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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순 시인 / 엄마와 봄비 외 1건 이정순 시인 / 엄마와 봄비 죽을만큼 아팠던 엄마 목소리가 봄비처럼 희미하다 가끔은 연습 없는 이별을 떠올리다 낡은 젖무덤이 흐느끼는 꿈을 꾸면 밤새 머리가 하얗게 샌 목련 한 그루 훌쩍이는 콧물로 달랑 한 줄 썼다 지워진 편지처럼 붉게 구겨진 꽃잎, 발끝에 채이는 봄날이 휘적휘적 갈겨져 있다 이정순 시인 / 억새꽃 잃어버린 계절을 찾아 나선다 까치발로 서 있는 그녀 구름 안고 일렁이다 굽어버린 속마음 하루, 이틀, 사흘.... 지나던 바람 넌지시 손 한번 잡아주니 마음속 고여있던 슬픔이 솜털처럼 흩날리기 시작한다 이정순 시인 강원도 양양에서 출생. 청주사범대학 국어교육학과 졸업. 2006년 《문학시대》 신인상을 통해 등단. 국제 PEN한국본부 회원. 한국문인협회 회원. 수원문인협회 회원. 경기시인협회 .. 2023. 5. 12.
임덕기 시인 / 봄으로 가는 지도 외 2건 임덕기 시인 / 봄으로 가는 지도 언덕에 늘어선 옹이 박힌 겨울나무 빛을 향한 끝없는 구애가 그늘진 시간마다 허공에 손을 뻗는다 추위에 시달린 두꺼운 각질 갈라진 피부를 봉합도 못한 채 살이 에이는 고통을 속으로 삭인다 해묵은 잎과 삭정이 땅에 떨군 채 맨몸으로 혹한을 건너는 나무들 봄을 찾아가는 비밀지도 한 장씩 꼭 쥐고 있다 시집 『 봄으로 가는 지도 』 2022. 지혜 임덕기 시인 / 풀의 영유권 길가 보도블록 틈새로 풀들이 왁자하다 쇠비름, 질경이, 민들레, 강아지풀… 발뒤꿈치에 잔뜩 힘주고 서 있다 본래 이곳은 들판이었다 풀들이 주인이었을 때는 싸우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길이 생긴다는 말에 영유권 한번 내세우지 못하고 하루아침에 뿌리째 뽑힌 잡초들 그 자리에 각진 보도블록이 촘촘히 심어졌다 풀.. 2023. 5. 12.
김차순 시인 / 가을 한계령 외 1건 김차순 시인 / 가을 한계령 억새풀 아우성 하늘 받쳐 든 한계 으스스 푸른 혼불 바람으로 머물고 피멍든 낡은 메아리 온몸으로 가을이다 고열로 삭은 살내 고사목을 꽃 피운다 겹겹이 신기루로 골짝길 포복하는 긴 세월 생목숨 달군 넌, 하나의 예술 祝典 祝典의 고갯마루 한뎃잠 자던 낮달 따가운 푸른 속살 설핏 설핏 목 내밀고 부르튼 날카로운 허공 맘껏 밟고 서있네 김차순 시인 / 가포찻집, 샹송이 흐르는, 단풍차를 마시는 언덕 위 맷돌찻집* 왈가닥 루시 아줌마* 껄껄한 목소리로 구수한 수제비를 뜬다 꿈 한 사발 빚는다 풍물패 북채 옆 찢겨진 창으로 자꾸만 작아지는 해안선을 그리며 진하게 물감을 푼다 바다를 만든다 찻잔 속 시월상달 색종이로 접던 밤 해 갈수록 깊은 파고 커져가는 느낌표 가을엔 샹송을 듣는다 고.. 2023. 5. 12.
이숨 시인 / 구름 편의점 외 3건 이숨 시인 / 구름 편의점 어디에도 있고 어디에도 없는 편의점에 가면 구름을 찢고 나오는 물고기와 양과 생필품이 있습니다 바코드에 찍힌 사물들이 팔려나가고 새로운 구름 품목들이 입고되는데 신선도 유지를 위해 시간은 입맞춤을 서슴지 않고 합니다 질서 있게 놓인 사물들 착하게 사는 아르바이트생의 늦은 점심에 유효기간 지난 김밥이 은유처럼 놓여있습니다 뜬구름이 흘러가도 오빠는 희망을 붙잡을 겁니다 구름의 감정을 바코드처럼 읽으면 측정 불가능한 꿈을 키울 겁니다 계단을 내려가는 오빠의 방향키 성공의 키워드가 캄캄하지만 막막한 구름의 방향까지 읽을 겁니다 구름의 색깔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먹구름도 요령껏 잘 다스리면 됩니다 그 방법을 터득하기 위해 오빠는 어디에도 있고 어디에도 없는 구름 편의점에 갑니다 현실을 찢.. 2023. 5. 12.
유승영 시인 / 수요일 아이 외 2편 유승영 시인 / 수요일 아이 수요일 아이하고 친구가 되었어 조금만 기다리면 수요일 아이는 또각또각 구두 소리를 내면서 나를 찾아올거야 수요일 아이는 일주일에 한 번씩 동굴에서 달빛을 꺼내지 보랏빛 안개를 배낭에 담기도 하고 알록달록 솥에 넣어 끓이기도 해 수요일 아이는 보글보글 대답했어 알맞게 졸아들 때까지 새콤달콤 썰어주면 된다고 주황색 바다와 살구색 하늘 그리고 간질간질한 초록색은 언제나 나만 따라다녀 수요일아이처럼 날마다 수염이 자라진 않지만 자꾸만 짧아지는 수요일 아이 챙겨갔던 비스킷 사과 반쪽이 바닥에 뒹굴었지 부서진 배를 버리고 떠난 아버지를 생각하는 수요일아이 거울에 비친 엄마도 이젠 곧 집을 비울 거라고 했어 수요일 아이가 알고 있는 건 봉투 속에서 꿈을 꾸는 휴대폰이야 수요일 아이는 팔락.. 2023. 5. 11.
박동민 시인 / 야시장(夜市場) 외 1건 박동민 시인 / 야시장(夜市場) 길 잃은 이들이 한데 모였네 난리 통에 장이 섰네 뿔뿔이 헤어진 이들은 전쟁이 끝나도 같은 악몽을 꾸네 눈썹에 앉아 자리다툼 하던 별들이 하늘로 질끈, 뛰어들었네 피난민들은 풀어진 신발 끈이나 부러진 발톱 같은 조그마한 흔적이라도 찾으려 모퉁이에서 쪽잠을 자네 1일 6일, 2일 7일, 3일 8일, 4일 9일, 5일 10일에 장이 서네 기다리는 이들에게는 매일매일이 장날이네 그날도 장날이었네 가는 날이 장날이었네 얼굴 전체가 아가리인 쓰나미가 별들을 아귀처럼 한 입에 삼키고 군함이 쓰나미를 타고 몰려와 단숨에 깃발을 꽂은 그날이, 장날이었네 시장이 온통 울음바다가 된 그날로부터 길 잃은 이들은 지구를 떠나 고래 뱃속 같은 우주로 밀려왔다네 가장 오래된 재래시장인 우주장이 섰.. 2023. 5. 11.
김태우 시인 / 벌3 외 2편 김태우 시인 / 벌3 -감정기계 지금은 12시 00분 겨울이 지나간다. 서로 마주 앉아 빗소리를 듣는다. 나는 커피를 마시며 여름을 기다리고 너는 문밖을 바라보며 가을을 기다린다. 너라는 장르에서 가장 예쁜 단어를 골랐다 그게 너였다 나는 너의 흔적을 사랑한지 모르겠다. 사랑을 인질로 잡고 슬픈 설렘만 강요했는지도 모르겠다. 12시 30분 우리는 예쁜 옷을 입고 절대로 찾지 않을 사진을 찍었다. 사랑이 이루지 못한 사랑으로 완성되었다. 김태우 시인 / 무명배우 ​ ​ 텔레비전에 나왔습니다. 주말연속극 시장에서, 미니시리즈 골목에서, 월화드라마 가게에서. 일주일에 하루를 제외하고 텔레비전에 나왔습니다. ​ 일당을 받아 순댓국집에 갔습니다. 주말연속극에서 내가 나오는 찰나, 주문하지도 않은 순댓국이 나왔습니.. 2023. 5. 11.
김건일 시인 / 사르비아 외 2건 김건일 시인 / 사르비아 ​​ 피속의 적혈구만을 뽑아서 흰 깨꽃에 칠한 것이다 ​ 그렇게 나도 너를 칠해주고 싶다 ​ 이승의 업적이라곤 타는 듯한 마음뿐 ​ 사르비아 ​ 꿈에도 선한 사람은 선하게 보이고 꿈에도 악한 사람은 악하게 보인다 김건일 시인 / 땅 1 막막하다 막막해 사방을 둘러보아도 발붙일 곳 없고 이리저리 손 내밀어도 먹을 양식 줄 사람 없네 아버지 어머니가 주지 않으니 형제 자매가 주지 않으니 일가친척 이웃이 주지 않으니 배가 고파도 먹을 것이 없어 죽을 지경이라도 누구 한 사람 밥 줄 사람 없네 아침이 되어도 아침을 못먹고 점심이 되어도 점심을못먹고 저녁이 되어도 저녁을 못먹네 배고파라 배고파라 창자에서 쭈르륵 소리가 나도 사방을 둘러보아도 먹을 것이라곤 없네 눈뜨고 눈비벼봐도 먹을 것은.. 2023. 5. 11.
​​김숙영 시인​ / 별지화(別枝畵) 외 1건 김숙영 시인 / 별지화(別枝畵) 처마 밑 연꽃이 천년을 산다 진흙 물결도 없는데 한 번 돋아나면 오직 적멸을 향해 움직인다 그러니 꽃은 피고 지는 게 아니라 화려함 뒤에 숨어 나무의 숨결과 함께 천천히 조금씩 흩어지고 있는 거다 처음엔 그저 썩지 않게 다스리는 일이라 여겼다 그런데 틈 하나 없이 나무를 껴안고 놓지 않는다 이것은 밀봉이 아니라 밀착 색(色)이 공(空)을 향해 걸어가려는 의지 봉황의 춤이 허공중에 스민다 바람이 색을 민다 풍경 소리가 찰방찰방 헤엄친다 지붕 아래 꽃들이 소리 나는 쪽을 본다 색과 색이 만나 서로의 색을 탐독한다 꽃의 안쪽을 볼 수 있는 안목이 될 때까지 나는 화두 밑을 걷고 또 걷는다 머리 위에 꽃의 말이 내려앉는다 대웅전 안쪽 문수보살이 아무도 모르게 웃을 것만 같다 몸속.. 2023. 5. 11.
이정오 시인 / 데이트 외 2편 이정오 시인 / 데이트 자르는 게 커트인 줄 알았어 그런데 그게 아니야 얼마나 아름답게 남기느냐 그게 커트였어 오랜만에 만나 반가웠어 오늘 커트 잘했어 고마워 계간 『다시올문학』2020년 가을호에서 이정오 시인 / 즉석복권 하루걸러 한번 삼십 분 가량 테이블 주변을 뭉개고 가는 사람이 있다 탁자와 바닥 사방에 금가루를 뿌린다 조마조마 숫자가 보일 때마다 잘게잘게 부서지는 그 남자의 부푼 꿈 그는 약간 지체장애를 가졌다 몸에서는 언제나 시큼한 냄새가 난다 가장 바쁜 아침 출근 시간 일곱시 삼십 분 그는 희망에 부풀어 얼굴이 벌게지도록 시간의 부스러기를 후후 불어 날린다 어쩌다 주어진 숫자와 비숫한 모양이 나타나면 괴성을 지르기도 한다 결국 일그러진 표정으로 삐뚤빼뚤 자전거를 타고 멀어져간다 ​ 이정오 시인.. 2023. 5. 11.
김준현 시인 / 나를 깍는 너 외 2편 김준현 시인 / 나를 깍는 너 연필 끝이 둥글둥글 순해지면서 먹구름처럼 흐리멍덩해지고 살이 찌고 둔해지는 글씨들 요즘 내가 쓰는 글이 힘이 없다며 좀 갈고닦으라며 이젠 너인 줄도 못 알아보겠다며 너는 연필깍이에 내 연필을 집어놓고 빙빙 돌렸다 나는 사람이 자꾸 날카로워지는 게 싫다 연필이 얼마나 날카로워질지 모르면서 연필이 닿은 종이가 얼마나 아파할지 모르면서 내가 조금씩 사라져 가는 줄도 모르면서 너는 나를 자꾸만 깍고 깍았다 -시집 『세상이 연해질 때까지 비가 왔으면 좋겠어』 김준현 시인 / 도 너에게 하고 싶었던 말이 리코더로 들어가 소리가 되었어 두더지 땅굴 속에서 어둠이 빛을 찾아 나가듯 열 손가락으로 ㅇ 같은 구멍들 하나하나 막을수록 도, 시, 라, 솔, 파, 미, 레, 도 키가 줄어들어도 빛.. 2023. 5. 11.
고영섭 시인 / 겨울나무 외 2건 고영섭 시인 / 겨울나무 ​ 한여름 들끓어 올랐던 세상과의 불화를 잠재우고 홀가분한 몸뚱이로 봄을 기다리는 그대 고영섭 시인 / 멸치 자기를 던져본 이들만이 안다 해저산맥 사이를 자맥질하며 아무 시름없이 노닐던 때에는 삶의 참맛 몰랐으나 삶이 이렇게 저어가듯 그저 가볍다는 것만 알았을 뿐 ​ 어쩌다 하늘이 너무나 그리워 물 위로 고개를 내밀다 어떤 어부의 그물에 걸리어 갑판 어디메쯤에서 말려져버린 참을 수 없이 가벼운 내 초라한 모습 ​ 그러나 자기를 버려본 이들만이 안다 후라이팬 위에서 콩기름에 버무려 달달 볶이거나 마른 안주가 되어 고추장에 찍혀 먹히거나 다시마와 함께 맹물에 익혀가며 다싯물이 되거나 믹서기에 갈려 알지 못하는 국물에 던져질 때에 ​ 비로소 삶의 참맛을 알게 된다 나를 버려서 다른 음.. 2023. 5.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