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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연희 시인 / 도무지 외 1편 한연희 시인 / 도무지 밍로는 어떻게 산을 옮겼을까* 밍로는 어떻게 신을 잃어버렸을까 어째서 구름은 구름으로 있게 되었을까 봄방학은 이제 사라지고 말았는데 학교 앞에 아이들은 한 명도 보이지 않고 모르겠어 왜 어린 딸은 숨죽여 울려고만 하는지 밍로가 누군지 기억나질 않는데 어떻게 딸은 밍로를 찾아 부르는 것일까 밍로 때문에 구름이 모여드는 것일까 잔뜩 찌푸린 구름 안에 밍로가 들어간 것일까 뒤쪽에 있던 산이 어느새 우리 앞으로 고개를 틀었는데 작고 볼품없는 앞코를 들이밀어 밍로를 만들어냈을 신이 우리를 다시 거둬가기 위해 손을 내민 것일까 도무지 모르겠어 방학이 오면 우리는 산에 가기로 했었는데 아직 눈이 쌓인 산허리를 오르며 설인을 찾기로 했었는데 키가 너무 커서 곧 쓰러질 것 같았던 설인을 딸은 언젠.. 2023. 5. 17.
박현구 시인 / 봄빛 유예猶豫 외 2편 박현구 시인 / 봄빛 유예猶豫 출생신고를 연둣빛으로 해야겠다 분홍이 제가 먼저라면 어쩔 수 없지 며칠 전 폭설에 무릎이 시리게 묻히더니 흰 바탕에 그어진 검은 빛 도로가 겨울을 마감처럼 녹였고 나는 새싹 틔울 준비를 서둘렀다 얇은 막이 씌어 진 시야가 환한 남쪽 하늘을 머금자 내 어깨의 봄빛을 누르며 남아있는 겨울이 춥게 수군거렸다 우주에는 에너지보존법칙이 있어 눈은 북쪽에서 온다며 호흡 한 번 멈추고 주변을 보라고 했다 막 지난 소한小寒이 저만치서 웃고 있었다 아직은 겨울의 한가운데서 검은 선을 가르는 자동차가 깔깔대고 밝은 기운이 봄볕처럼 따뜻하다 성미 급한 내가 그대 마음속에 어떤 해후로 들어가고 싶었던 거다 박현구 시인 / 부유물(浮遊物), 그리고 흘러드는 개천 위로 보(洑)가 안은 물에서 잠자리.. 2023. 5. 17.
조성순 시인 / 옛집 외 1편 조성순 시인 / 옛집 살던 집에 가봤네. 사랑은 퇴락하여 반쯤 무너지고 댓돌엔 인적 그쳐 이끼 거뭇하네. 마루 밑엔 녹슨 낫과 호미, 흙이 되어가고 밟으면 우렁차게 소리치며 돌던 네 기상은 어디로 갔나? 허물어진 헛간에 탈곡기 무심히 놓여 있네. 부엌에선 어머니와 아주머니들 고소한 냄새 가득한 음식 장만으로 부산하고 바심하는 마당엔 할아버지 숙부님들 듣기 좋은 웃음꽃 피우고 누이들과 나는 장난질하며 볏단 날랐지. 장대비 오는 여름날엔 하늘에서 떨어지는 미꾸리가 신기했지. 개구리들이 둥둥 배를 두드리며 마당을 가로지르고 습기 찬 도랑에선 가끔 두꺼비가 나들이 나왔지. 그리운 것들은 다 가시고 들에 있던 개망초, 옆으로 기어가는 바랭이풀 마당을 덮었구나. 눈시울 뜨거워져 발길을 돌리는데 -아들아, 아들아, .. 2023. 5. 16.
권은주 시인 / 둘레 길에서 외 1편 권은주 시인 / 둘레 길에서 제주도 해안도로를 걸어가고 있었다 잠시 뜨거웠다 어느 시절에 식어버린 까만 현무암 그 돌 틈 사이에 뿌리를 두고 바람을 흔들고 있는 작은 손을 보았다 무엇을 기다리는지 마음일까, 몸을 필사적으로 흔들게 하는 이유 그 사이에 바람은 지나가고 또 지나가고 바람만큼 매서운 칼날이 있을까 유연함으로 바람에 뿌리를 내리고 씨를 뿌리고 몇 년을 견뎌내고 배웠을 그 무엇 바람을 막는 방법 다시 우린 해가 지는 방향 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권은주 시인 / 4월 16일 그러고 보니 모든 거짓들은 어둠속에서 오랫동안 끙끙거리다가 예기치 않은 아침에 깨어난다 아침, 경고음도 울리지 않았다 순간 진동이 감지되더니 거실에 있던 브라운관이 그녀를 안고 바다 속으로 넘어졌다 안전지대는 없다 안전제일이.. 2023. 5. 16.
심인숙 시인 / 진수성찬 외 1편 심인숙 시인 / 진수성찬 거실 식탁 위에 한 상 가득 차려져 있다 뚜껑도 덮지않고 밥상이 따끈하다 햇빛 밥 한 그릇 햇빛 미역국 햇빛 나물과 햇빛 겉절이 햇빛 동그랑땡 버무리고 무쳐놓은 햇빛에 황석어젓갈을 쓰고 민들레꽃기름을 쳤구나 누에가루로 간을 맞추었구나 수저 한 가득 늦은 햇빛을 뜬다 미역국은 낳아준 사람이 먹는다는 말 잊지않고 엄마처럼 오래 씹어 먹는다 행운목에도 한 입 꽃잎 벽지에도 한 입 디저트로 수화기에 따라온 바람을 찻물에 타서 마신다 식탁 위에 한 상 차려진 햇빛을 되새김해 오래오래 씹어 먹는다 -2009 현대시학 9월호에서- 심인숙 시인 / 골목 무수히 많은 국숫발이 흔들린다 빗금 친 그 사이로 가늘고 긴 햇살이 굽이굽이 신기루 속 골목을 열고 있다 하얀 그림자가 담과 모퉁이 사이를 돌.. 2023. 5. 16.
신수옥 시인 / 파동의 날개 외 2편 신수옥 시인 / 파동의 날개 무엇이 이토록 조여올까요 날개가 없어 날지 못해도 괴로워하지 않았어요 허우적대며 온 길 오르막과 내리막이 출렁대는 파동이었어요 마루의 환희가 느닷없이 골에 쏟아져 눈물 헤치느라 아픈 날들 많았어요 살아온 날 어느 부분도 생략할 수 없어요 새로 태어난다면 홀가분히 날 수 있을까요 제 날개에 갇힌 새가 숱한 매듭에 묶인 채 곡선의 언덕에서 없는 날개를 펄럭이는 오늘 골짜기 아래 또 엎어져 울고 있는 내가 보여요 신수옥 시인 / 그날의 빨강 한여름 세찬 소나기 맞은 맨몸 가시광의 빨강을 빨아들인 꽃이 더욱 선명해졌다 9월의 샐비어는 탱고를 추었다 스무 살 처녀들의 재잘거림 반도네온 연주처럼 몰려왔다 사라졌다 빨강은 짙어지고 짙어져서 더욱 외로워지고 젊음을 두고 와서 머리는 늘 그쪽.. 2023. 5. 16.
박은석 시인 / 며칠, 이상한 직업 박은석 시인 / 며칠, 이상한 직업 ​ ​몇 개의 사각을 모아 놓으면 집 한 채가 된다는 사실 넓은 사각의 양쪽을 구부리면 지붕이 된다는 사실 몇 켤레의 신발과 부르는 소리를 모아 놓고 대답하는 사이는 문이 된다는 사실 이 집은 사각 하나가 더 숨어 있죠. 아마도 사각 문을 열고 들어가면 또 다른 미지의 방 하나가 있겠죠. ​ 고래를 숨겨놓거나 아직 얼굴이 없는 아미를 숨겨놓기 좋은 곳이죠. 다정한 이름이 생기죠. 사람들이 찾는 것은 정교한 사각이지만 둥근 관계들로 세 들고 싶다는 것 몇 개의 숫자를 빌려 현관을 갖는다는 것 나선형 햇살이 드는 채광창을 갖고 싶다는 것. 가늘고 부드러운 음식냄새들을 오래 앉혀놓고 싶은 식탁을 갖고 싶다는 것. 세상에는 사각을 중개하는 이상한 며칠의 직업이 있었다. 마음을.. 2023. 5. 16.
임희선 시인 / 옷장 속 남녀 외 1편 임희선 시인 / 옷장 속 남녀 겨자 빛 그믐달에 톡 쏘인 멍게 같은 구름이 두어 개 지나가고 바깥이 궁금할 일 없는 남자는 옷장에 붙여둔 그림과 한나절 이야기 나누다 척추에 좋은 자세를 연구 한다 철제 바구니 안에 등 말고 앉았다가 팔 다리 접고 서랍 속에 개켜져 있더니 세탁소 로고가 박힌 비닐 속에 어깨 늘어뜨리고 옷걸이에 걸려있다 천장을 보고 누워 두 팔은 양쪽 골반 옆에 가지런히 모은 발끝은 품위를 유지하고 어떤 소리가 들려도 눈을 뜨면 안된다 아랫배에서 길어 올린 숨을 세 번 내쉬고 주문을 외운다 낙타머리, 사슴뿔, 토끼눈, 소귀, 뱀목, 조개의 배, 잉어비늘, 매의 발톱, 호랑이발바닥 손바닥을 두 번 마주치며 합체, 합체 ……. 어김없는 용(龍)의 조합이다 초파리도 한숨 돌리는 느긋한 저녁 남자.. 2023. 5. 16.
송승환 시인 / 드라이아이스 외 2편 송승환 시인 / 드라이아이스 다시 내린 눈으로 바퀴 자국이 지워졌다 찌그러진 자동차가 견인되었다 앰뷸런스가 아득히 멀어져갔다 눈물 없이 울던 그녀의 뒷모습 새벽 안개와 함께 지상으로 걷혔다 불을 품은 뜨거운 얼음에 데인 적이 있다 견고한 모든 것은 대기 중에 녹아 사라진다※ 하늘 한가운데 구름이 흘러간다 ※카를 마르크스 송승환 시인 / 지퍼 건너편 사람들 틈에 환영처럼 그녀가 있다 한 번 벌어지면 쉽게 채워지지 않는다 선로 위 끊임없이 지하철이 달려온다 -시집 에서 송승환 시인 / 욕조 1 내가 욕조 속으로 누울 때 욕실 주위로 검은 옷들이 흩어져 끌려나온다 내가 바라보지 않을 때 어머니는 드러나지 않고 나타난다 달 핏물이 번져간다 2 불 위의 눈송이 겨울 달빛이 흘려보내는 흐릿한 숨결의 리듬으로 길고 .. 2023. 5. 16.
이윤설 시인 / 일생 외 1편 이윤설 시인 / 일생 하려던 복수도 떠나버리고 그토록 다르던 너희들과 함께 같은 침대에 누워 기다리던 사람이 오지 않는 것도 상관없는 또 알뜰히 지워지는 하룻잠을 당신에게 청하여본다 심각한 얼굴은 마라 말도 말아라 꿈에서 걸려온 전화를 받는 심야에 돌아가지 않겠다고 말한 사람이 누구였는지 그래놓고도 울리는 벨소리가 핏줄처럼 질긴 건 못할 복수로나마 나를 청하는 걸 안다 나를 기다리다 너희들이 되고 너희들은 있지도 않은 나를 요청하여 누구로서도 풀지 못할 사나운 꿈자리가 되는 걸 안다 그래 알기를 원했던 건 오직 내가 올 것인가 와서 너희들과 더불어 지금 없는 나를 낳아주는 거였다 당신이 나를 놓아주는 거였다 일생이 다 떠나버리고 문설주에 기대 앉은 먼지에게 나를 입혀주는 것이었다 내가 와서, 하지 못한 .. 2023. 5. 16.
김순옥 시인 / 여우창문 외 2편 김순옥 시인 / 여우창문 ​ 얼굴이 하얘, 라고 말하는 소년을 만났다 ​ 도화를 따서 이건 밥이야 찧어서 녹색 물이 흐르는 이건 반찬이야 ​ 너는 해를 가린 손가락의 말간 비밀을 나직이 말했다 맑은 물소리가 포개지고 종소리가 들렸다 노을이 납작한 돌멩이를 들어 꽃밥처럼 물들였다 ​ 엄마와 아빠가 될까 모든 게 사라질지도 몰라 얼굴 절반이 먼지처럼 떠올라 구름으로 지나갔다 ​ 천천히 잊힐 일이 자꾸만 돋는 마당 내려앉은 유월을 갸우뚱거리며 보는 햇빛 한바탕 소란이 뜨거운 여름을 부려 놓던 날들 ​ 지나간 밤이 찾아와 다시 새벽 세 시 ​ 꺼내 놓은 발자국 속으로 빗물이 고인다 마지막이라며 울던 우산이 오늘도 울고 있다 복숭아 꽃잎이 묻어 들었다 ​ 도화는 후르르 피어 사흘, 우르르 날려 또 사흘을 말라 간.. 2023. 5. 16.
황외순 시인 / 소금 외 2편 황외순 시인 / 소금 ​ ​ 시간을 담금질하자 ​ 바람의 각을 얻자 ​ 발바닥을 간질이는 ​ 웃음도 지루해 ​ 새하얀 꽃이 필 때까지 반짝이는 길몽들 ​ ​ 황외순 시인 / 비듬, 일원론적인 ​ ​ 추궁을 하기 전에 변명이 시작된다 ​ 횡설수설 흐린 초점 과녁을 빗나간다 ​ 눈빛들 오가는 길목 개의치 않는다 ​ 맞장구가 없어도 저 혼자 소란스럽다 ​ 속마음 들킬수록 말꼬리 더 치올린다 ​ 단박에 입 다물도록 덜미를 콱 잡고 싶다 -시집 에서 황외순 시인 / 응급실의 사적私的감정 달려오는 구급차 사이렌과 경광등 사이 발을 잘못 디뎠나, 목련이 툭 진다 허공은 영문도 모를 낯빛으로 흔들리고 저젓거리 난봉꾼의 행패 같은 비명을 다독이는 링거주사, 깃을 접는 병상들 졸음도 잠시 그 옆에 쪼그리고 앉는다 생각을 .. 2023. 5. 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