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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숙 시인(상주) / 백련 외 2편 김현숙 시인(상주) / 백련 얼핏 들떠 보이나요 하긴 무릎에 늘 물살을 얹고 살아가야 하니까요 이리저리 밀리지 않고는 여린 몸을 버티는 정신의 등(燈) 하나 달아맬 수 있나요 달처럼 맘껏 구름을 차내며 환해지고 싶죠 그나마 한 해 사흘은 휜다면서요 저절로 불이 들어와 무명(無明)의 몸 밖으로 빠져 나올 그때거든요 한 번만이라도 회산 방죽으로나오세요 대명천지를 더 밝히는 불빛이 물에서 뭍으로 오르죠 칠월에서 구월까지 길은 이어지는데 길 다 두고 남 따라 포개어 걷는 연잎의 짙푸른 어둠 몇 길 물밑 허공을 밟고 선 꽃의 찬 이마 그 어디쯤 덜컥 오욕 칠정의 붉은 고뇌도 갇혀 있어요 무심한 듯 바람이 밀고 가죠 흰 빛을 멀리 갈수록 맑디맑게 개이는…… 김현숙 시인(상주) / 새 어린 풀들 사이를 거닐다 나뭇가.. 2023. 4. 28.
이희원 시인 / 깃털 외 2편 이희원 시인 / 깃털 저기 하늘을 놓친 깃털이 있다 족쇄 채워진 새의 일부가 있다 내가 지상으로 내려온 지는 수억 년이 넘었다 내가 이렇게 묶인 지도 한 1만 년은 되었다 나는 처음부터 말의 노예가 아니었다 내가 보고 온 하늘과 태양을 노래하고 싶었다 나를 먹물 속에 담그거나 언제부터인가 내 몸에 먹물을 집어넣고는 내 몸에서 말즙을 짜내기 시작했다 어떤 기록은 왜곡의 산실産室이다 내 깃가지를 비틀어도 나는 그런 말을 토해낸 적이 없다 내 거처는 저 텅 빈 하늘이다 애초부터 나는 정착을 모른다 결국 나는 처음부터 새다 1만 개의 깃털을 핥아 가지를 곧추세운다 한때 만년필이었던, 말이었던, 깃털이 백지 위에서 다시 비상을 준비하고 있다 왜곡은 왜곡일 뿐이다 -시집 『코끼리 무덤』에서 이희원 시인 / 한 수유.. 2023. 4. 28.
양애경 시인 / 기쁜 전화 외 2편 양애경 시인 / 기쁜 전화 ​ ​ 김종철문학상 수상자가 되었다고 전화가 왔다 아버지 직장 놓으시고 가장이 되었던 그해 나는 스물여섯 살 중학교 퇴근하고 지하상가 가서 엄마가 꾸린 작은 옷가게에서 대걸레로 바닥을 닦고 걸레를 빨고 돌아오던 밤 하늘에 스치는 별똥별에 소원을 빌었다 신춘문예에 당선되게 해 달라고 그리고 중앙일보에서 온 당선 전화를 받았었다 다시 40년 후에 막 심사가 끝났다고 온 전화 전혀 상상도 못 했던 소식 소중한 엄마는 요양원에서 휠체어에 앉아 바닥으로 기울어지고 계실 텐데 나는 누구에게 이 기쁜 소식을 전할까 다시 눈물이 난다 누르기만 하면 물이 줄줄 새는 요즘 힘내서 조금 더 살아보라고 멀리서 글 쓰며 살아왔던 분들이 전화를 했다 양애경 시인 / 교차로에서 잠깐 멈추다 ​ ​ 우리가.. 2023. 4. 28.
최순섭 시인 / 말똥 외 3편 최순섭 시인 / 말똥 한참을 찾아다녔다. 골동품이 되어버린 보기 드문 말똥 한적한 아스팔트 길 위에서 말라 죽어가는 것을 보았다 그걸 아버지께 드렸다 요강 위에 앉아 하혈 자리 말똥 연기를 쐬면 고통이 죄 사라진다며 어기적어기적 아기걸음 걸으셨다 말똥말똥 훈제가 되신 아버지 푸른 연기 타고 날아가셨다. 최순섭 시인 / 들국화 밥상 우리 집엔 들국화 꽃잎 닮은 밥상 하나 있지요 도란도란 일곱 식구 둘러 앉아 저녁 밥 먹던 일곱 개의 수저가 일곱 개의 꽃술이 되어 향기 내뿜던 들국화 밥상 언제부턴가 여섯 식구만 앉아서 밥을 먹다가 네 식구만, 두 식구만 앉아서 밥을 먹다가 지금은 어둑한 한 사람만 먼 산을 보며 수저를 드는 이제 그만 시들어서 내일이면 아무도 앉아 있지 않을 서늘한 들국화 밥상 최순섭 시인 .. 2023. 4. 28.
송미선 시인 / 캐스터네츠 외 2편 송미선 시인 / 캐스터네츠 아프면 이걸 치세요 간호사가 캐스터네츠를 들이민다 더는 참을 수 없을 때 신호를 보내라고 엄지와 검지를 벌려 왼손에 쥐여준다 치과 의자가 스르륵 젖히고 반 박자 느리게 내가 따라 눕는다 의자는 내 기분 따위에는 아랑곳없다 수술 등 불빛이 부시어 감은 눈 위로 드릴 소리가 내려앉는 듯하다 꽁꽁 언 손끝으로 캐스터네츠를 튕겨보지만 연습인 줄 아는지 소리가 나지 않는다 좀 더 힘을 주어 튕겨봐도 죽을힘을 다해 견디는 밤새 다듬고 갈아냈던 몇 마디도 안 되는 문장을 물고 있던 나는 얼굴 가리개를 덮은 채 새벽을 끌어당긴다 말줄임표를 즐겨 쓰던 무책임한 손끝으로 어둠의 촉수를 건드리면 캐스터네츠가 나를 대신해 문장을 삼킨다 종이컵으로 입안을 여러 번 헹궈내도 목젖에 걸려있는 말줄임표 송.. 2023. 4. 28.
김현숙 시인(뿌리) / 수덕여관 외 1편 김현숙 시인(뿌리) / 수덕여관 흰 구름이 둥둥 떠도는 수덕사 푸른 하늘 아래 세월을 비껴가지 못하고 남아 있는 초가 한 채 선명한 목판 간판엔 수덕여관이라 새겨 있네 그 누가 와서 묵고 갔을까 여승이 사는 이 산속에 지나가는 나그네가 창호지에 남긴 달그림자는 풍채 좋은 선비였거나 짚신에 괴나리봇짐 지고 온 애송이 같은 과객인지도 모른다 고래 등 같은 사찰마다 곱게 단장한 처마의 단청이 수덕사 여승의 아미보다 어여쁠까만 속세를 등진 모진 불심은 절간을 가득 채우고도 남는다 잠시 머물다간 수덕여관 마당에 오늘은 또 누가 오시려는 지 개울 옆 커다란 나뭇가지에서 까치 한 마리가 깍깍 울고 있다. 김현숙 시인(뿌리) / 왜목마을에서 누가 다녀갔을까 이 넓은 모래밭에 수없이 남기고간 발자국 파도에 씻긴 발자국은.. 2023. 4. 28.
정수경 시인(보성) / 불면 외 1편 정수경 시인(보성) / 불면 밤이 빛을 전가하여 새벽은 오고 아가리는 탄력적이고 집요해서 빛만큼 강했다 배가 부르면 뱀처럼 스르르 공간을 빠져나간다 간혹 볼록해진 배가 골목 모서리에 걸려 터지기도 했는데 그럴 땐 야광 파편처럼 사연들이 쏟아져 내렸고 그걸 알아차린 것은 개와 시인이었다 개는 청각으로 그걸 받아 적었다 아주 또렷하게 멍멍멍, 시인은 개 짖는 소리에 리듬을 잃기도 했는데 그래도 필사적으로 기억하려 노력했다 필사적이라는 말은 눈꺼풀의 일 개는 간혹 토끼잠을 자다가도 새벽의 꼬리를 앞발로 지그시 눌러 밤을 지연시켰다 그래도 시인은 잠을 이루지 못했고 뜬눈으로 빛의 죽음을 목격하고도 받아 적지 못한 건 개 때문이라고 기분을 전가한 일이 다반사였다 -계간 『다층』 2022년 봄호 정수경 시인(보성).. 2023. 4. 28.
박형권 시인 / 은행나무 외 2편 박형권 시인 / 은행나무 사람 안 들기 시작한 방에 낙엽이 수북하다 나는 밥할 줄 모르고,낙엽 한 줌 쥐어주면 햄버그 한 개 주는 세상은 왜 오지 않나 낙엽 한 닢 잘 말려서 그녀에게 보내면 없는 나에게 시집도 온다는데 낙엽 주고 밥 달라고 하면 왜 뺨맞나 낙엽 쓸어 담아 은행 가서 낙엽통장 만들어 달라 해야겠다 내년에는 이자가 붙어 눈도 펑 펑 내리겠지 그러니까 젠장 이 깔깔한 돈 세상에는 처음부터 기웃거리지도 말아야 하는 것이었다 아직도 낙엽 주워 핸드백에 넣는 네 손 참 곱다 밥 사먹어라 박형권 시인 / 우물 귀뚜라미는 나에게 가을밤을 읽어주는데 나는 귀뚜라미에게 아무것도 해준 것이 없다 언제 한번 귀뚜라미 초대하여 발 뻗고 눕게 하고 귀뚜라미를 찬미한 시인들의 시를 읽어주고 싶다 오늘 밤에는 귀뚜.. 2023. 4. 28.
[더 쉬운 사회교리 해설] 215. 복음과 사회교리 [더 쉬운 사회교리 해설-세상의 빛] 215. 복음과 사회교리 (「간추린 사회교리」 49항) 평화를 위해 헌신해야 하는 그리스도인 가톨릭신문 2023-04-30 [제3341호, 18면] 야드 바솀 홀로코스트 기념관. 독일군 고위 장교이면서 수많은 유다인을 구한 빌헬름 호젠펠트가 의인으로 등록돼 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부여받은 권위로써 말합니다. 모든 폭력의 생각을 떨쳐야 합니다. 갈등과 돌이킬 수 없는 행동을 자아내는 활동, 결정, 증오의 연쇄반응을 일으키는 비극을 생각하십시오. 여러분은 파괴가 아니라 건설을, 분열이 아니라 일치를, 눈물이 아니라 고용과 안전을 제공할 수 있는 큰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성 요한 23세 교황, 1961년 주님 성탄 대축일 담화문) ■ 홀로코스트, 인류의 상.. 2023. 4. 28.
이경 시인 / 선물 외 2편 이경 시인 / 선물 선생님께 드리려고 꺾어온 고운 꽃 받쳐 들고 살펴보니 티가 있어 못 올리고 오늘 아침 이슬 먹은 오랑캐꽃을 떠다가 백자 대접에 소담하게 앉혔더니 반나절을 못 넘기고 머리를 수그리네 구룡산 천의약수터 새벽 물을 길어다 사제의 고마움 담아 올리려 해도 사발 속 물 위에는 내 얼굴에 묻은 땟자국만 보입니다 -시집 『소와 뻐꾹새소리와 엄지발가락』에서 이경 시인 / 흑백 화공은 검은 먹으로 흰 꽃을 그리네 국화 한 떨기를 화선지 위에 피워 올렸으나 정작 꽃잎에는 먹물 한 점 묻지 않았네 꽃은 본래 거기 있었다는 듯 태연자약 젖은 머리카락이라도 말리듯 목을 젖히고 있네 흰 종이 위에 흰 꽃을 증명하려면 그늘의 깊이를 건드릴수록 환하게 드러나는 꽃 먹은 검은 뼈를 갈아 흰 붓을 씻네 -시집 『열 .. 2023. 4. 28.
[더 쉬운 믿을교리 해설] 214. 여섯째 계명④ [더 쉬운 믿을교리 해설-아는 만큼 보인다] 214. 여섯째 계명④ (「가톨릭교회 교리서」 2360~2400항) 혼인의 궁극적 목적은 하느님 삼위일체 사랑에 참여하는 것 가톨릭신문 2023-04-23 [제3340호, 18면] 디에고 벨라스케스 ‘천상 화관을 받고 있는 동정녀 마리아’. 교리서는 부부관계를 삼위일체 하느님 사랑의 본성을 닮아가는 과정으로 표현하고 있다. 심순덕 시인의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라는 시는 매우 감동적입니다. 어렸을 때는 어머니니까 저렇게 고생을 해도 아무렇지 않게 여겼었는데, 시인도 어머니가 되어 보니 ‘엄마는 그러면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라고 깨닫게 되었다는 내용입니다. 부모가 되어 보아야 부모 마음을 안다는 말과 같습니다. 부부 관계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교리.. 2023. 4. 27.
신혜정 시인 / 마음의 집 외 1편 신혜정 시인 / 마음의 집 먼 곳에서 안부가 도착합니다 사방이 막힌 이곳은 그러나 투명합니다 당신의 안부는 조명처럼 너무 환해 잠깐 눈을 감습니다 동공이 수축되기를 기다리며 시간이 조금 흐릅니다 눈앞에는 모두 뾰족하고 날카로운 것들 그것들은 반짝입니다 쇼윈도에 걸린 마네킹처럼 나를 전시하고 있습니다 오랜만에 그리운 이의 번호를 눌렀는데 없는 번호라고 나올 때의 배신감처럼 닿는 자리마다 녹아 없어지는 그러나 이곳은 투명합니다 투명해서 미칠 지경입니다 바람에 얼음 알갱이들 실려옵니다 어쩌면 비로소 당도한 모래의 말일지도 모릅니다 잘 지내십니까? 몰래 썼던 일기장을 나는 아직 간직하고 있습니다 사방이 막힌 이곳에서 내 일기는 잘 전시되고 있습니다 시리고 투명하던 마음 닿은 자리마다 녹아내리던 당신의 안부가 켜.. 2023. 4.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