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49215 박석구 시인 / 하루에 한번쯤은 외 1건 박석구 시인 / 하루에 한번쯤은 하루에 한번쯤은 혼자 걸어라 세상 이야기들 그대로 놔 두고 세상 밖으로 걸어 나와라. 말이 되지 말고 소가 되어 나에게 속삭임 혼자 걸어라. 괴로움이 나를 따라오거든 내가 나에게 술도 한잔 받아주고 나를 다독거리며 혼자 걸어라 나무도 만나고 바람도 만나면 마음은 어느 사이 푸른 들판 잊었던 꽃들이 피어나고 고향 내음새 되살아나 내 가슴을 울리는 나의 콧노래 하루에 한번쯤은 이렇게 나를 만나며 살아가거라 박석구 시인 / 2월 대나무 카페 암탉 한 마리 꺾인 피마자가 떨군 씨를 쪼다 갔다 대밭 언저리 곤궁이 가득한 호박이 댓잎차를 바닥에 겨우 깔고 썩고 있다 게으름을 끌고 온 고양이가 핥다 고개를 저으며 지나갔다 마른 개똥이 지키는 두더지 굴속에 사촌누이 눈물이 한 가득 있다.. 2023. 5. 13. 문봉선 시인 / 꽃핀다 외 1건 문봉선 시인 / 꽃핀다 햇살 내려 꽃핀다 오종종 앉은 자리꽃, 꽃핀다 뻔했다, 꽃핀다 불보듯 꽃핀다 불꽃 피듯 꽃핀다 손바닥만한 물웅덩이 해뜬다 고것, 땅따시더니, 달뜬다 이내 살구 나뭇가지 불붙는다 뿜어져 오르는 피 문봉선 시인 / 앵두나무 ‘구쭈베니 바르면 부끄러버서’* 꽃봄에 붉은 앵두열매 맨입술 열적마다 달콤한 향기로 초록세상 자지러진 적도 있었다 말을 할 때나 웃을 때 수줍은 듯 두 손으로 가리고 밥을 먹을 때도 입을 크게 벌리기는 커녕 오물내밀어서 요조한 숙녀라 칭했다. 꽃이 먼저피고 잎이 뒤에 나오는 상사화相思化, 꽃과 잎은 서로 보지 못하는 앵두나무꽃 피었다 지고, 어느 해부터 꽃도 피지 않고 뿌리 밑에 벌레가 들끊기 시작한다. 잔기침 후 잎 떨어진 그자리그늘엔 보라색 제비꽃자릴 틀었다, .. 2023. 5. 13. 정다혜 시인 / 콩밥 먹다가 외 1건 정다혜 시인 / 콩밥 먹다가 - 딸아이에게 저녁밥 짓는데 넣으려는 검정콩 한 줌 물에 불렸는데도 단단하다 어디 단단한 슬픔이 있던가? 콩은 뜨거운 입김 만나 순해지다 쌀 속에 숨어 차진 콩밥 만들었다 콩밥을 싫어하여 콩만 골라내던 눈 맑은 그 아이 생각에 목이 메고 잊고 살았던 슬픔의 오장육부에 검은 콩알들 산탄처럼 박힌다 아이는 그해 여름 길 위에서 콩 꽃처럼 피었다 떨어졌다 무심히 콩밥 담는 저녁밥상에서 다시 만나는 검은 화인火印 여태 너 나하고 살고 있었니? 내 안에서 너, 콩처럼 살고 있었니? 너 묻고, 나는 평생 콩밥 먹는 죄인이었는데 너 묻고, 나는 평생 콩밥 먹는 슬픔이었는데 -시집 『스피노자의 안경』, 고요아침, 2007. 정다혜 시인 / 행복한 이기주의자의 탄생 늘 물어보셨다 내가 어떤 .. 2023. 5. 13. 서형국 시인 / 꽃이 꽃배달 하면 외 2건 서형국 시인 / 꽃이 꽃배달 하면 뒤틀린 왼팔로 바지춤을 내리고 꽃 흐드러진 들에다 시원하게 물을 뿌린다 고추 모종 심는 아낙들 깔깔대다 ㅡ올해는 고추농사 풍년이겠네 꽃 한 다발 꺾어 쥐고 어눌한 발음으로 ㅡ어바 어바바 아랫도리 건수는 잊고서 환하게 웃는다 다섯 살부터 나이를 꽃밭에 뿌린 총각 그 남자 분명 꽃집 총각이겠지 온 동네 꽃밭 주인이겠지 서형국 시인 / 개고생 짤 만큼 짜낸 시를 탈수기로 돌리면 돌돌 원심력은 최대한 멀리 생각을 떨어냅니다 그러면 낡은 문장이 행여 돌아올 길 잃을까 미련으로 묻어오다 자음과 모음으로 부서져 그림 형제 동화처럼 빵가루로 흘려집니다 다시 돌아오지 않겠다는 눅눅한 약속을 탱탱한 다짐에 널면 반성은 마를수록 먼 황무지 보름달로 뜹니다 그 달 띄워놓고 마누라 구멍 난 검.. 2023. 5. 13. 고재종 시인 / 휘파람새 소리는 청량하다 고재종 시인 / 휘파람새 소리는 청량하다 한적한 숲길, 휘파람새 소리에 나뭇잎들 일순 귀를 모아 고요다 다람쥐가 상수리를 까듯 누구에게나 삶엔 목적이 있다, 거기에 의미의 씨앗을 심는 것은 자신이라고 말하는 인생론들의 륙색을 벗고 앉는 자리 발끝에 걸린 백리향의 향기를 탑재한 휘파람새 소리에 나는 바람자락을 여며 고요다 내게 경쟁과 속도의 시간은 관념이었다 내가 하찮거나 사소한 만큼의 내 크기로 숲길에서 개암나무 열매 몇 개를 주우며 듣는 경이의 전언이란 특별하고 참된 삶에 대하여 따지지 않는 휘파람새 소리는 다만 청량하다는 것 말할 수 없어 말하지 않는 사랑과 외롭고 쓸쓸한 숲길은 여기 있어 고요다 계간 『시인시대』 2022년 겨울호 발표 고재종(高在鍾) 시인 1957년 전남 담양 출생. 담양농업고등학.. 2023. 5. 13. 임지훈 시인 / 페루 외 1건 임지훈 시인 / 페루 철조망인지 몰랐다 영토를 긋는 신경질인 줄 알았다 잠깐 기댔을 뿐이다 점점 몸을 파고 들 줄 몰랐다 선회하기에 늦었다 상처에 생살이 돋아난다 다시 바람이 불어와 철조망이 바람 소릴 내면서 생살을 긁는다 이젠 진물을 바라보고 있다 나는 저항하는 만큼 뒤틀린 채 살아가게 만들어졌다 자유는 늘 바로크* 처럼 생겨 먹었다 * 바로크 : '일그러진 진주'라는 포르투칼어. 르네상스가 지난 16세기 말부터 17세기까지의 건축 미술 등의 예술 전반의 특징을 가르키는 말 임지훈 시인 / 쪼그라든 볏 쪼그라든 볏에 매달린 닭이 잠에 겨워 발부리에 걸리는 투명한 가을빛도 버겁다 피기 전에 지는 것을 깨달은 꽃은 독하다 살모사 같이 각이 또렷한 대가리를 꼿꼿이 쳐들고 들국화 한 송이 온 가을을 혼자 지탱.. 2023. 5. 13. 백은선 시인 / 여의도 외 1건 백은선 시인 / 여의도 눈 내리는 밤, 차를 몰고 여의도로 간다. 고층 빌딩들, 불 꺼진 창들, 텅 빈 거리를 채운 적막. 두근거리는 새하얀 적막. 강변을 지나 다리를 건너 여의도로 간다. 새를 봤어. 새떼를 봤어. 불길하게 날아오르는 검은 청력. 눈이 내리는 소리가 들려? 눈 내리는 강가에 서서 눈을 감고. 한 송이씩 허공을 그으며 아주 잠깐씩 허공을 움켜쥐었다가 놓는 소리. 들려? 언어는 사라지고 기호만 가득한 너는 누구를 이해한다는 기분을 가져본 적 있어? 이해받는 기분은? 나는 네가 다 안다고 그만 말해도 된다고 할 때, 네 얼굴을 찢어버리고 싶었어. 눈한송이, 눈두송이, 눈억만송이, 부수며 달려가는 차들 어둠을 휘젓는 빛줄기들 들려? 눈이 땅에 닿는 순간 나는 파열음. 고층 빌.. 2023. 5. 12. 윤중목 시인 / 나의 기도 외 3건 윤중목 시인 / 나의 기도 처음으로 여인의 벗은 몸을 만졌을 때처럼 처음으로 파도치는 바다를 보았을 때처럼 처음으로 백범일지를 읽었을 때처럼 다시금 심장의 고동소리가 듣고 싶다 매순간 제발 두근대다 살고 싶다 윤중목 시인 / 약속 그대 떠나는 빈자리에 우리 한 그루 나무를 심자. 센바람에 빛 고운 꿈을 가슴 속 깊이 싶어 간직하자. 그래서 그대 돌아올 먼 날, 궁근 땅에도 잎새 우거진 그 늠름한 나무를 노래부르자. 푸르러진 가슴을 열어 우리 못다 한 꿈을 다시 피우자. 윤중목 시인 / 대설大雪 땅 위에 곤두선 모든 숨붙이들아 하늘의 명령이다 무장해제하라 윤중목 시인 / 커피 한 잔 펄시스터즈라고 옛날에 듀엣 자매가수가 있었는데요 언니는 동아건설 최 회장님의 부인이 되셨고요 지금으로 치자면 아이돌 걸그룹인.. 2023. 5. 12. 최규리 시인 / 릴리 릴리 최규리 시인 / 릴리 릴리 # 적의 없는 눈동자로 릴리 릴리 눈앞이 온통 하얘져서 낭만을 가지고 싶은 단순함이 백합을 꺾어 교실 창가에 꽂는다 선생님은 예쁘다고 친절하게 옷을 벗어주었다 과분한 사랑이다 여름이라 옷을 벗는 것이 맞다 하얀 칠판 위에 이름을 적는다 옷 벗는 아이 : 선생님 떠드는 아이 : 엄마 화장실 청소 : 앞에 앉았지만 한 번도 말을 하지 않은 애 수행평가 시간이다 선생님은 도화지를 보면 가슴이 벅차다고 한다 숨쉬기 어려우니 옷을 벗는 것이 맞다 아무것도 그리지 않은 도화지를 보며 흰 꽃잎이 예쁘구나 아무것도 안 보이는 것은 아무거나 말하면 된다 아무거나 말했으니 아무거나 되어 버린다 %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사람 미련하게 착하다고 바보 같아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이 있다 법이 .. 2023. 5. 12. 신현락 시인 / 잃어버린 비망록 외 2건 신현락 시인 / 잃어버린 비망록 시간에 영혼이 있느냐는 물음에 시간은 있지만 그것은 없다고 답한 적이 있다 삶의 우연에 나와 너의 거리를 대입한다면 말의 매듭은 풀어지고 길은 안개처럼 떠다닐 것이다 추억이란 말만 들으면 슬픔이 밀려오는 건 그 때문일까 이생이 다 가도록 기별은 오지 않는데 허무를 편애하는 시간이 지나가면 영혼이 돌아와 줄까 나는 너의 옛날이고 너는 나의 옛날이 아니다 다만 삶이 우리를 기억할 것이다 안개의 길이 끝난 뒤에 남아 있는 이것을 그것의 은유라고 말하기 위해 일생을 떠돌았다 누군가 영혼에 빛이 있느냐고 묻는다면 다른 사람이 되다 만 시간과 발자국마다 수록된 공백의 목록을 보여주리라 신현락 시인 / 노랑의 현재 시각표 기차가 지나고 노랑나비 떼, 향연처럼 피어난다 내.. 2023. 5. 12. 배윤주 시인 / 풀 외 6건 배윤주 시인 / 풀 잡초는 언제든 북받쳐 올라올 준비가 되어 있는 맹수의 발자국 무심히 스치는 바람에도 터질 듯한 체기를 가지고 뇌리에 무수히 새싹을 내는 것이다 풀씨의 가벼움으로도 기울어지는 것은 기세 확장술 풀잎 위에 앉는 새는 울 시간이 없다 나선의 칼날이 파고드는 풀베기에도 풀의 향기는 마르지 않는다 -시집 『옆으로 누운 말들』 (시산맥, 2022) 수록 배윤주 시인 / 바람이 가는 길을 간다 한가한 고원은 없어 내밀한 저음에서 세상의 파란 고음까지 벽을 만나면 벽을 넘고 숲을 만나면 숲을 뚫고 가는 거야 바위를 흔들며 물에 흔들리며 가는 거야 부딪히며 가는 길에 풀잎 위에서 잠시 멈추어도 괜찮아 꽃잎이 지는 속도에도 상처받지 않고 새벽이 오는 고원의 꼭짓점을 향해 가는 거야 언젠가 우리에게 헤어.. 2023. 5. 12. 정기복 시인 / 들쥐의 내력 외 1건 정기복 시인 / 들쥐의 내력 바람 쏠린 흙담 구멍 사이로 수숫대가 허연 뼈를 드러냈다 비스듬히 기울어가는 흙벽에서 헐어내린 진흙 말라 쌓이고 암팡진 개미 부지런히 굴을 팠다 통나무 파내어 기둥에 걸고 몇 대를 내려 누렁소 살찌웠을 여물통에는 비름풀이 홀로 웃자랐다 익모초 푸른 향기 그윽한 뒤안에 살구 제풀에 익어 떨어지도록 매미는 한낮을 울고 사뭇 인기척이 그리운 집쥐는 막무가내 들쥐가 되어갔다 우리의 삶이 이와 같아서 흙담에서 내몰린 생들이 대도시 변두리 산동네 콘크리트 벽을 치고 오르며 시리고 애달프게, 들쥐처럼 산다 정기복 시인 / 서울에서의 첫눈 겨울을 앞질러 온 눈발이 쌓이지 못하고 도시 한귀퉁이를 서성대다가는 서둘러 진창을 놓았다 강화행 막차가 끊긴 신촌로터리 한쪽 담에 기댄 포장마차가 귀가를.. 2023. 5. 12. 이전 1 ··· 15 16 17 18 19 20 21 ··· 410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