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49215 김영찬 시인 / 모과의 진실 외 2건 김영찬 시인 / 모과의 진실 모과아—, 하고 오므렸던 입술을 좍 풀면서 모~오~과~아, 한 번 더 목청 높이면 모예요, 누굴 놀리려고요 내가 아는 한 시인은 모과의 진실, 모과로 익어서 꼭지 똑 떨어진다 아직 덜 익었다 싶으면 천천히 게으르게 후숙後熟, 가을볕 알뜰히 거둬 한겨울의 고독과 강추위를 견디는 모과 모과로서 그가 엮어낸 시집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맨손에 덥석 모과향이 잡힌다 이쪽저쪽 못생긴 모과의 외양이 구석구석 거칠게 뵈는 것은 우락부락 아르 브뤼Art brut 미학의 진면목을 똑바로 설명하기 아주 좋은 기회 꼭 그런 건 아니라고, 누구보다 잘 알지 않느냐고 미소 짓는 뒷모습 쓸쓸해 뵈는 모과 모예요, 정마알~, 남의 얘길 자세히 안 들으시나 봐요 왈칵왈칵 무표정한 비대칭 노란빛 단단히 감싸.. 2023. 5. 11. 이정현 시인 / 하마터면 외 1편 이정현 시인 / 하마터면 개망초가 풀인 줄 알고 하마터면 뽑을 뻔 했어요 어디서라도 몸을 세워 겁이 났어요 잎들이 입처럼 많아 하마터면 긴 목을 꺾을 뻔 했어요 개․망․초 하얀 꽃 피우는 들꽃인 줄 몰랐다니까요 문드러지게 밟힌 시간일랑 몽땅 잊어버리고 하늘하늘 웃고 있는 저 들꽃 하마터면 나인 줄 모르고 뽑을 뻔 했어요 이정현 시인 / 비의 음계를 그려 넣다 오선 위에 비의 음계를 그려 넣는다 팔분음표 바람비와 온음표 소낙비를 라와 파에 걸쳐놓고 비처럼 서서 술을 마신다 조르드 샹드로 향했던 쇼팽의 사랑을 불러와 술잔에 따른다 넘치는 술이 바닥에서 빗소리와 뒹군다 술 속에 빗방울이 추적추적 쏟아지고 음표들도 비에 젖는다 88개 피아노 건반 위로 미끄러지는 음계 쇼팽의 빗방울전주곡이 연주된다. 문밖의 빗소.. 2023. 5. 11. 박현수 시인 / 영혼의 요실금 외 2편 박현수 시인 / 영혼의 요실금 나이가 든다는 것은 내 안의 가짜 사내를 흘려버리는 일 남자 화장실 소변기 위 남자가 흘리지 말아야 할 것은 눈물만이 아니다 같은 잠언이 만들어낸 가짜 괄약근을 풀어버리는 일 트럭에서 쏟아진 물건들을 묵묵히 치워주고 사라지는 사람들을 뉴스에서 보다가 비로소 남자가 아닌, 사람이 되어 감정을 내려버리는 일 드라마의 별것도 아닌 장면에 문득, 금메달 시상식 휘날리는 국기에도 눈물을 훔치는 일 같이 보던 아내가 못 본 척 웃는 것도 조금 덜 부끄러워하는 일 이제야 저 먼 빙하기 저 깊은 곳에서 꽁꽁 언 사내가 풀려 스치는 햇살에도 사소한 인정에도 찔끔찔끔 새어 나오는 영혼의 요실금 -〈웹진 시산맥〉 박현수 시인 / 주전자 교실 한가운데서 톱밥난로 위에서 뚜껑을 들썩이며 뛰쳐나가고.. 2023. 5. 10. 김은호 시인 / 입동, 흐리고 비 외 1편 김은호 시인 / 입동, 흐리고 비 싸늘하게 식는다는 것에 대해 생각한다 사랑의 일관성과 이중성 사이를 헤매던 길이 젖는다 너는 비를 타고 온다 안개와 미세먼지의 침침한 눈, 잿빛 코트를 걸치고 낙엽송 단풍이 계절의 마지막 장을 넘기고 있다 가랑잎 뒹구는 사연이 젖는다, 텅 빈 정거장 메마른 입술에 입 맞추는 빗줄기 제 몸에 켜켜이 쌓인 우수를 기울여 입동을 크로키하고 있다 꺼트릴 수 없는 불씨 하나 품은 내 가슴이 젖는다 겨울이 온몸으로 번져온다 김은호 시인 / 제라늄 꽃이 피었습니다 어머니는 꽃밭이었습니다 온몸의 뼈가 흔들렸어도 꽃에 기대어 낡고 좁은 서울을 견디셨습니다 이 빠진 보도블록과 백화점 화장실 바닥이, 버스 운전기사의 난폭운전이 어머니를 넘어뜨렸지만 제라늄 꽃은 친절하고 상냥했습니다 .. 2023. 5. 10. 송준영 시인 / 고향 외 4편 송준영 시인 / 고향 강원도 오대산 월정사 본당 위쪽, 오대산에 머물던 중들의 부도가 밭을 이룹니다 부도는 종 모양입니다 아마 바위같이 앉아 고요에 들거나, 종이나 목탁을 많이 때린 스님들이 사후에 돌종이 될 겁니다 천년 돌 종소리를 내며 지나가는 눈 푸른 나그네의 귀를 때릴 겁니다 아무리 보아도 크고 웅장한 돌종은 생전 많은 욕심을 먹고 산 것 같습니다 그래도 이 부도 밭은 시립합창단이 한 300일쯤 고르고 고른 하모니 같아 귀속엔 향불 냄새로 이 오대 골짝을 지핍니다 골짝 전나무 오갈피나무 참나무 자작나무 모두모두 다소곳합니다 심지어는 청설모 다람쥐, 발끝을 간질이는 물소리까지도 그렇지요, 아아 고향입니다 "이 몇 해 만이냐?" "한 40년 만이군" "그래 스님들 법체 강녕들 하십니까? 강녕들" 조그.. 2023. 5. 10. 이선이 시인 / 네일 아트 외 3편 이선이 시인 / 네일 아트 아름다움은 멈출 줄 모르고 돋아나는 살의를 감추는 일이라고 죽을 때까지 자라는 줄 알았는데 죽어서도 자란다고 칼집에 새긴 연꽃처럼 도마에 심은 나비처럼 불멸은 주검에도 화장을 얹는 슬픔이라고 이선이 시인 / 순간들 번호표를 뽑아들고 세상의 호명을 기다려 본 자는 알리라 낯선 운명의 틈바구니에 끼여 울적스런 얼굴로 서면 문득 전신마취에서 깨어나는 얼얼함이 있어 창밖에는 봄바람 가을비 몰아치고, 거기 누군가를 애타게 부르는 물컹한 비린내 번져난다는 것을 언제나 나만 비껴가는 단 한 번의 낮고 단호한 호명을 기다리는 동안 내 손에 잡힌 무엇보다 확실한 기다림을 잊기도 한다는 것을 세월은 망각의 텃밭을 일구며 아이의 엉덩이에 살을 올리고 물오른 젖가슴을 말린 건포도처럼 쪼그라들게 하지.. 2023. 5. 10. 이승리 시인 / 유품 편지 외 1편 이승리 시인 / 유품 편지 효자손의 엄지와 검지가 부러져 있다 잘못 내린 버스 정류장처럼 장의사 간판만 빼곡한 길 건너편 골목 신비주의 요양원 잠금장치 문 앞에 서서 전화 호출 버튼을 누른다 ㅡ누구세요? ㅡ알선자입니다 할머니가 남겨놓고 간 효자손을 벗긴다 갈퀴에 돋보기안경 닦는 천을 씌워 휜 곳과 아래를 고무줄로 꽉 묶은 채 대패삼겹살 같은 등을 살살 문질러 온 나무 빗발이 내리칠 적마다 힘줄 움켜쥔 지팡이의 말엽 부러진 엄지 밑에 내 이름이 적혀 있고 부러진 검지 밑에는 장손이라 적힌. 이승리 시인 / 패 노름 속에 싸여 쟁여둔 돈이 흩날릴 즈음 21인치 티브이가 뇌졸중으로 쓰러졌다 급한 대로 라디오를 가져온 아버지는 머리맡에 에프엠을 켜둔 채 잠들었다 나는 맥 빠진 테이프 덮개를 꽉 눌러보고 쭉 당겨.. 2023. 5. 10. 김진규 시인 / 폭설 외 2편 김진규 시인 / 폭설 눈을 가린 너의 팔이 젖어든다 다문 입술 속엔 처음 듣는 이름 들썩이는 창문과 흘러내리는 머리카락 우리는 평생 창밖을 알 수가 없는데 너는 왜인지 너를 탓한다 어떤 마음은 아무리 안아도 녹아내리지 않아 눈물은 휴지로 닦는 것이 아니라며, 눈물은 휴지로 닦는 것이 아닌데 나는 자꾸 휴지만 뽑는다 김진규 시인 / 천장이 높은 방 천장이 높은 집에 살아본 적이 없지만 천장이 높은 방을 짓겠다 방을 밝히는 마지막 불이 꺼져갈 때에도 식어버린 마음으로는 다시 갈아 끼울 수 없도록 사람이 드나들어 하늘을 쳐다볼 때에는 새하얀 천장이 저 멀리 아득해지면 좋겠다 환생을 믿던 시절에는 믿음의 크기만큼 무덤이 커졌다지 내 무덤은 아마 더 커질 수 있을 거야 위로, 그리고 위로 실수로.. 2023. 5. 10. 박봉희 시인 / 사이에는 테이블이 외 2편 박봉희 시인 / 사이에는 테이블이 그랬던 것처럼 너는 말하고 나는 망설인다 말없음은 위아래가 없어 위에서 내려다보는 너의 위치를 마주 보는 위치로 바꾼다 분리된 의자가 있고 연결하는 테이블이 있고 계속해봐 갈 데까지 가면 너의 변명이 이해된다 연민이 관계 회복을 주선한다 한때 속삭임은 구설수가 되고 친구, 연인, 부부 그렇다고 남도 아닌 진부해, 그것이 사귀어야 할 운명이고 각자의 위치에서 첫선 보듯 반듯한 자세로 계속할까, 애프터 신청하는 끈질긴 사이에는 나를 의심하는 내가 조성되고 무슨 일이 있어도 무슨 일이 없는 그 덕에 오늘도 나는 나와 이별하는 중이다 박봉희 시인 / 망향휴게소 그때 그곳에 무슨 바람이 불었던가 카세트테이프 가게는 태엽 감은 강아지의 입력된 동작을 풀었고 트로트 모창 가수의 .. 2023. 5. 10. 김생수 시인 / 돌 외 2편 김생수 시인 / 돌 그것은 준엄한 침묵 웅장한 우주의 고요 말없음으로 오히려 많은 것 일깨우는 갈매기도 잠든 밤바다의 등대 불빛 고무줄 새총에서 떠난 나의 작고 고운 유년의 돌은 우주로 날아가 별이 되었다 나는 듣는다 말없는 세계의 별빛 이야기를 등대 불빛 이야기를 김생수 시인 / 봄, 시정 봄이 오면 누구나 설레이는 기대 하나쯤 가져도 좋으리라 기금은 색깔조차 누렇게 바랜 그 봄에 서성이던 그리움들을 켜들고 아지랑이 감실거리는 들판이나 봄볕의 애무에 황홀히 취한 강변에 나가 저물도록 누군가를 기다려도 좋으리라 회한이 더께로 앉은 옛 서랍을 두근거리며 열면 기다렸다는 듯 안겨 오는 초록빛 이야기들 촉촉이 젖은 얼굴 한 장 한 장 꽃바람에 널며 세상에 있는 사람 세상에 없는 사람 하염없이 불러봐도 좋으리라.. 2023. 5. 10. 이종만 시인 / 양봉 일지 1 외 2편 이종만 시인 / 양봉 일지 1 - 꿀벌치기 나는 꿀벌치기이다 꽃 따라 전국을 떠도는 양봉옹(養蜂翁) 4월엔 유채꽃 노랗게 물든 제주 바닷가로 5월엔 아까시 꽃 흐드러진 담양 병풍산에서 6월엔 때죽나무 꽃 알알이 핀 통영 사랑도 비닐 천막에서 밤하늘의 별을 보며 산새들과 잠이 들어도 세상 어느 것 하나 부러울 게 없는 나는 꿀벌치기이다 7월엔 밤꽃으로 수놓은 단양 흰봉산으로 8월엔 싸리꽃 낭창거리는 고성 건봉산 기슭에서 9월엔 들국화 향기 그윽한 여주 남한강 변(邊) 사십 평생 전국 산야를 떠돌아다니며 지도 같은 주름을 얼굴에 새기고 꽃 따라 웃는 나는 꿀벌치기이다 이종만 시인 / 양봉 일지 3 -푸른 도심 나는 산속 도심에 살고 있다 산골짜기 물소리 요란하고 벌들은 바쁘다 꽃산으로 날아가 꿀을 따오는 벌.. 2023. 5. 10. 이잠 시인 / 초록 대문 점집 외 1편 이잠 시인 / 초록 대문 점집 卍 자 깃발이 꽂힌 초록 대문 집 할머니는 붉은 대추 켜켜이 쌓인 제단 앞에 한쪽 무릎을 세우고 앉아 있었다 계속 이러고 살겠습니까 팔자를 고치겠습니까 다짜고짜로 묻는 손님 얼굴 찬찬 뜯어본 뒤 엄지로 네 손가락을 맞춰 가며 생년월일난시를 적었다 잔나비 띠에 섣달 초나흘 술시라 그림인지 글씨인지 숙명인지 눈보라인지 모를 기운을 휘몰아 써 내려가다가 할머니는 문득 손을 멈추었다 이럴 수도 없고 저럴 수도 없고 참 답답해 순간, 몸의 후미진 귀퉁이가 허물어지며 뜨끈한 것이 왈칵 쏟아졌다 생판 모르는 사람 앞에서 난처하게, 난처하게 다 내려놔, 가벼워져야 살아 석양의 보랏빛 구름 한 세트를 떠올리며 내려놓는다는 말은 구름에 추를 매달지 않는 거.. 2023. 5. 10. 이전 1 ··· 17 18 19 20 21 22 23 ··· 410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