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49215 조윤희 시인(장흥) / 화양연화 외 1편 조윤희 시인(장흥) / 화양연화 - 우리 인생의 가장 아름다웠던 시절은 과연 언제였을까 어떤 마음들이 저 돌담을 쌓아 올렸을까 화가 났던 돌, 쓸쓸했던 돌, 눈물 흘렸던 돌,슬펐던 돌, 안타까웠던 돌, 체념했던 돌, 그런 돌들을 차곡차곡 올려놓았을까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을 때로는 발길질에 채였을 어느 순간 차였다는 사실도 잊은 채 제자리 지키고 있었을 조금은 흙 속에 제 몸을 숨겼을 심연 속에서 푸른 눈을 뜨고 있었을 그런 것들을 일으켜 세웠을까 저자거리를 헤매이던 마음들이 그 바람 불던 거리에서 자꾸만 넘어지던 마음들이 자기 몸을 세우듯 돌을 쌓아 올려 돌담을 세워 태풍에도 끄떡없는 울타리를 만들었을까 하나하나의 돌멩이들이 채워 논 풍경 그 돌담 밖으로 목련꽃 봉오리 벙그러질 때 그리운 추억의 이름으로.. 2023. 5. 15. 정세훈 시인 / 봄꽃 외 4편 정세훈 시인 / 봄꽃 보송보송한 땅에서만 살아간다면 봄꽆이 아니지 따뜻한 곳에서만 피어난다면 봄꽃이 아니지 때로는 꽁꽁 얼어붙기도 하고 때로는 겨울 찬바람 불기도 하는 그런 곳에서 살아 그런 곳에서 피는 거지 겨울이 지났다고 혼자서만 피어난다면 봄꽃이 아니지 봄꽃이 아니지 메마른 들녘 여기저기 서로서로 더불어 한마음으로 흐드러지게 피는 거지 봄이 왔다고 마냥 피어 있는 것은 봄꽃이 아니지 천지에 푸른 들녘 포근히 깔아 놓고서 홀연히 사라지는 거지 홀연히 사라지는 거지 정세훈 시인 / 저 헌 기계 울고 있네 이 한밤 새고 나면 폐기처분이 될 노후될대로 노후된 저 헌 기계 울고 있네 전자동 새 기계 들어온다고 모두가 들떠있는 이 공장 작업장 마모된 기어 달랑 달고서.. 2023. 5. 15. 김청우 시인 / 중력 김청우 시인 / 중력 그대는 당신의 검은 구멍 아래를 내려다보며 중력으로 수축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대의 사건이 자기磁氣로 수축하고 내부의 밀도가 높아졌을 때 붉은 불이 붙었습니다. 동시에 위성처럼 돌던 내 꿈과 수치와 모멸이 붉은 피 되어 성기로 일어서고 그대는 광속으로 8분 20초의 거리를 뛰어넘어 내 살갗 위를 흘러 태웁니다. 자기의 죽음 하나 꺼내 보려는 수축과 각인刻印으로 죽음을 확인하려는 팽창의 힘이 대면합니다. 그 균형으로 주계열성이 된 그대의 중심핵에서는 우울로 빛을 만드는 융합반응이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그대의 표면을 만들었고 내 피부를 스쳤음을 몰랐습니다. 나는 무럭무럭 자랐습니다. 그러나 마침내 그 우울이 다 타고 이제 그대의 중심에는 빛의 중심핵만이 그대를 밝히는 때가 옵니다. .. 2023. 5. 15. 송희지 시인 / 난바[難波] 외 2편 송희지 시인 / 난바[難波] 난바는 병원에 있었다. 수의사는 감탄했다. 약국에서 죽은 토끼 냄새가 났다. 멜빵바지 입은 꼬마가 엉엉 울고 있었다. 엄마가 닥치라고 했다. 안전하게 사랑하세요 초박형 콘돔 사이즈. 아이의 내일을 책임지세요 스무 가 지 야채 들어간 어린이 주스 꼬마는 주스를 먹다가 토한 것이다. 모든 일이 처음이었던 캐셔는 손님들을 향해 외 쳤다. 삼, 삼, 삼... 삼천원입니까? 난바는 맥도날드에서 점심식사 했다. 난바는 우체국에서 소포를 부쳤다. 배달원이 상자를 옮기고 있었다. 하나같이 먼 곳으로 가는 택배들입니다 요. 상담원 김미영 씨가 어저께 아빠의 부고(訃告)를 들었다고 했다. 이 모든 일은 저번 달 어머니가 보셨던 산술 점에서 기인했다고 했다. 미영 씨가 눈물을 훔쳤다. 삼천오백 .. 2023. 5. 15. 임헤라 시인 / 나는 구두가 없어요 임헤라 시인 / 나는 구두가 없어요 저 구름보다 아름다운 구두를 본 적이 없어요 기분에 따라 변하는 부드럽고 신비한 저 가죽은 수양버들이나 노을이나 봄을 벗겨 만들었다고 믿어요 아무렇게나 누워 나는 하늘에 발을 대어봐요 날마다 크고 작은 구두들을 신었다가 벗으면서 하루 수백 켤레의 구두를 보내주는 슬픔에 대해 생각해요 해안에서 산기슭까지 버려진 구두들이 쌓여 있어요 나는 언제까지 발에 맞지 않은 구두를 신어봐야 할까요 세상의 모든 구두는 젖어 있게 마련이고 비어 있어요 나는 구두가 없어요 맨발을 거두어 횡단보도에 서지요 라면 국물로 배를 채우고 편의점을 나서지요 오늘도 공중에는 어느 순례자의 장례식장처럼 수많은 구두가 모여 있어요 나는 하나하나 발을 넣어볼 작정이에요 발을 넣으면 금세 쏟아져버리는 구름도.. 2023. 5. 15. 백우선 시인 / 훈暈 외 3편 백우선 시인 / 훈暈 알든 모르든 받아주든 물리든 천 리 밖이든… 해에겐 듯 달에겐 듯 내 혼은 그의 훈暈* *훈暈: 햇무리·달무리 [일훈·월훈]의 무리, 곧 어떤 것에 둘린 빛의 테. 백우선 시인 / 서산 마애불 석공이 웃고 웃어바위가 따라 웃자둘은 서로 웃음을 다듬었다.해, 달, 별, 바람, 눈비,새, 곰, 꽃도 같이모두의 웃음,웃음 중의 웃음을 웃으려고다듬고 다듬었다. 누구든 무엇이든언제 어디서든 어떻든꽃의 꽃으로 웃자며지금도 웃음을 다듬는다 백우선 시인 / 그들의 것들 내 끼니에는 그들의 먹지 못한 끼니가 들어 있다. 내 잠에는 그들의 자지 못한 잠이 들어 있다. 내 쉼에는 그들의 쉬지 못한 쉼이 들어 있다. 내 웃음에는 그들의 웃지 못한 웃음이 들어 있다. 내 안전에는 그들의 접하지 .. 2023. 5. 15. 양왕용 시인 / 과목과 노인 외 3편 양왕용 시인 / 과목과 노인 지난 여름과 가을의 열매 모두 어디로 보내고 앙상하게 가지만 남아 눈맞은 과목 사이로 어깨 꾸부정한 노인 다가오고 있음. 아직 아무도 밟지 않은 눈길 위로 발자국 함께 오고 있음. 눈사태 속에서 잠시 눈그친 오늘 아침. 이제는 노인 과목 흔들며 가지의 눈송이 털면서 마른 기침으로 오고 있음. 산책하기에는 이른 시간. 드디어 과목 붙들고 제자리에 섰음. 가지보다 앙상한 손가락 가지마다 눈뭉치 매달고 있음. 휘파람 소리까지 내는 노인의 입가에는 알 수 없는 미소 보이기 시작함. 매달린 눈뭉치 자꾸 떨어지고 떨어지는 눈뭉치 과일알 줍듯이 주워가면서 점점 빨라지는 동작 노인의 것 아닌 젊은 기운으로 피어오르고 있음. 다시 눈내리기 시작하고 점점 굵어지는 눈발 속에서 노인의 동작 그칠.. 2023. 5. 15. 전정아 시인 / 구관조 외 2편 전정아 시인 / 구관조 큰 산 하나가 있다 그는 기다림의 달인이다 몸이 시우쇠처럼 무거울 때 그를 찾는다 어린아이마냥 입을 크게 벌리고 끝말잇기 놀이를 한다 내 고인 말들이 바닥을 보일 때까지 그는 마르지 않는 샘, 푸른 옷으로 갈아입는 내 안의 말들, 그를 만나기 위해선 몇 개의 언덕을 넘어야 한다 딱따구리의 노래와 만나곤 하는 참나무숲, 뿔 세운 낙엽송 아래를 지나 신발이 흙 두꺼비를 닮을 때쯤, 우렁우렁 마중 나온 그와 만난다 나를 흡혈하던 유물론은 잠시, 안녕 고갯마루에 올라 입을 연다 콘크리트를 입었던 말들이 우르르 달려나온다 해소 기침이 끊이지 않던 생의 가건물들, 나무가 된다 숲이 된다 은빛 메아리로 불 켜진 산 퍼드득, 내 안에 살고 있는 구관조 싱싱한 말들이 날아오른다 -《우리시》 200.. 2023. 5. 15. 최명란 시인 / 일출 외 2편 최명란 시인 / 일출 파도가 갯바위 무거운 몸을 씻겨요 바다의 어마어마한 사정을 어찌 알까만 새벽비가 파도 표면에 닿자마자 둥글게 뒤척이고 난 삶은 알을 까다가 경박한 손끝이 찔렸어요 주홍 피 한 방울 톡 동그랗게 솟아요 이토록 둥근 몸에 가시를 숨겼으니 고독한 눈을 감았다 떴다 떴다 감아요 어쩌나~ 최후의 나의 사랑 당신은 죽은 나를 맡길 수 있는 유일한 사람 해묵은 옛사람들은 무슨 재주로 다 사라지고 비보다 수척한 물보라의 중보기도만 들려요 이 가느다란 기도가 파도였나 말이죠 나는 당신의 고통 없는 부화 일정한 산란 불안정한 균열 싱거운 떨림 사랑의 낟알을 품은 바다가 어제 해를 밀어 올려요 이럴 때 꼭 조심성 없는 새벽 암탉이 높게 울어쌓아 여명은 반드시 경쾌한가 말이죠 최명란 시인 / 철쭉 .. 2023. 5. 15. 김옥종 시인 / 민어의 노래 외 2편 김옥종 시인 / 민어의 노래 고사리 장마가 지나고 난 바닷길 깊게 패인 여울물 소리에 새우떼의 선잠을 깨우는 밴댕이와 알 품은 병어들의 놀이터가 돼버린 전장포 앞바다에서는 서남쪽 흑산도에서 진달래꽃 피기를 기다렸다가 뻘물 드리우는 사리물 때를 기다려 뿌우욱 뿌우욱 부레롤 내는 속울음으로 내 고달픈, 고향에 다다른 칠월의 갯내음을 아가미로 훑는다 마늘 뽑고 양파 캐어 말리던 늦은 오후, 구년은 자랐을법한 일 미터의 삼키로짜리 숫치를 토방에 눞히고 추렴하여 내온병쓰메에 내 등살은 막장에 얹어 먹고 목살은 묵은지에 감아먹고 늙은 오이짠지는 볼 살에 얹어 먹고 고차 참기를 장에는 부래와 갯무래기 뱃살을 쳐서먹고 갈비뼈와 등지느러미 살은 잘게 조사서 가는 소금으로 엮어내는 뼈다짐으로 먹어도 좋고 내장과 .. 2023. 5. 15. 김현옥 시인 / 잉여 외 2편 김현옥 시인 / 잉여 잉어가 되지 못한 잉여는 슬픈가? 엉엉 울기를 그친 잉여는 화창한가? 어영부영 적막을 돌아다니는 잉여는 언제 잉어가 되어 물속을 헤엄쳐 다닐까? 잉여가 되어본 적이 있는 잉어나 잉어가 되어본 적이 있는 잉여만이 서로를 사랑할 수 있는 걸까? 잉여의 세월을 잉어처럼 헤엄쳐본다 잉어가 되고 싶었던 청춘은 어디로 다 떠내려갔나 잉어의 규격에서 멀리 헤엄쳐온 잉여야 세월 속을 유유히 헤엄치며 노는 잉여야 잉여의 잉어가 도대체 있기라도 한지 궁금한 잉여야 잉잉거려도 한결같이 여여한 잉여야 영영 어디로 갈 작정이니? 영영 잉여야 김현옥 시인 / 꽃보다 꽃에게 말거는 울 엄니 꽃보다 향기로워 꽃에게 입맞추는 울 엄니 꽃보다 천진해 꽃을 애지중지하는 울 엄니 꽃보다 사랑스러워 꽃옆에.. 2023. 5. 14. 손영 시인 / 폐선 외 2편 손영 시인 / 폐선 거침없는 질주에 기꺼이 몸을 열어 준 바다 꽁무니를 쫓아오던 갈매기 떼가 세상을 이어주고 꿈을 실어 나를 때 세상은 모두 그의 편이었다 파도에 치어 세상 끝자락까지 떠밀려온 폐선 갯벌에 누운 지 몇 해가 지났다 바람에 휩쓸릴 때마다 삐걱삐걱 금가는 소리, 살점 떨어지는 소리 높은 파도자락이 다녀간 흔적을 붙잡고 폐선의 이마 위로 갯강구 떼가 몰려다닌다 한때 몇 개의 회사를 거느렸던 그의 앞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허리를 굽혔다 그가 완성한 퍼즐은 어느 날 도미노처럼 무너지고 경호를 받았던 환호나 찬사의 목소리도 모두 떠났다 이제는 요양원에 안착한 저 폐선 마지막까지 놓지 못했던 큰 바다로 날아가는 재기의 꿈 어느 모래밭에 묻었는지 요양원 침대에 두 손 묶인 채 기약 없이 누.. 2023. 5. 14. 이전 1 ··· 13 14 15 16 17 18 19 ··· 410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