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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정 시인(상주) / 계단의 기원 외 2편 이윤정 시인(상주) / 계단의 기원 맨 처음의 옥탑은 새순이 무성한 나무였을 것이다 그래서 계단은 반드시라는 말과 짝을 이룬다 계단은 엎질러지는 것들의 천적 발을 헛디뎠을 뿐인데 너무 많은 몸이 헐고 굴러 내려갔다 가장 낮은 곳에서 발견된 사과나 혹은 복숭아 들은 모두 멍이 들어 있다 아무 가진 것 없는 저녁이어도 오르지 못하고 떨어진 것들이 앉아 있는 계단은 가파르다 올랐다 내려가는 고행의 길을 인내하는 동안 사람들은 무릎을 조련당하고도 계단에 기원을 심었지 한밤 모두 잠든 시간 아코디언 소리가 난다 폈다 오므렸다 하루를 반복하는 무릎의 하모니 어슴푸레한 상처의 퍼즐을 맞추며 나는 오늘 밤도 계단을 오른다 수많은 발자국의 말을 다 받아 준 계단은 입을 봉합하고 통증을 아픔이라 하지 않는다 오를수록 가난.. 2023. 5. 4.
이윤정 시인(淸良) / 수련睡蓮 외 1편 이윤정 시인(淸良) / 수련睡蓮 깨달음을 얻은 부처로 피었구나 흙탕물을 먹고 자랐어도 대대손손 그 고고한 자태 천 년 만 년 이어가는구나 햇볕이 뜨거울 때라야 그대 더욱 아름다움을 발하며 인내와 자비를 가르치는 곱지만 강한 부처로 피었구나 이윤정 시인(淸良) / 사랑 믿음직한 사랑은 바닷가의 몽돌이 되어주는 것 바다라는 한 이불을 덮고 곁에 있어도 다치지 않게 하는 둥근 몽돌이 되어주는 것 희생적인 사랑이란 비누가 되어 주는 것 상대를 돋보이게 하기위해서 제 몸은 닳아 없어져도 참는 그런 비누가 되어 주는 것 진정한 사랑이란 하늘 문에 갈 때까지 기꺼이 흙이 되어주는 것 보듬고 덮어줘서 꽃과 나무를 키우는 넉넉한 품을 지닌 흙이 되어주는 것 이윤정 시인(淸良) 한국문인협회 문학기념물조성운영위원. 월간 신.. 2023. 5. 4.
이윤정 시인(부산) / 탈 외 2편 이윤정 시인(부산) / 탈 세월의 흔적인가 거뭇하게 떠오르는 잡티며 주름이며 퍼석한 얼굴이 거울 속에서 빤히 보고 있다 화운데이션, 마스카라, 루즈 재빠른 손동작으로 채색되어지고 새롭게 태어난다 벽에 걸린 하회탈이 웃으며 묻는다 너, 변장한 거 맞지? 자신을 호도하기 위한 겉치레 그럴듯한 거짓말을 덮어쓰고서 모두들 변장하고 살지 탈 하나쯤 갖고 살지 그래, 너도 탈 나도 탈이다 -이화옥 시집 ‘산수유, 꽃등을 켜다’중에서- 이윤정 시인(부산) / 사랑, 뿌리가 되는 일 산을 견디게 하는 힘은 세월과 함께 땅속 깊이 뻗어 내린 나무뿌리이다 한 때는 작고 여려 풀처럼 흔들리며 설움에 젖었던 폭풍우의 밤도 있었으리라 숲 속 나무들 사이에서 간절한 목마름으로 딱딱한 바위를 에돌며 아프도록 뿌리내린 사랑이여 핏줄.. 2023. 5. 4.
[홍성남 신부의 ‘신약성경, 무엇이든 물어보세요’] (17) 자선 [홍성남 신부의 ‘신약성경, 무엇이든 물어보세요’] (17) 자선 오른손이 베푸는 자선은 왼손도 몰라야 합니다 가톨릭신문 2023-04-30 [제3341호, 13면] 자선 숨기라는 주님 말씀은 ‘자기자랑용’ 자선에 대한 경고 조건없이 베푸는 게 참 자선 가진 사람들과 가난한 사람들이 서로 만날 일이 없을 때, 사회적 위화감은 커진다. 자선을 통해 그들이 어울릴 때 마음의 벽은 허물어지고, ‘함께’ 하는 공동체에 더 가까워질 수 있다. ■ 자선이 중요하다고 하는데, 예수님께서는 자선을 숨기라고 말씀하십니다. 자선이 중요하다면, 더 많이 알려서 다른 사람들도 그 모습을 보고 더 많이 자선을 하도록 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교회에서는 자선을 강조합니다. 자선은 왜 중요한가? 자선은 사람을 심리적인 이기심에서.. 2023. 5. 4.
문숙 시인 / 집착 외 2편 문숙 시인 / 집착 그물망 속에 든 양파 서로 맞닿은 부분이 짓물러 있다 간격을 무시한 탓이다 속이 무른 것일수록 홀로 견뎌야 하는 것을 상처란 때로 외로움을 참지 못해 생긴다 붙어 있는 것만으로도 상해서 냄새를 피운다 누군가를 늘 가슴에 붙이고 사는 일 자신을 부패시키는 일이다 문숙 시인 / 밥상을 차리며 어느 문학상 시상식에 가서 축하 반 부러움 반을 섞어 박수 치다가 상 복 없는 시인들끼리 서로서로 시 좋다고 칭찬하다가 문학상은 못 받아도 밥상은 받고 산다는 한 시인 농담에 웃어 주다가 밥상이 문학상보다는 수천 배는 값진 것이라고 맞장구치다가 밥은 없고 술만 있는 자리에서 헛배만 채우다가 집에 와서 식구들의 밥상 차린다 일생 가장 많이 한 일이 나 아닌 너를 위해 밥상 차린 일임을 생각하다가 오나가.. 2023. 5. 3.
황송문 시인 / 해를 먹은 새 외 2편 황송문 시인 / 해를 먹은 새 죄를 따먹은 새 눈이 밝아진 새가 잉글잉글 불붙어 노래 부르네 태초에 남녀가 금기의 과실을 따먹듯 절정의 순간을 탐하는 화덕에서부터 일어난 지진은 손끝 발끝까지 감전感電 하더니 여진餘震으로 찌르르 찌르르 오장육부 오대양 육대주로 희열이 넘쳐 넘실거리며 흐물흐물 풀어지더니 사랑과 슬픔의 볼레로 같은 영화음악으로 온누리 구석구석 파고드는 뿌리로 굽이치는 물결로 머물다가 흘러내리더니 불을 사랑하는 물과 물을 애무하는 불이 어울려 지글지글 끓어제끼는 화덕 삼매경........ 그 사랑의 궁전에는 불과 물이 불꽃이 되어 군불을 지피는 인체우주人體宇宙 수억만 세포들 폭약이 되어 폭죽을 터뜨리며 노래 부르네 황송문 시인 / 자운영紫雲英 나는 그녀에게 꽃시계를 채워 주었고 그녀는 나에게 .. 2023. 5. 3.
김조민 시인 / 잘못 놓인 보도블록처럼 김조민 시인 / 잘못 놓인 보도블록처럼 내가 뒤돌아봤을 때 아무것도 없었다 누군가의 발소리를 들었다고 두고 온 침묵이 생각났다고 부풀어 오른 어둠이 등을 떠밀었다고 단지 혼잣말을 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은 발끝에 걸린 보도블록 때문이었다 누군가의 아주 사소한 실수로 잘못 놓인 사각형은 자신의 모서리 하나를 허공에 놓고 있었다 연속성을 잃은 어제와 오늘처럼 예측할 수 없는 다음이어서 오히려 간절한 기도였다 어쩌면 나는 갑작스런 목소리를 들었다고 말할 수도 있었다 멀어지지만 않는다면 돌아갈 수 있으리라 갈래의 길 앞에서 오랫동안 말라가던 그날은 순간과 순간 사이에서 뿌리내린 그림자였다 덩굴이었다 밧줄이었다 무엇이든 낚아채는 다짐이었다 그때의 내가 차라리 잘못 놓인 보도블록처럼 현현한 울음이었다면 설명되어지는 .. 2023. 5. 3.
권순자 시인 / 소라 가옥 권순자 시인 / 소라 가옥 소라껍데기 주렁주렁 수천 개 집을 지었다네 소라의 집을 찾아드는 쭈꾸미 아름다운 빈집을 누가 마다하리 지옥으로 가는 길인 줄 모르고 시커먼 길로 미끄러져 들어가는 용감한 의심 없이 몸을 디미는 선량한 몸짓 보소 파도도 묵인하는 상한 길 참담한 눈빛이 소라 저 깊은 가슴 속에 흔들리고 있을까 삶의 무게가 중력만큼이나 끈적하다 혼자 살 집을 구하느라 이리저리 헤매다가 고독한 생의 모퉁이에서 잠시 한눈팔다가 아름다운 빈집 하나 발견하고는 냄새 맡고 재빨리 입주하네 돌아나갈 길 없는 일방통행로, 소라의 집 입주 집을 점거하는 순간 치사량의 행복이 소라 가옥에 맴도네 가눌 길 없는 무거운 손아귀 쭈꾸미의 발이 묶여 끝내 무덤이 될 아름다운 집 몽산포에는 쭈꾸미의 블랙홀 소라 가옥이 있다.. 2023. 5. 3.
김종숙 시인(화순) / 물빛 같은 숨결로만 김종숙 시인(화순) / 물빛 같은 숨결로만 ​ ​ 어머니 아버지는 어떤 분이셨습니까, 당신은 황급히 제 입을 틀어막습니다 아들아, 세상에는 저 물빛 같은 숨결로만 느껴야 하는 이름이 있단다 오로지 자음과 모음으로만 그리워해야할 세 음절 ​ 역사는 지우고 당신은 망각하고 세상과 나는 몰라야 하는 그날 우리는 무엇이었습니까 ​ 반군을 잡겠다던 토벌군에게 주민들은 청야淸野의 대상 화순읍 열두 개 면, 백아산과 모후산 화학산과 천태산 또 또, 천왕산과 두봉산은 사람을 품어내느라 안간힘을 썼으나 국가는 국민을 위해 무엇을 했습니까 ​ 인공기를 앞세운 인민군복장의 인민군들, 인민공화국만세를 강요했으나 알고 보니 빨치산과 부역자 색출을 위해 파 놓은 토벌대의 함정 ​ 총구 앞에 허름해진 목숨들은 제 집 마당에서 김채.. 2023. 5. 3.
조현석 시인 / 물방울석 외 2편 조현석 시인 / 물방울석 돌 하나 내게로 왔다 수억 년 고요의 지층 깊이 갇혔다가 태양의 지표면 온도만큼 뜨거운 지구의 핵(核)을 품었다가 햇살 서늘한 어느 날 단단하게 식어 강가로 흙 묻은 몸으로 느리거나 또는 세찬 물살에 몸단장하며 뒹굴다가 구석구석 둥글게 다듬어진 돌 하나 내게로 왔다 거무튀튀하게 닳은 돌 비 오는 날 뿌연 유리창에 무수하게 붙잡힌 빗방울들 뜨거웠던 희망의 한 때의 열정의 끝 또는 절망의 끝까지 맛본 고백 못하고 길고 긴 침묵의 덩어리 맺히고 맺혀 태양의 흑점(點)처럼 검게 돋아나 녹이 난 금화 같은 무늬 도드라진 채 검은 좌대 위에 공손하게 눌러앉아 책상 위 컴퓨터 모니터 곁에 섰다 물방울석 하나 내 눈 앞에 왔다 조현석 시인 / 모나미153 검정 볼펜 검정 볼펜이 거북 등껍질 같.. 2023. 5. 3.
​​이돈형 시인 / 두말할 나위 없이 이돈형 시인 / 두말할 나위 없이 두통이 일었다 타이레놀이나 아스피린은 손 닿을 데 있어야 했지만 누가 먼저 두통을 앓았는지 아무리 찾아도 없고 있을 게 없을 때 비탈처럼 정해 놓은 것들이 하나둘 미끄러지기 시작한다 물 한 잔 따라 마시며 머리를 흔든다 어디까지 가봐야 할지 환기가 필요했다 닫힌 창문이란 창문은 다 열어젖히고 두통의 원인을 검색하다가 겪어보지 못한 원인들이 너무 많다는 사실에 덜컥 겁이 나 잠깐 창밖으로 떨어졌다 먼 나라의 먼먼 나무열매처럼 나와는 상관없이 내리는 그곳의 비처럼 실수를 자꾸 떨어뜨려 내가 낳은 두통이 나를 낳아 마르고 닳는 일만 남았을 때 바람이 머리를 강타했다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칼바람에 두 번 다시 머릴 흔들 수 없었다 앓고 나도 다시 앓아야 했다 웹진 『시인광장』.. 2023. 5. 3.
​​김종숙 시인(리움) / 불멸의 청년 1941 외 4편 ​​김종숙 시인(리움) / 불멸의 청년 1941 ​ 소년은 파란 하늘에 물들이고 애틋한 사랑은 강물 속에서 어른거리는데 맑은 순정을 가진 소년에게 푹 빠졌던 시절이 나에게도 있었던가? ​ 생각하게 하는 초저녁 하얀 광목 행주치마에 시를 쓰고 파란 물감으로 그림을 그리는 손글씨 작가의 별 헤는 이 밤에 당신의 그리움을 읽습니다 ​ 그거 아세요? 내 이름자 묻힌 언덕 위에도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 거라 하신 말 스물아홉 살 불멸의 청년인 당신이 하신 말 억장이 무너지는 말 ​ 문설주에 내리는 햇살이 냉골인 당신 방에 깊숙이 파고들었으면 ​ ​ ​ ​​ 김종숙 시인(리움) / 아가 1939 ​ 북간도의 아기의 새벽빛은 따뜻했다네 대청마루 끝에 앉아 젖을 물린 엄마 눈 속에 큰달 하나 품고 있었다네 옹알옹알 젖 .. 2023. 5.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