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49215 김기형 시인 / 자두 f 외 1건 김기형 시인 / 자두 f 두려움일 수 있고 봉지일 수 있고 아스팔트일 수 있다 이것이 자두의 힘이다 자두의 힘이 가능하다면 가능한 만큼 출렁대고 있다 멀리서부터 자두가 느껴진다 폭발된 맛이 느껴진다 저녁의 모양으로 바로 선다 피시방으로 가는 자두 자두의 보폭은 다정해 자두의 어둠은 자두의 죽음보다 강하고 비로소 자두의 어깨를 만져본다 자두여 자두를 버린다면? 자두의 탄생을 잃는다면? 벌벌 떠는 나에게서 자두가 열린다면? 자두 두 개가 꼭 붙어서는 무한대로 번식한다 ‘자두 에프’ 당돌한 명명 자기복제의 자두와 자두들 왜 자두냐고 물으면 그것은 자두가 보았으므로 삼천원어치의 자두가 나뒹굴었으므로 계단을 타고 다 터지면서 나타났으므로 울지 다리 없는 것이 몸 전체로 힘을 주니 안으로 근육을 일으키니 그것이야말.. 2023. 5. 8. 이정훈 시인 / 잊거나 잊히거나 외 1건 이정훈 시인 / 잊거나 잊히거나 코요테 한마리 독약 먹고 죽은 쥐를 삼켰죠 숨 끊어지기 전에 도끼로 꼬리를 내려치세요 뼈와 살이 잘리는 것 내장이 타들어가는 것 더 견디기 힘든 건 무엇입니까? 제게도 꼬리의 흔적이 있어요 피거품이 입을 막아 한마디 말 내뱉지 못했죠 손톱 발톱 다 빠지도록 바닥을 긁던 저녁 번갯불 관통하는 아픔으로 덮어야 했던 게 무엇이었는지 누군가는 내 꼬리를 잘라주어야 했고 나도 어떤 이의 꼬리를 모래언덕 깊숙이 묻었답니다 막 도착한 당신, 모래성 속으로 초대합니다 노을과 바람으로 몸을 씻어요 모래 미소와 모래 눈물로 배를 채우고 모래의 테라스로 걸어오세요 떠나간 모든 게 남아 있는 그림자를 안고 춤을 춥니다 잊지 마세요, 다 잊어버리세요 원반 같은 달 아래 엉덩이에 빗자루를 매단 코.. 2023. 5. 8. 김은후 시인 / 동백꽃 활자 외 2건 김은후 시인 / 동백꽃 활자 아버지는 식자공이었다 모든 것 다 말아먹고 주머니에 삼천 원 넣고 동백을 화분에 담아 서울로 왔다 우리도 아버지 따라 동백과 상관없이 서울로 왔다 그때부터 아버지는 동백만 바라보셨고 엄마는 자주 눈을 흘겼다 청춘의 습관대로 아버지는 꽃 이파리에 자기 내력을 식자하고 수액을 잉크 삼아 꾹꾹 찍어놓은 활자들이 조판을 짰다 우리는 아버지 활자와 상관없이 키를 키워갔고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아버지와 상관없이 동백은 피고 동백꽃은 자기가 활자라고 우기고 있다 우리는 동백꽃을 보며 아버지의 신간을 읽는다 김은후 시인 / 석류꽃 시집 남광 인쇄소 가는 길목 어디쯤 낮은 굴뚝이 있었다 굴뚝 뒤 계집아이 둘 쪼그리고 앉을 만한 틈이 있었고 이따금 거기서 활자 몇 개씩 꺼내 먹었다 일곱 살 계집.. 2023. 5. 8. 김준연 시인 / 풍경과의 첫 대면 외 1건 김준연 시인 / 풍경과의 첫 대면 공간은 풍경의 길목을 차단한다 풍경은 넘어지고 흩어지고 휘발된다 나무는 나무에서 벗어난다 모자는 모자에서 벗어난다 고양이는 고양이에서 벗어난다 길은 길에서 벗어난다 벗어난 역은 무작위로 폐쇄된다 멈추지 않는 순환열차에서 언제 내릴지 결정해야 한다 씹히고 껌처럼 내뱉어진 풍경 풍경 이전의 풍경은 없고 풍경 이후의 풍경은 존재하지 않는다 내릴 역을 포착하는 유일한 통로는 창밖 풍경에 있다 풍경을 깨고 표정을 정확히 읽어야 한다 풍경을 멈추고 풍경에서 내리려면 풍경에서 내려 풍경과 대면하려면 -시집 『고양이를 입어야 한다』 2020. 시인동네 김준연 시인 / 물고기 등불을 꺼버리자 대로 빛은 참지 못하는 경우가 있어 가까이 오면 포기하는 경우가 있어 같은 색의 물고기.. 2023. 5. 8. 박청륭 시인 / 오른편을 위하여 외 3건 박청륭 시인 / 오른편을 위하여 입동 새벽부터 기온이 내려가고 바람이 불었다 눈 먼 나귀가 목에 연자방아를 메고 종일 돌고 돌아 끝없이 돌고 있다 바깥엔 계속 흙먼지가 날리고 귀리의 북대기도 날렸다 왼편 안쪽 발굽이 더 닳은 나귀가 기웃둥거린다 노을에 젖은 마을도 조금씩 기울고 있다 박청륭 시인 / 타지마할 오랫동안 머물었던 해가 기울기 시작한다. 평원 끝없이 적시고 있는 노을은 핏빛이다. 아직 온기가 가시지 않은 분홍 어깨를 들어낸 타지마할 영묘, 밤이 되어서도 지워지지 않는 지평선이 있다. 박청륭 시인 / 카이로 묘지 마을 소년 엔진 오일 밋숑 오일 브레이크 오일 오일 오일 하루 종일 폐유만 만지는 기름투성이의 낫셀군은 반질반질 부랄까지 새까맣다. 자동차 정비업소 서비스 센터에 들어 온지도 3년 학교.. 2023. 5. 8. 심보선 시인 / 아내의 마술 외 2건 심보선 시인 / 아내의 마술 아내가 슬프고 슬픈 아내를 보고 있는 내가 슬프고 그때 온 장모님 전화 받으며, 그러엄 우린 잘 지내지, 하는 아내 속의 아내는 더 슬프다 마술처럼 완벽한 세상에서 살고 싶다 모자에서 나온 토끼가 모자 속으로 자청해서 돌아간다 내가 거울 속으로 들어가려 하면 딱딱한 면은 왜 나를 막는가 엄마가 아이를 버리고 직업이 아비를 버리고 병이 아픈 자를 버리고 마술사도 결국 토끼를 버리고 매정한 집이, 너 나가, 하며 문밖에 길을 쏟아버리자 미망이 그 길을 받아 품에 한 번 꼭 안았다가 바로 버린다 온 세상을 슬픔으로 물들게 하려고 우는 아내가 식탁 모서리를 오래오래 쓰다듬고 있다 처음 보는 신기한 마술이다 심보선 시인 / 이 별의 일 너와의 이별은 도무지 이 별의 일이 아닌 것 같다.. 2023. 5. 8. 권수진 시인 / 따뜻한 얼음 외 1건 권수진 시인 / 따뜻한 얼음 맑고 투명한 물속으로 누나의 사랑이 풍덩, 빠졌어 5월이라고 했어 첫사랑이 강바닥에 제 몸 드러내기까지 정처 없는 물살처럼 청춘은 흘러갔어 누나는 피를 얼려 사각얼음 만들었어 손으로 붙잡을 수 있는 사랑 아니었으므로 잡으려면 서로에게 차가운 상처만 주는 얼음이 될 수밖에 없었어 세상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평온을 되찾았다고 했어 강 하류의 넓은 폭만큼이나 멀어져버린 거리(距離) 누나는 적당한 남자를 만나서 결혼을 했어 무엇 하나 순리대로 흘러가지 않았지만 누나는 5월의 신부가 되었어 서로에게 부담스러운 누나의 안부는 냉장고 속에 오래 얼음으로 덮여 있었어 저것 봐, 누나의 안경에 서리가 내렸어 누군가 입김 때문이라고 했지만 결빙이 시작된 불안한 살얼음판을 당당하게 걸었던 그때의.. 2023. 5. 8. 이창수 시인 / 횡천橫川 외 1건 이창수 시인 / 횡천橫川 시냇물이 옆으로 흘렀네 마을에 식자가 있어 횡천이라 불렀네 시냇물 따라 버드나무가 자라고 버드나무는 새와 구름 불러왔네 냇가에 작은 술집도 생겼다네 술집에서 나온 사람들이 옆으로 걸었네 횡천 거슬러 올라가면 푸른 학 날아다니는 청학동이 나온다네 시절이 하 수상해지면 순한 사람들이 청학동에 들어와 살았네 사나운 도적들 찾아왔지만 나무꾼이 되거나 더 깊은 산으로 갔다네 횡천에 다리가 놓이고 시장이 섰네 길이 포장되고 자동차가 다니기 시작했네 사람들도 앞만 보고 걸었네 구불구불 길도 직선으로 바뀌고 논도 밭도 바둑판 되었다네 사람들은 직선을 숭배했다네 그러든 말든 횡천은 옆으로만 흘렀다네 횡천 가로질러 그물이 쳐 있었으나 아무것도 걸리지 않았다네 밤 강물에 일월성신 희미하게 보였지만 .. 2023. 5. 8. 혜원 시인 / 윤곽 2022년 〈상상인〉 신춘문예 당선작 혜원 시인 / 윤곽 당신은 손의 윤곽이 열쇠와 닮아서 아침에 손을 떨어뜨린 사람 내 손은 정오의 구멍처럼 환하고 V자로 깎아 낸 아홉 개의 벤 자리와 여덟 개의 이가 있는 당신의 열쇠는 부드러운 곡률을 갖고 있어서 우리는 쉽게 통과하네 타인의 주머니에 쉽게 손을 맡기고 열쇠를 만지듯 가볍게 만지작거리고 백 년 동안 열쇠가 녹고 있지 녹은 자리가 예뻐서 당신이 또 손을 어루만지면 너무 헐거워 당신은 한 번도 내 손을 열지 못했지 다른 손이 필요하다고 믿었지 윤곽이 녹아서 백 년 동안 열쇠만 깎았지 당신을 이해하기 위해 내가 한 일은 최선을 다해 손을 오므렸던 일 손을 펴면 열쇠의 깎은 자리가 사라지고 내 주머니에서 손이 사라지고 주머니에 타인의 열쇠가 가득하네 어느 날.. 2023. 5. 7. 조연향 시인 / 봄의 내부 외 2건 조연향 시인 / 봄의 내부 검은 그림자 거실 바닥을 화들짝 지나갔다 새 떼가 스쳐 간 것일까 구름이 날아간 것일까 타고 남은 햇살 자국이 내 의식을 스치고 지났을까 검은 얼룩의 잔상이 멍하니 티브이에 빠져있던 오후를 흔들었다 흐린 잔상을 따라 까마귀 떼 울음이 흩어지고 날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 같은데 나에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희고 붉었던 꽃잎들 영혼이 다 날아간 것처럼 봄날의 내부는 텅 비어 있다 창밖을 내려 다 보았을 때 사월의 새순들이 하늘 바깥쪽으로 가득 뻗쳐오른다 조연향 시인 / 자가격리 중 저 땅에는 발을 들여놓지 말았어야 했었어 혹독하지만 너와 나, 우리 사랑이 물그림자처럼 깊어지는 계절...... 조연향 시인 / 국경을 지나며 해가지지 않아도 어둠이 내리기 시작했다 숲을.. 2023. 5. 7. 안수환 시인 / 각 외 2건 안수환 시인 / 각 소쩍새를 울리는 것은 슬픔인 줄 알지만 슬픔 아니다 각이었던 것 조팝나무를 흔들고 있는 것도 바람인 줄 알지만 바람 아니다 각이었던 것 15도쯤 삐들어진 각 그래서, 나는 과녁을 향해 활시위를 힘껏 끌어당긴다 -시집 『그 사람』 2012 안수환 시인 / 구름 냄새 구름을 만드는 것은 햇빛과 바다와 풀잎과 그리고 거센 바람의 손짓일 거다 별을 만드는 것은 추락과 몰입 혹은 더욱 아득한 욕망의 파편일 거다 힘든 날 내 눈꺼풀을 열고 나온 구름 냄새 바람 부는 날 다시 내 눈꺼풀을 열고 날아가는 것 골이 띵한 것 꽃 없네 꽃 있네 안수환 시인 / 하강시편 1.2.3 1::: 나는 언덕 위에 집을 짓지 않겠다 남보다도 먼저 구름을 쳐다보고 먼 들판에 서 있는 물을 굽어보는 오만이 밤마다 내 .. 2023. 5. 7. 김다연 시인(익산) / 고(蠱) 외 1건 김다연 시인(익산) / 고(蠱) 독충들을 그릇에 넣어 서로 잡아먹게 하면 최후 살아남은 독충은 가공할 독을 갖게 되는데 이를 고라 하고, 투기하거나 저주하는 이가 있어 오동나무 목각인형에 그의 이름과 사주를 적어 주술을 건 다음, 고를 그의 주변에 풀면 소원을 이룰 수 있는데 이를 무고(巫蠱)라 한다 실록은 없지만, 독충들을 그릇에 넣어 서로 잡아먹게 하면 최후 살아남은 독충의 독이 사라지는 족속도 있다 독으로 해독하는 독, 잃어버린 독 대신 독을 가진 것들을 잡아먹는 습성을 갖게 되는 이 고는 독성을 품은 것의 몸속을 파고들어 서서히 독을 갉아먹는데, 독성을 다 잃으면 죽고야 마는 그것이 사람의 마음이다 김다연 시인(익산) / 소리 없이 그리다 모른다, 얼마나 울어야 할지 어떻게 울어야 할지, 어렵기만.. 2023. 5. 7. 이전 1 ··· 19 20 21 22 23 24 25 ··· 410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