를 듣는다 세상 속 어떠한 절망도 사람을 끝장 낼 수는 없다고 중얼대며 가는 길 위에서 따가운 오월의 햇빛으로 달아오른 얼굴을 들고 잠시 바라보면, 등성이로 구름을 몰아가는 바람의 귀엣말 같은 돌돌거림 바윗길 옆, 오두마니 앉아 있는 내 표정에서 얼른 슬픔을 읽어 내지 못한 사람들은 셔츠 앞자락을 펄럭이며 저만치 앞서 가 버리고 백련암 오르는 길 옆, 바위틈마다 촘촘히 박힌 날개이끼들을 밟을 새라 조심하며 나는 또 다시 발걸음을 옮긴다 길고도 먼 길, 나는 이 길에 대해 생각해 보는 것이다 이러한 피로와 숨가쁨이야말로 이미 능선을 타고.. 2023. 5. 8. 이전 1 ··· 18 19 20 21 22 23 24 ··· 410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