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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시영 시인 / 거울의 바깥에서 박시영 시인 / 거울의 바깥에서 낡은 거울을 오래 닦은 후에 안다 살아 있는 줄만 알았던 시간 어린 날 해마다 조사하던 장래희망 연필은 많이도 서성거렸지 견고한 태양 쪽으로 줄 서는 일 끝없이 불씨를 살리는 차가운 걸음이었다 깨진 거울 속에 펼쳐진 풍경의 균열 사이로 강과 바다에서 동그랗게 자라난 오래된 어둠 물안개로 퍼져나갔다 비를 피하는 우리의 시간은 꿈의 날개가 부려놓고 앞서간 해진 신발이 뿌려놓은 씨앗들 질척한 땅 깊숙이 죽은 듯 엎드렸을 뿐 어느 때인가 깊은 물이 침묵에 이르듯 우산 아래 흩어져간 빗물로 걷는 길 촉촉한 대지는 연둣빛 풍경 피워 올리고 낡아서 맑아진 얼굴 하나 긴 겨울의 슬픔에 얼려놓은 강을 두드려 수줍고 단단해진 근육으로 오고 가는 계절 초록이 주름지는 ㅡ『다층』, 2022 겨.. 2023. 5. 1.
박종영 시인(청주) / 슬픈 야생화 외 1편 박종영 시인(청주) / 슬픈 야생화 캄캄한 입술을 더듬어 꺼끌꺼끌하게 마른밥알을 목구멍으로 삼킨다. 목젖의 떨림과 긁힘의 미약한 소리 너의 열린 몸속으로 내가 들어간다. 꽃이 피듯이 꽃이 지듯이 겨드랑이 깊숙한 곳을 간질이며 소리 없이 조용히 움튼다. 함몰되는 꽃의 눈동자 속에서 흘리는 소금물 뚝뚝 받아내며 풀어지듯이 깜빡깜빡 지워지고 있는 그녀 꽃 진자리에서 질척이며 와글와글 울고 있다. 당신이 까만 밤 속에서 하얗게 피어날 때까지 -시집 『서해에서 길을 잃다』에서 박종영 시인(청주) / 서해에서 길을 잃다 바다의 어깨가 좁다 검은 양복의 재봉 선을 따라 내려가다 만난 길 유난히 손금처럼 가늘고 긴 길에서 서해바다를 만났다 넘치는 방파제의 턱 선에서 거품처럼 게들을 게워낸다 살을 섞다만 게들이 옆걸음질.. 2023. 4. 30.
여림 시인 / 느낌 외 1편 여림 시인 / 느낌 이렇게 바람이 심한 날이면 느낄 수 있어 사랑은 저로 절절이 몸을 흔드는 나무와 같다는 걸 그 나무 작은 둥지에 새끼새를 품고 있는 어미새와 같다는 걸 그런 풍경을 안타깝게 바라보는 우리 두 마음이란 걸 여림 시인 / 살아야 한다는 근사한 이유 종일, 살아야 한다는 근사한 이유를 생각해 봤습니다. 근데 손뼉을 칠 만한 이유는 좀체 떠오르지 않았어요. 소포를 부치고, 빈 마음 한 줄 같이 동봉하고 돌아서 뜻모르게 뚝, 떨구어지던 누운물. 저녁 무렵, 지는 해를 붙잡고 가슴 허허다가 끊어버린 손목. 여러 갈래 짓이겨져 쏟던 피 한 줄. 손수건으로 꼭,꼭 묶어 흐르는 피를 접어 매고 그렇게도 막막히도 바라보던 세상. 그 세상이 너무도 아름다워 나는 울었습니다. 흐르는 피 꽉 움켜쥐며 그대 .. 2023. 4. 30.
권상진 시인 / 겉절이 외 2편 권상진 시인 / 겉절이 어느 현장에서 품을 팔았는지 낡은 봉고차가 식당 앞에 한 무더기 일당쟁이를 부려놓는다 땅거미가 하루의 노동에서 건져낸 저들을 척척 국숫집 의자에 걸쳐놓으면 시멘트 바닥으로 주르륵 흐르는 노을 하얀 거품을 저녁의 가장자리로 밀어내며 국수가 삶아지는 동안 그들은 종일 다져온 양념으로 서로를 버무린다 잘근잘근, 오늘의 기분을 씹으며 겉절이 한 잎을 반으로 찢는다 너무 길거나 폭이 넓은 슬픔은 적당한 어디쯤 젓가락을 쑤셔 넣고 주욱 찢어야 비로소 먹기에 알맞은 크기가 된다 반쯤 숨이 죽은 배춧잎처럼 하루가 치대는 대로 몸을 맡겼다가 국수 앞에 둘러앉은 사람들 아직은 어디에라도 곁들여지고 싶은 절여진 겉들 -계간 《불교문예》 2022년 가을호- 권상진 시인 / 농담 죽음을,이루다 라는 동사.. 2023. 4. 30.
설태수 시인 / 칼날 고요 설태수 시인 / 칼날 고요 ‘군더더기 없는 음악이 나올 수 있도록 장애물들 거듭 쳐내면서 연주해가는 모습이 수행자 같아요.’ 뻗어나가는 나뭇가지들도 허공을 헤치면서 갈 길 만들어 나간다. 뒤뚱뒤뚱 걸음마 배우는 아기가 또 그렇게 공간을 확보해 나간다. 음과 음 사이는 그러나 칼날 고요 찰나라 해도 거치지 않을 수 없는 간극. 하여 공간의 상처들은 적막이 핥아주고 있으니. 어릴 적 산골에서 놀다가 다친 곳은 찧은 쑥이 아물게 하였지. 한 시간 넘게 피아노와 결투하던 그가 무아에서 풀려나고 있었다. 청중은 침묵에서 돌아오기 시작했다. 갈기갈기 찢어지면서도 숨죽이던 허공이 마침내 한숨 돌리지 않을까. 가슴 저 아래서 울컥, 하는 것은 뭘까. ㅡ『미네르바』 2022 가을호 설태수(薛太洙) 시인 1954년 경남 .. 2023. 4. 30.
신정민 시인(전주) / 확보 외 3편 제17회 지리산문학상 수상작품 신정민 시인(전주) / 확보 고라니가 지나갔다 진흙은 발자국의 깊이를 가늠하고 있었고 나는 깨진 체온계의 수은이 구슬처럼 굴러다니던 아침을 따라다니고 있었다 주워 담을 수 없게 된 날이었다 혹, 고라니의 발자국을 지워버린 곳곳의 웅덩이가 사라진 숲의 홀로그램이라면 그날 아침 숲에서 사라진 건 고라니인가 알 수 없는 슬픔인가 그날 그 숲의 흔적이 숲의 체온이라면 숲은 어떤 속도로 회복되는가 흙탕물이 가라앉는다 늪에 던져진 돌멩이를 잠시 피했다 모여드는 개구리밥처럼 그러니까 이미 지나가 버린 고라니의 발자국은 알 수 없는 이곳과 저곳 사이에서 나타나는 간섭무늬 그래서 고라니는 비가 내린 숲 여기저기 발자국을 남겼던 것 밟힌 풀들이 일어서는 그만큼의 발자국 아직도 고라니인가 생각.. 2023. 4. 30.
김화순 시인 / 토렴 김화순 시인 / 토렴 펄펄 끓어 입천장 데었다면 어떻게 너를 온전히 느낄 수 있었을까 토렴한 순댓국밥 후루룩 마시면 내 안의 쓴맛 단맛 오롯이 살아온다 자극에 찌든 혀끝 살살 깨우며 오래전 놓쳐 버린 시간이 서서히 살아온다 맞잡았던 손바닥에 온기가 퍼지고 목구멍에 걸려 있던 피로가 꿀떡 넘어간다 구수함이 살아난다 왁자한 시장통이 살아난다 뜨거움에 가려진 감칠맛이 확, 살아난다 오래된 그때가 모락모락 살아난다 내 목소리만 들어도 눈물진 얼룩까지 찬찬히 읽어 내는 너와 나는 토렴한 사이 수굿하게 서로의 어깨를 토닥이며 천천히 살아가는, 만날수록 뼈 속까지 우러나 진국이 되어 가는, 어미고래가 새끼를 톡톡 치며 물 위로 올려 숨구멍을 열어 주듯 ㅡ『시작』, 2022년 가을호 김화순 시인 서울에서 출생. 고려대.. 2023. 4. 30.
김경철 시인 / 천 개의 고원 외 1편 김경철 시인 / 천 개의 고원 심장에 닿기 위해 내 안의 말은 사방팔방 몇십 리, 몇천 킬로미터라도 상관없다는 듯 내달려간다 히말라야 산하에서 내려다본 무수한 하천 너머 푸른 대지를 녹이는 한낮의 햇살처럼 작고 따사로운 풀잎에게 눈인사하는 내 안의 말은, 산양의 피를 마시는 저 저녁의 목책까지 훌쩍 뛰어넘어 간다 동음이의어로 가득한 일상의 목울음까지 내 안의 말은 새롭게 되새김질한다 산과 바다를 향해 절벽이 끌어안는 포말까지, 버티고 서서 우는 내 안의 말은 잠시 말울음으로 흩어진 갈매기 떼를 정렬시키고 다시 비상한다 내 안의 말은 심장 너머를 본다 천 개의 고원, 천 개의 하천이 모이는 이 바다에서 내 안의 말은 말갈기로 이글거리는 태양을 본다 내 안의 고동이 저기 저 천 개의 고원까지 둥둥둥 울려 퍼.. 2023. 4. 30.
문덕수 시인 / 시는 어디로 외 2편 문덕수 시인 / 시는 어디로 시는 어디로 갔나 앞에서는 높은 빌딩들이 줄줄이 막아서고 뒤에선 인터넷의 바다가 출렁이고 머리 위를 번개처럼 가로지르는 핵탄두 미사일 인도의 새끼코끼리 귀만한 광화문 네거리 플라타너스 새 잎사귀에 머물었나 백화점 에스컬레이터 3층 완구점에서 내려 파란 스웨덴 인형의 눈알 속에 숨었나 핸드폰 뚜껑 속 번호의 유령 리모컨으로 조종하면 스크린에 알록달록 빈 그림자들이 뜬다 시는 어디로 갔나 서울역 앞 지하에서 너끈히 사흘을 굶은 풋내기 노숙자들의 체중에 휴지로 밟혔나 문덕수 시인 / 내 침실 신발 밑바닥을 털지 않아도 신장은 투덜대지 않는다 낡은 TV만이 한 대 오롯이 앉은 거실의 벽시계 밑을 탈 없이 지나서 내가 없는 내 방을 들어간다 아무도 말리지 않는다 천장은 어제 그대로의 .. 2023. 4. 30.
박주하 시인 / 홍어탕 박주하 시인 / 홍어탕 열흘 곪은 잇몸을 모시고 치과에 가던 날 이쪽저쪽 부푼 농을 헤집고 터트려 입안 가득 고인 피를 뱉는 순간 사는 게 참 고단하다 싶었다 고작 잇몸 하나 허물어졌을 뿐인데 세상 풍파에 시달린 심장 냄새를 맡다니 어디 허름한 홍어집 구석에 앉아서 잘 삭은 애탕 한 그릇 먹고 싶단 생각이 얼얼하고도 간절했다 누구 돌아볼 심사도 버리고 밥 한 덩이 말아 넣고 천천히 홍어 애를 으깨고 싶었다 이빨도 잇몸도 필요 없는 물컹한 것 후후, 불어 넘기면서 무르고 헐거워진 몸뚱어리 혼자 뜨겁게 달래보고 싶었다 ㅡ『문학청춘』 2022년 겨울호 박주하 시인 1967년 경남 합천에서 출생. 숭의여대 문예창작과 졸업. 1996년 《불교문예》로 등단. 시집으로 『항생제를 먹은 오후』와 『숨은 연못』 『없는 .. 2023. 4. 30.
[말씀묵상] 부활 제4주일·성소 주일 [말씀묵상] 부활 제4주일·성소 주일 아름다워라! 복음의 증인 제1독서 사도 2,14.36-41 / 제2독서 1베드 2,20-25 복음 요한 10,1-10 가톨릭신문 2023-04-30 [제3341호, 19면] 힘에 벅찬 난제 가득했던 요한 사도 악조건도 주님 사랑으로 헤쳐 나가 부활하신 예수님 향한 경외심으로 하느님 뜻과 은혜의 신비 체험하길 베른하르트 플록홀스트 ‘착한 목자’. 요즈음 요한 사도에게 마음이 쏠려 지냅니다. ‘생전 처음’ 요한복음이 예수님의 제자 요한이 기록한 믿음인의 회고록처럼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일에 평생을 바친 노인, 요한 사도가 젊은 날 예수님과 지낸 일들을 추억하며 기쁘고 아프고 놀랍고 또한 쓰라렸던 순간에 담겼던 의미를 다시, 또한 새삼 깨달으며 적어내린 고백록이라 .. 2023. 4. 30.
박종영 시인(해남) / 바람의 여행 외 1편 박종영 시인(해남) / 바람의 여행 바람이 구름을 타고 여행을 가네 강남갈 채비하는 제비속살 건드리며 가고 벼이삭 더 여물 들게 부딪히며 흐르고 코스모스 가는허리 건드려 어린 소녀 눈물나게 하고 흘릴 눈물 남아있는 여인의 고운 얼굴 어루만지다 가고 가난한 아이들의 발가락을 다독거리며 울기도 하고 내 설움 구름에 싣고 둥둥 떠나기도 하네. 박종영 시인(해남) / 겨울 산수유 오랜 침묵으로 잎 진 가지들이 낮은 석양에 오돌오돌 사무친다 찬란했던 노란 웃음도 지금은 붉은 꽃으로 시들고, 찬바람은 외길 하나 만들어 놓고 흘러가라 타이른다 메마른 산수유 한 개를 딴다, 움쑥 떨어지는 붉은 살 자국, 저건 오욕으로 더럽힌 세상 씻어내는 눈물인가? 그 눈물 누군가 하늘에 뿌렸나, 오늘은 첫눈이 오네, 질박했던 봄의 .. 2023. 4.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