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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연호 시인 / 비단길 1 외 1편 강연호 시인 / 비단길 1 내 밀려서라도 가야 한다면 이름만이로라도 아름다워야지 비단길 허나 지나는 마음 쓸쓸하여 영 자갈밭일 때 저기 길을 끌어가는 덤불숲 사이로 언뜻 몸 감추는 세월의 뒷모습 보인다 저렇게 언제나 몇 걸음 앞서 장난치며 어디 헛디뎌봐 유혹하는 허방이여, 온다던 사람 끝내 오지 않아서 기어이 찾아나선 마음 성급하다 발 거는 걸까 잠시 허리 굽혀 신발끈이나 고쳐 매면 흐린 물둠벙에 고인 행색 더는 고쳐 맬 수 없는 생애가 엎드려 있다 앞서거나 뒤쳐지는 게 운명이라서 대상의 행렬은 뽀얀 먼지 속에서 유유한데 비단길, 미끄러운 아름답게 나를 넘어뜨릴 때 어디 經을 외며 지나는 수도승이라도 있어 저런 조심해야지, 일으켜주며 세상의 흥진 온전히 털어내는 법 가르쳐줄까 물음표처럼 휘어진 등뼈 곧추.. 2023. 5. 18.
이희국 시인 / 작은 위로 외 5편 이희국 시인 / 작은 위로 "밥은 먹었니?" 무심히 던진 한마디가 허기진 나의 의지에 한끼의 정찬이 되어주던 때가 있었다 "안녕!" 미소 지으며 던져 준 가벼운 말이 종일 환한 빛으로 어두운 마음을 위로하던 때가 있었다 누구에게 어떤 파도가 몰아닥칠지 아무도 모르는데, 구걸하는 이들에게 "도우면 버릇만 나빠져" 의미없이 던지는 가시 돋친 말 한마디가 나의 하루를 우울하게 한다 한겨울에도 냉기를 껴안고 사는 노숙인들 따스한 온기를 전해주고 싶다 진심이 담긴 말 한마디라도. 이희국 시인 / 바위 무성한 잡초들이 찬바람에 스러져가는 것을 보고 있었다 ​ 한 아름 푸르게 살다가 구새먹어 텅 비어버린 고목들이 흙으로 돌아간 쓸쓸한 발자취를 보고 있었다 ​ 시든 들판이 새봄의 노래로 뭉클하게 피어나는 것을 보고 있.. 2023. 5. 18.
도종환 시인 / 나리소 외 2편 도종환 시인 / 나리소 가장 높은 곳에 있을 때 가장 고요해지는 사랑이 깊은 사랑이다 나릿재 밑에 나리소 못이 가장 깊고 고요하듯 요란하고 진부한 수식이 많은 사랑은 얕은 여울을 건너고 있는 사랑이다 사랑도 흐르다 깊은 곳을 만나야 한다 여울을 건너올 때 강물을 현란하게 장식하던 햇살도 나리소 앞에서는 그 반짝거림을 거두고 조용해지듯 한 사람을 사랑하는 동안 마음이 가장 깊고 착해지지 않으면 진짜 사랑 아니다 물빛처럼 맑고 투명하고 선해지지 않으면 도종환 시인 / 겨울 나무 잎새 다 떨구고 앙상해진 저 나무를 보고 누가 헛살았다 말 하는가 열매 다 빼앗기고 냉랭한 바람 앞에 서 있는 나무를 보고 누가 잘못 살았다 하는가 저 헐벗은 나무들이 산을 지키고 숲을 이루어내지 않았는가 하찮은 언덕도 산맥의 큰 줄.. 2023. 5. 18.
Daisy Kim 시인 / 룹알할리*​ 외 2편 Daisy Kim 시인 / 룹알할리*​ ​ ​ ​우리가 사막으로 간 이유는 없었다 ​ 파란 하늘을 볼 수 있었던 것은 빛을 다발로 산란하는 모래언덕과 변경주**때문이었다 ​ 몇 켤레의 계절이 서로의 심장으로 느리게 걸어 들어갔다 실핏줄이 우리를 끌어당기며 둥근 보폭으로 돌았다 ​ 모래로 덮인 세계 태양의 얼룩을 봉우리에 숨긴 알몸의 낙타들 ​ 여독에 지친 하루를 사막에 가두면 어제의 앞뒷면이 공백으로 남았다 ​ 구름은 같은 일기예보를 몰고 다니며 모래의 물렁한 척추를 맴돌았다 ​ 지름길이 없는 모래의 물결 ​ 흰 블라우스에 건기의 무늬를 바느질했다 끝없이 부르고 싶은 이름에 단추를 채웠다 ​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는 마음은 낡은 믿음이 되었다 오아시스를 찾고 싶어 발 디디면 깊숙해지는 발자국 속으로 없던.. 2023. 5. 18.
김예강 시인 / 물방울 외 3편 김예강 시인 / 물방울 제단에 오른 사제가 깊숙이 몸을 숙여 제대에 입맞춤을 한다 당신의 종, 낮은 자리의 종이오니 등을 낮게 구부리는 순간 물방울 사제는 동그랗고 작은 물방울 낮은 곳으로 낮은 곳으로 흐르는 물방울 가벼워 두둥실 떠오르는 물방울 날아가는 물방울 물방울에서 물방울이 작은 물방울이 커다란 물방울이 된다 지구처럼 커다란 물방울 태양처럼 커다란 물방울 모든 것에 모든 것이 되는 물방울이 된다 김예강 시인 / 종이처럼 눈앞에서 고양이가 까치 한 마리를 낚아채고 날았다 계단에서 까치를 물고 고양이가 날자 계단이 허물어진다 눈앞에서 계단이 비명을 지른다 종이처럼 찢어지기라도 한 듯, 종이라서 지워지기라도 한 듯 비명을 지른다. 계단 위를 날며 살아남은 까치들이 운다 슬픔이 시작한 눈앞에서 슬픔이 천.. 2023. 5. 18.
전영미 시인 / 내막1 외 2편 전영미 시인 / 내막 ​ 한낮에 불쑥 나타난 유령이 중얼거린다 ​ 사실은 나도 너무 무서워 어제의 어둠과 오늘의 어둠이 다르다는 것이 수만 개의 밤을 건너왔지만 한참 더 남았다는 사실이 ​ 지나온 것들이 쌓이지 않는다 사라지지도 못하면서 ​ 매일 밤 헤매고 다녀도 길이 나지 않아 잘못 든 데를 또 들어가면서도 낯설기만 할 뿐이지 ​ 발이 필요해 뭔가를 딛고 서는 기분을 느끼고 싶어 ​ 죽은 자도 소망이 있다 ​ 매일 기대해 오늘 밤을 맞지 않기를 나를 떠나기를 ​ ​ 전영미 시인 / 내막 ​ 너무 우거지면 무서워 그게 빛이라도 ​ 땡볕에 쭈그리고 앉아 땅을 판다 여러 개의 구덩이에 빛을 나눠 묻고 잘 덮는다 그 앞에 공들여 가꾼 어둠 한 다발을 올려 둔다 천천히 시들어 가는 한낮 ​ 햇볕에 화상 입은 장.. 2023. 5. 17.
장수철 시인 / 적설 외 2편 장수철 시인 / 적설 죽은 사람의 얼굴 위로 흰 천을 덮는 것은 죽음을 가리려는 것이 아니라 죽음에게 삶의 누추를 들키지 않으려는 것이다 사랑이 끝난 지표 위에 눈이 쌓여 덮인다 사랑 이후의 남루를 들키지 않으려는 듯 누군가의 이름을 한사코 지우려는 결기 같은 것들 끝내 지워지지 않는 기억을 차라리 묻어버리려는 마음 같은 것들이 무수한 점묘의 붓끝이 되어 지상을 덮는다 방치된 차들의 검은 지붕과 지붕이 내려앉은 슬픔의 가옥들 도시의 흉곽을 길게 찢어놓은 검은 도로 위로 거대한 데드마스크가 떠오른다. -시집 『낭만적 루프탑과 고딕의 밤』 중에서 장수철 시인 / 다음이 없는 경우 편의점 컵라면에 뜨거운 물을 채우면서 다음의 경우를 생각하다가 표시 선을 넘어버린다 다음의 경우라면 한계 수위를 넘었더라도 일정 .. 2023. 5. 17.
김정경 시인 / 한 토막의 저녁 외 1편 김정경 시인 / 한 토막의 저녁 ​ 백 년 만의 가뭄이라고 떠들썩할 때 빗방울 뛰어내렸다 지붕 위 고양이들 물방울 털어내며 담장을 넘어갔다 쌀 씻는 소리에 담 밑 어슬렁거리는 저물녘 공기 저녁은 돌아오는 길 잃지 않고 허기를 데려왔다 고양이 털에 붙은 빗방울, 다시 담을 넘어왔고 ​ 도마 위에는 고등어 한 마리 마지막 물살 떼어낸 자세로 얼어있다 몸통과 지느러미 사이에 남은 파도의 실뿌리들, 한 손에 다 잡히지 않는 바다를 뱉어낸다 돌아갈 수 없으므로 돌아보지 않는 눈, 물끄러미 나를 본다 ​ 양파 썰고 육수를 내는 동안 백 년을 기다려 당도한 가뭄, 장맛비에 풀어지고 내 것이지만 한 사람의 것 같지 않은 궁기 한 냄비 안에서 끓는다 ​ 냄새를 맡은 저녁 한 마리, 고등어 토막을 물고 골목으로 사라진 뒤.. 2023. 5. 17.
서승현 시인 / 톡톡톡 외 1편 서승현 시인 / 톡톡톡 감나무 집102세 시어머니가 안방 문 앞 맨땅에 앉아서 톡톡톡 콩을 터신다 딱딱 벌어지는 콩꼬투리 잘 익은 노란 콩알들 황금빛 햇살 속 천지사방으로 튀어 오른다 남편 잃고 올망졸망 남겨진 자식 여섯 시집장가 보내고 증손자까지 마흔 여섯 명 102세 이력서인 백수 기념 가족사진 걸린 안방 문 앞 맨땅에 쪼그리고 앉아서 톡톡톡 콩타작 하신다 마당을 소리없이 가로질러 여윈 문살 두드리던 소리에 수줍게 가슴 열고 족두리 쓰던 날처럼 민들레 꽃씨같은 흰 머리 수그리신 채 작달막한 작대기로 톡톡톡 콩들의 방문을 열어 주고 계신다 일찌감치 방문 걸어 잠그고 하늘 문 열어버린 눈치 없던 영감은 여태 방문 안 열어주고 뭘 하고 계시나 당신 곁에 갈 준비 끝낸 지 오래 오늘이라도 날 데려가라며 구시.. 2023. 5. 17.
심지아 시인 / 곁에 외 3편 심지아 시인 / 곁에 ​ 머리카락은 잠들어 있다 공기 중에서 산호처럼 흔들렸다 손가락이 머리카락을 쓸어내렸다 쪼개진 석류의 아름다움처럼 꿈의 틈새가 벌어진다 손가락은 꿈에 잠긴다 암실에는 물이 흐른다 네 혈관 속 물고기가 피워 올린 노래들 돌멩이의 형상으로 물속 깊이 가라앉는다 우주의 하얀 잠속에서 부푸는 이야기처럼 돌멩이가 자란다 물결은 돌의 꿈을 방문한다 꿈이 느리게 용해된다 손가락은 물의 뿌리처럼 돌멩이를 감싸 쥔다 네 몸속 심장처럼 내 귓속 초록 밀밭을 불태우며 가꾸는 것들 네 심장 소리는 모스부호처럼 외롭고 단단한 문장으로 도착한다 너는 물기 많은 계절을 부른다 나는 장님처럼 또렷하고 모호한 너의 살갗을 쓰다듬는다 -시집 『로라와 로라』에서 심지아 시인 / 오전의 스트레칭0 책상과 팔이 닿는다... 2023. 5. 17.
배홍배 시인 / 불면 외 1편 배홍배 시인 / 불면 ​ 오늘을 후회하듯 눈은 펑펑 내렸다 하루의 밖으로 벗어나려는 몸부림이 리드미컬하게 긋는 아픔, 그 아픔으로 적설량이 표기되는 꿈이 버린 수면지대, 눈으로 수몰되는 몸뚱이 안으로 심장은 쿵 가라앉고 외톨이가 된 맥박 하나가 히죽 히죽 떠올랐다 어디로 뛸지 모르는 시간에 밑줄을 긋고 자정을 가리키는 손가락, 손가락 끝에서 진화한 검은 한나절은 손바닥이 숨을 쉬었을까 숨 한 번 참으면 한 쪽 다리가 자라 머리가 되고 되돌려지는 만큼 메아리를 잃어버린 교회의 종소리가 음악의 기하학적인 문간에서 상냥하게 좌절할 때 바람은 여인숙의 차가운 숙박부 안에서 안녕했다 금욕하는 바람과 바람 사이에서 눈은 더 내려 발정인 듯 벽에 걸린 여우 가죽이 윙윙 울었다 울음끼리 하나로 모이는 사람의 꼴, 모양.. 2023. 5. 17.
황명자 시인 / 석양증후군 외 2편 황명자 시인 / 석양증후군 저물녁이면 불안보다 더 떨림이 깊은, 초긴장 상태의 두려움이 몰려오곤 하지 발걸음 소리만 들려도 앙가슴이 벌렁대는 느낌이랄까 당신은 날 두려움에 떨게 해요 호소해 보지만 이미 엄마 배 속에서부터 생겨난 감정을 어쩔 수 없지 엄마가 너무 힘들어하네? 그래도 엄만 날 버리지 않을 거야 생사의 기로에서 태어나기 전까지 불안에 떨었을 감정, 아픔과 슬픔이 합쳐진 감정, 어쩌면 생명체로서 가장 먼저 느낀 감정이자 죽음 앞에서 가장 많이 느끼는 감정, 바로 두려움이 석양과 함께 온다네 -「당분간」(2022, 詩와에세이) 황명자 시인 / 불행의 씨앗 도시를 가로지른 강변을 걷는다 어디서부터 합류했는지 모를 사람들로 갑자기 강변이 복잡하다 정체된 출근길 같기도 하고 패잔병들의 행군 같기도 한.. 2023. 5. 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