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49215 이어진 시인 / 거울 외 5편 이어진 시인 / 거울 요즘 거울을 보는 것이 힘들어요 내 얼굴을 볼 때면 언제나 세상에서 제일 예쁜 얼굴이라고 말해주었던 당신이 생각나 미칠 거 같아요 내가 가지고 있던 것들은 다 당신으로 범벅이에요 그 중에서도 당신이 준 거울은 너무나도 많은 추억을 남겨 가장 소중한 것이 되어버렸어요 당신은 거기서 편안해졌나요? 날 두고 먼저 떠난 당신이 너무 안쓰럽고 슬프지만 나도 이제 당신이 준 거울로 얼굴을 바라보는 것으로 슬픔에서 한발짝 뗄까 해요. 당신 몫까지 발버둥치며 살 테니 다시 만날 땐 거울을 들고 칭찬해줬으면 해요 이어진 시인 / 식탁 위의 풀밭 오후엔 풀밭 위에 앉아 식사를 한다 이것 좀 더 먹어 너는 접시 위에 꽃잎을 올려놓는다 아카시아 무성한 숲에서 비릿한 입 냄새가 몰려온다 이런 냄새는 아무리.. 2023. 5. 14. 서안나 시인 / 파란만장 외 2편 서안나 시인 / 파란만장 - 밀서(密書) 바다를 오래 쳐다보면 내가 무섭다 나를 이해한다는 당신이 무섭다 애월에서 나는 파란만장이란 말을 생각했다 반백 년 동안 물결로 설레었으니 봄밤은 상심으로 가득 하고 당신과 나는 목 없는 부처처럼 이미 파탄이니 해변은 누가 묶어둔 코뿔소입니까 매화는 왜 찹쌀 씹는 소리로 핍니까 질문은 왜 배신입니까 꽃을 기록하면 봄은 베어지고 얼굴을 멈추면 표정은 무성합니다 나는 매화 아래서 칼빵처럼 가로로 감정이 됩니다 계간 『서정시학』 2023년 봄호 발표 서안나 시인 / 춘첩(春帖) 2 매화 가지에 꽃을 불러 아홉 가지 산나물에 찬술을 마신다 늙은 개는 하루를 굶기고 집안에서 칼질을 삼간다 붉은팥을 뒤로 던지면 매운 수선화가 피고 저수지는 뿌리가 깊어진다 편지를 쓰면 수심이 .. 2023. 5. 14. 심강우 시인 / 염치없는 사랑 외 2편 심강우 시인 / 염치없는 사랑 수용을 요구하면서 요구를 수용하지 않는 사랑이 있어요 온당한 마음의 단백질을 부당한 마음을 살찌우는 데 쓰는 신종 물질대사의 사랑이 있어요 발열하는 시간의 뼈마디 따끔거리는 내구성의 인후통 기침으로 자폭하는 사랑이 있어요 사랑이 튀네요 당신, 당신이 잠들어 있을 때보다 더 자주 당신을 합치려면 기침을 자주 해야 할까요 수다스런 사랑을 위해 마스크를 준비했어요 당신은 죄가 없어요 당신은 당신에게 성실했어요 오래도록 당신은 당신에게 고백했어요 수많은 귀가 필요했을 뿐이죠 그런데 귀라는 거, 남의 코에 들어가 귀가 되기를 요구하면서 죄가 되었을 거예요 염치없는 사랑 마스크는 죄명을 나타내는 은어가 되었죠 심강우 시인 / 말뚝코로나 뚝, 부러지는 소리로 박힌 말뚝은 된소리 별이다 .. 2023. 5. 14. 이주희 시인 / 소만(小滿)즈음 외 1편 이주희 시인 / 소만(小滿)즈음 이팜나무는 파란 대접에 쌀국수 사리사리 담고 함박꽃은 수제비로 구색을 맞춘다 조팝나무는 한소끔 끓여 몽글몽글한 순두부 찌개를 올리고 산딸나무는 가래떡을 엽전처럼 납작납작 썰어 떡국을 내놓는다 아가위나무는 보풀보풀 버무려 백설기를 쪄내고 돌배나무는 화전 지지느라 땀 닦을 겨를이 없다 때죽나무는 이가 부실한 어르신들 끼니로 흰죽을 쑤고 백당나무는 손맛 자랑하느라 조무조물 나물을 무친다 토끼풀은 부지런히 아기 주먹밥을 만들고 아까시나무는 운조루 뒤주처럼 튀밥자루 끈을 풀어 놓는다 하얀민들레는 냉이꽃 남산제비꽃 산딸기꽃과 어우렁더우렁 꽃비빔밥을 만든다 마가목은 송이송이 뭉쳐 밑반찬거리 부각을 튀기고 층층나무는 산길 오르느라 헛헛해진 이들에게 주먹밥 한 덩이씩 인심을 쓴다 -시집 .. 2023. 5. 14. 김경민 시인 / 붉은 십자가의 묘지 김경민 시인 / 붉은 십자가의 묘지 어두운 경인 고속도로 달려가면 먼 데 벌판 가득히 빛나는 교회 첨탑 위의 붉은 십자가 차 안의 사람들 반은 졸고 반쯤 죽은 사람들 얼굴 위에 무덤처럼 즐비하게 떠오르는 붉은 십자가의 교회 어딘가 제 정처를 향해 달려가는 버스 양편 어둠에서 일정하게 다가와 이내 스쳐가는 저 빈혈의 가등 사이로 쇠사슬과도 같이 버스와 나를 끌고 세상이란 거대한 묘지를 향해 달려가는 붉은 십자가의 무덤 김경민 시인 1954년 서울 출생. 부산대학교 국문학과 졸업. 1990년 에 '어둠의 집' '회전' '계단위의 폐허' 등을 발표하며 문단에 등단. 시집 1998년. 한국시문화회관 대표 2023. 5. 14. 하린 시인 / 눈사람의 기분 하린 시인 / 눈사람의 기분 어떻든 사람입니다 천사가 아닙니다 마당이거나 골목이거나 언덕이거나 지분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랫목은 어디입니까 고드름은 왜 생깁니까 그것이 궁금하다면 당신은 백색에 대한 오해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하늘로부터 주관성을 부여받았습니다 눈 속의 눈이 생길 수 있고 깊어질 수도 있습니다 저에게 많은 감정이 없습니다만 특별한 비밀이 있습니다 적막과 대면할 수 있습니다 이야기 밖으로 빠져나갈 수 있습니다 뼈와 살과 피와 심장과 마음이 하나라는 착각을 무너뜨릴 수 있습니다 아이가 잠든 사이에 길고양이를 찾아 나설 참입니다 나를 보고 놀라지 않은 이유에 대해 물어볼 것입니다 벌벌 떨고 있는 배고픈 새끼 고양이를 만난다면 처음으로 울 것입니다 그만 녹아 흐를 것입니다 머리가 재빨리 심장.. 2023. 5. 14. 신영애 시인 / 화병 외 2편 신영애 시인 / 화병 국화꽃 한 묶음 화병에 꽂아 가을을 들여놓았다 열흘의 개화 열흘의 우울 만개한 꽃송이 밑에 문드러진 꽃 대궁이 속앓이를 하고 있다 작은 충격에도 가슴이 쿵쾅거린다 심장 박동기 달고 스물네 시간 감시했지만 찾아내지 못한 두근거림 하나 ㅡ화병(火病)입니다 마음에 담아두지 마세요, 라는 의사의 말을 나는 참지 마세요, 라고 읽는다 해를 보내기엔 날이 많은데 짧은 계절을 안고 떠나버린 너 추스르지 못한 속내가 긴 밤 문드러진다 두멍에 낀 이끼처럼 더께가 지고 심통을 부리는 몸부림이었다 꽃잎 파르르 떠는 이 가을에 후드득 나는 나를 꺾고 있다 신영애 시인 / 칠월 나는 채 젖어보지도 못하고 조문을 마친 한 송이 국화였다 신영애 시인 / 헛꽃 참꽃을 피울 수 있다고 했다 희미한 향을 찾아 오른.. 2023. 5. 14. 박윤우 시인 / 두물머리 외 1편 박윤우 시인 / 두물머리 서울을 다녀온 가을과 오리의 뭉툭한 부리 물기슭이 된 오후 네 시 가을은 제법 구체적인데 물이 물로 빼곡하다 물길이 물을 닦는다 광발 나는 저 물 곁에서 누구는 언약을 하고, 누구는 한 눈을 팔고, 누구는 담배를 문 채 내렸던 바지를 올리고 또 누군가는 물을 퍼 담아 물침대 매트를 채우겠다 오리가 물의 부리 모양의 구멍을 낸다 구멍 속으로 낙하한다 오리가 오리를 부려 넣고, 부려 넣은 오리를 오리가 들어낸다 부리를 앞세우는 새, 물갈퀴를 벗어두고 떠난 새 한 마리 바바리코트의 깃을 세운 중년 여인이 반백 신사의 겨드랑이에 날개처럼 돋았다 모텔 현관문을 밀고 들어선다 나오려고 들어가고 들어가려고 나오는 사람, 그리고 오리백숙 분질러진 이쑤시개 같은 오후 네 시, 늘 네 시 5분 전.. 2023. 5. 14. 이종성 시인 / 금강송 외 2건 이종성 시인 / 금강송 쭈뼛거리지 않는다 초지일관 반듯하게 간다 삐뚤빼뚤, 갈팡질팡 그것은 내가 아니다 벼락이 치더라도 하늘을 향하여 곧장 간다 눈비가 쏟아져도 무게를 버리는 일 없다 이종성 시인 / 운리마을 얇은 미농지를 벗겨내듯 아침은 희부연 안개를 한 겹 한 겹 걷어내고 있다. 안개 물러간 자리마다 햇살은 부챗살처럼 퍼지고 새벽같이 보리를 뜯어먹으러 왔던 금슬 좋은 노루가 발소리에 화들짝 놀라 산으로 뿔뿔이 헤어져 달아난다. 이웃마을로 이른 마실을 가시던 할머니가 벌렁거리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한 바가지 욕을 해대는 바람에 겁 많은 노루는 내려오지도 못하고 제 작을 애타게 부르는 귀청 찢는 소리만 앞산에 부딪쳐 메아리친다. 그 소리에 산꿩이 울고 푸른 이불을 덮어쓴 채 잠들었던 들판이 기지개를 켜며 .. 2023. 5. 13. 이양희 시인 / 가난한 시인의 노래 외 1건 이양희 시인 / 가난한 시인의 노래 늙은 어부처럼 지혜로운 시인은 오래 깁고 기운 언어의 그물을 던져 새벽 바다에 펄떡이는 시어詩語를 풍성하게 거두어들인다 나는 변변한 그물도 마련하지 못한 채 해 돋는 바다에 반짝이는 언어言語떼를 욕심낸 적 있으나 솟구쳐 오르는 한 마리 금어金語를 꿈꾸기도 했으나 저녁 바다에 눈시울 붉어지는 노을이 흐르니 내 서툰 욕망으로 엮은 그물을 걷고 가난한 빈 배를 위해 바다가 펼치는 무욕의 그 노래를 따라 부르리라 ―시집『비스듬히 서 있는 당신』(효림, 2013) 이양희 시인 / 끝을 붙들다 끝에 서 있다 배롱나무 가지 끝에 참나리 줄기 끝에 채송화 줄기 끝에 수국 줄기 끝에 이름 모르는 분홍꽃 줄기 끝에 인동초 가지 끝에 백합 줄기 끝에 저마다의 빛깔과 모양으로 도착한 꽃들 .. 2023. 5. 13. 신혜진 시인 / 작살나무 외 2건 신혜진 시인 / 작살나무 그해 봄 기다리던 꽃은 오지 않았다 너를 찾아 떠난 선운사엔 동백마저 지고 없어 동백숲 시퍼런 그늘 돌아 도솔산 오른다 상수리 떡갈 신갈 졸참 굴참······. 무슨 참한 궁리라도 하시는지 온 동네 참나무들이 다 여기 모여계시고 기도하는 적송은 벌겋게 키가 크다 나는 가만가만 물가로 내려가 도솔천 뿌연 물에 손이나 닦는데 쌀뜨물 같은 물이 출렁이고 맞은편 빽빽한 참나무 숲을 헤치며 작살나무 한 그루 바쁘게 건너오시는 것 보인다 어제는 내소사 안뜰 팔뚝으로 어린 단풍나무를 낳은 느티나무가 쨍한 초봄의 햇살을 작살내시더니 오늘은 또 무엇을 작살내시려는지 막 돋은 보랏빛 꽃대가 맵다 ─《애지》2022년 가을호. 신혜진 시인 / 너는 자꾸 나를 송내역 남광장 인도에 비둘기 하나 퍼덕.. 2023. 5. 13. 윤진화 시인 / 안부 외 2건 윤진화 시인 / 안부 잘 지냈나요? 나는 아직도 봄이면서 무럭무럭 늙고 있습니다. 그래요, 근래 ‘잘 늙는다’는 것에 대해 고민합니다. 달이 ‘지는’ 것, 꽃이 ‘지는’ 것에 대해서도 생각합니다. 왜 아름다운 것들은 이기는 편이 아니라 지는 편일까요. 잘 늙는다는 것은 잘 지는 것이겠지요. … 부끄럽지 않게 봄을 보낼 겁니다. 그리고 행복하게 다음 계절을 기다리겠습니다. 윤진화 시인 / 초야(初夜) ㅡ전갈 나는 굴곡진 갈고리를 달고, 활처럼 휘어진 낚시 바늘을 달고. 바람을 낚는 조사(釣師)의 손끝에서 깊은 땅에 던져진 -거칠 것 없는 성격, 활동적이고 야생적인 아시안 자이언트 블루 전갈이다. 당신이 한가로이 숨을 쉬거나 벤치에 앉아 담배연기를 내뱉을 때 내가 아무렇지도 않게 조용히 낚시줄 드리우듯 꼬리.. 2023. 5. 13. 이전 1 ··· 14 15 16 17 18 19 20 ··· 410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