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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규미 시인 / 분홍무릎 외 2편 권규미 시인 / 분홍무릎 육십 몇 년 만에 아니 삼십 육억 년 만에 드디어 나는 한 적소에 당도 했네 한 때는 달의 모서리에 찍힌 손톱자국이었고 가시나무 가지를 맴도는 묽은 새소리였고 이리저리 굴러다니는 남루한 조각햇살이었고 깊디깊은 우울을 품은 바람의 멍든 발자국이기도 했지만 사각거리는 고요의 손바닥 위 나비처럼 가벼운 무릎과 무릎들의 시간 그 앞에 나는 말랑말랑 즐거운 나무 한 그루였다 시시비비의 무늬가 마알간 수틀속처럼 눈부시게 찰랑거리는 뜨거운 오후였다 어떤 시간의 마디에는 굴렁쇠처럼 구르는 은빛 시작이 있다고 했던가 손톱이 까만 이방의 소년도 기우뚱 분홍 무릎을 꿇는 늙은 낙타도 물과 바람과 빛의 풍화속에 묵묵히 발을 담그고 지금 막 한 계절을 지나는 중이어서 ................. 내.. 2023. 4. 29.
조혜경 시인 / 전깃줄과 까마귀 외 1편 조혜경 시인 / 전깃줄과 까마귀 까마귀들이 앉아있다 바닷속 미역처럼 할머니가 돌을 던져 쫓아내던 까마귀 잊지 않고 다시 찾아와 전깃줄 축 늘어지도록 일렬로 주욱 쫓아내던 악령(惡靈)처럼 질긴 고무줄처럼 조혜경 시인 / 책 종아리 가는 아이가 뛰어갔다 맨드라미 속에 빨갛게 담뱃불이 폈다 하루종일 비가 내려 장화는 집에서 놀았다 심장을 꺼냈다 넣었다 금요일이 왔다 영화관 앞에서 오천 원을 줍던 사람이 잘생겨보였다 분홍색 시집이 발간되던 날 까만 가수가 다녀갔다 뉴욕이야기를 쓰고 싶어 베를린 행 티켓을 샀다 뉴욕이야기를 태워 난로를 피운다 베를린에서 까만 가수가 노래한다 핑크핑크 지우개 오천원어치 영화를 본다 여자가 의자 위에 올라 목에 끈을 아이들이 찌그러진 공을 찬다 비가 내려 비를 맞자 우리는 맨드라미 .. 2023. 4. 29.
[더 쉬운 믿을교리 해설] 215. 일곱째 계명① [더 쉬운 믿을교리 해설-아는 만큼 보인다] 215. 일곱째 계명① (「가톨릭교회 교리서」 2401~2418항) 도둑이 되지 않으려면 집사가 되어야! 가톨릭신문 2023-04-30 [제3341호, 18면] 램브란트 ‘약은 집사의 비유’. 우리의 모든 것은 본래 하느님의 것이기 때문에 “불의한 재물”이다. 십계명의 일곱째는 “도둑질해서는 안 된다”라는 계명입니다. 교회는 재물에 관하여 태초부터 ‘인류의 공동 관리’(2402)로 맡기셨다고 가르칩니다. 그렇다면 교회에서는 사유재산이 인정되지 않는 것일까요? 교회도 ‘사유재산에 대한 권리’(2404)를 인정합니다. 사유재산이 존중되지 않으면 도둑질도 정당화될 수 있습니다. 남의 것을 상대의 의사를 거슬러 ‘자기 것’으로 삼는 일이 도둑질입니다.(2408 참조).. 2023. 4. 29.
김락 시인 / 멸 외 2편 김락 시인 / 멸 공중제비를 넘는 소년이 등받이 없는 작은 의자를 짚고 공중으로 사라진 시간 나는 너를 위해 아코디언을 연주해 나무의 곡선에서 새어나오는 푸른 비명을 들어봐 어린 아카시아에서는 숨 막히는 열기 숲의 기침을 들을 것, 흙의 눈동자들이 떠오르네 악기의 마지막 진동은 날아 불타는 구름으로 머리 위 떠다니는 안개의 갈라진 등으로 성당의 녹색 지붕에 매달린 울음으로 땅 속에 누운 너는 누구의 하얀 발톱을 쓰다듬는가 너의 이름을 훔쳐간 야생고양이 저항의 흰 팔을 자른 보병 개구리의 노란 눈을 가진 견고한 영혼들 공중에서 검은 우산들이 눈물처럼 내려와서 나는 너를 위해 아코디언을 연주해 적어도 너에게는 잊히지 않기를 지금 폭발하는 이 숲이 김락 시인 / 홍대 앞에서 로리타의 시간을 사세요 시급을 받은.. 2023. 4. 29.
최광임 시인 / 이름 뒤에 숨은 것들 외 2편 최광임 시인 / 이름 뒤에 숨은 것들 그러니까 너와의 만남에는 목적이 없었다 그러므로 헤어짐에도 이유가 없다 우리는 오래 전 떠나온 이승의 유목민 오던 길 가던 길로 그냥 가면 된다. 그래야만 비로소 너와 나 들꽃이 되는 것이다 달이 부푼 가을 들판을 가로질러 가면 구절초밭 꽃잎들 제 스스로 삭이는 밤은 또 얼마나 깊은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서로 묻지 않으며, 다만 그곳에 났으므로 그곳에 있을 뿐 가벼운 짐은 먼 길을 간다 내가 한 계절 끝머리에 핀 꽃이었다면 너 또한 그 모퉁이 핀 꽃이었거늘 그러므로 제목 없음은 다행 한 일이다 사람만이 제목을 붙이고 제목을 쓰고, 죽음 직전까지 제목 안에서 필사적이다 꽃은 달이 기우는 이유를 묻지 않고 달은 꽃이 지는 뜻을 헤아리지 않는다. 만약 인간의 제목들.. 2023. 4. 29.
이진옥 시인 / 도망자 외 2편 이진옥 시인 / 도망자 칼을 가는 동안, 케이크가 배달되었고 잘린 너의 살 지독한 맛이네, 벼린 칼이 달콤함을 갉아먹고 쓴맛만 남아 케이크라 이름 붙이기 민망하나 달리 부를 수도 없는 모순의 몸뚱이 벼린 칼은 그녀의 뱃속에서 달콤하게 꿈틀거리고 버스를 타고 가다 오른쪽 앞 유리의 균열을 보았다 질주하는 상처, 도시를 베고 다니는 충만한 증오 마주 볼 수 없어 비스듬히 곁눈질하다 한 근, 두 근, 서걱, 서걱, 심장이 베어지는 소리 들었다 살아 있으려면 호기심은 금물이다 이름을 발설하지 말아야 한다 얼마나 아프냐 묻지 않아야 한다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고 순례의 길은 진지하게 매번 다른 장소에서 출발, 죽은 쥐를 물고 어슬렁거리는 고양이 순례의 길은 진지하게 매번 같은 장소에 도달, 꿈틀거리는 지렁이를 물고.. 2023. 4. 29.
김루비 시인 / 두물머리 외 2편 김루비 시인 / 두물머리 서 있는 느티나무를 깃발로 흔들며 강물은 흘러갑니다 하나의 강과 또 하나의 강이 머리를 맞대고 큰 강을 이루는 두물머리 쓰라린 강바람에 홀로이 버티다가 얼어버린 조각배 그 곁에서 따사로운 손길 부여잡고 그대 따라 물길처럼 흐르고 싶은 내게도 그런 한 때가 있었습니다 가끔 물풀 속에서 얼굴 내미는 잉어의 눈망울은 나를 빤히 보고는 무심히 지나갔고요 그대 눈동자가 느티나무 그림자를 반영하듯 눈물 한 방울 보탠 강은 꾸역꾸역 하구로 아무렇지도 않게 흘러갑니다 숨결 고르고 연어가 고향을 찾듯 거슬러 오르는 당신의 몸짓은 언제쯤 보게 될까요 걸어둔 깃발이 낡아 찢겨도 더 오래 당신을 기다리며 서성이겠습니다 김루비 시인 / 정박 안개비 자욱한 날의 바다는 젖은 여자의 머리카락이다 뱃머리 들.. 2023. 4. 29.
이근화 시인 / 소울 메이트 외 3편 이근화 시인 / 소울 메이트 우리는 이 세계가 좋아서 골목에 서서 비를 맞는다 젖을 줄 알면서 옷을 다 챙겨 입고 지상으로 떨어지면서 잃어버렸던 비의 기억을 되돌려주기 위해 흠뻑 젖을 때까지 흰 장르가 될 때까지 비의 감정을 배운다 단지 이 세계가 좋아서 비의 기억으로 골목이 넘치고 비의 나쁜 기억으로 발이 퉁퉁 붙는다 외투를 입고 구두끈을 고쳐 맨다 우리는 우리가 좋을 세계에서 흠뻑 젖을 수 있는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골목에 서서 비의 냄새를 훔친다 이근화 시인 / 도서관에 갔어요 도서관에 갔어요 걸어서 갔어요 첫째 날은 이별을 고하는 한 남자를 만났습니다 꿈의 허연 입술을 가지고 돌아왔습니다 둘째 날의 도서관은 조금 추웠습니다 쓰레기통에 처박힌 낡은 스웨터를 다시 꺼내들었어요 멀쩡한 여자가 책과.. 2023. 4. 29.
강은진 시인 / 무생물 도감 외 2편 강은진 시인 / 무생물 도감 당신은 네모난 공중에 나를 그려놓았는데 나는 벽지에 그려진 구름처럼 아무 소용이 없다 뭉개지는 얼굴에 스며드는 무표정 생물과 무생물 사이에는 가끔 곤혹이 있고 언젠가의 기분을 되살리려 애쓰면서 우리는 점점 과거로 변해간다 당신은 입술을 굳게 다문 나를 그려놓았지만 어쩌면 그것은 무생물의 고요 언제부터였을까 잠 속에서 꿈을 꾸고 꿈속에서 자는 것 지금 꾸는 꿈이 꿈인지 잠인지 알 수 없는 것 꿈에서 본 것이 당신이었는지 당신이 그린 나였는지 왜 구름 벽지에서 빗물이 뚝뚝 떨어지는지 도무지 알 수 없는 것 오랫동안 원형감옥이라고 믿고 있었던 그림에 포도나무 가지의 일부를 횡단면으로 절단한 다음 중간 아래쪽을 반으로 쪼갠 것* 이라는 제목이 아주 조그맣게 붙어 있는 것을 발견한 날.. 2023. 4. 29.
류현승 시인 / 촉촉한 생활 박물관 외 3편 류현승 시인 / 촉촉한 생활 박물관 케플러 망원경으로 지구를 들여다 보면 ㄷ자로 쪼그려 앉아 노래하는 대류가 뒷마당에 나다니는 바람이 된 이유가 보이고 정열이 밀려 나가고 냉랭한 기운이 차올라 자리가 비어 선으로 채운 음영 텃밭 아이는 깻잎, 애호박, 토마토, 오이를 따고 있다 먹구름을 털고 있다 삶은 채소 같은 사람은 손바닥 틈틈 손가락 사이로 남는 여유 면을 휘어 비오는 날 버덩에 물을 채운다 만성피로 비타민을 먹자 메가도스100mg 더, 더, 더, 조금만 더 우울해 c, c, c 비타민 c를 먹자 물을 꽉 채운 TV 속에는 물 속으로 나는 가마우지 목을 졸라 목에 끈을 묶어 삼키지 못한 생선을 뺏는 노인을 보다 방아깨비처럼 쇼파 흔들, 흔들리다 스파, 아스파, 쇼파 영통구 청명남로 족발집 딸은 시 .. 2023. 4. 29.
송기원 시인 / 들판에서 외 2편 송기원 시인 / 들판에서 ​ 그토록 찾아 헤매던 그대의 소식을 가을 들판에서 비로소 들었습니다. 멀리 벌판의 끝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단내를 풍기며 그대 소식을 전해주었습니다. 벌판 가득히 오지게 잘 여문 이삭들과 그 이삭을 거머쥔 농부의 구릿빛 팔뚝이 또 그대의 소식을 전해주었습니다. 저무는 가을 햇빛, 군데군데 비어 있는 논밭, 여기저기 자랑스럽게 피어 있는 가을꽃들도 빛나는 몸짓으로 그대 소식을 전해주었습니다. 십 년을 넘어, 헛된 땅으로 헛되이 찾아 헤매다 이제는 빈 쭉정이가 되어 가을 벌판에 나자빠져버린 나를 안쓰러워하며, 어루달래며 오늘 비로소 그대 소식을 전해주었습니다. 둘러보는 벌판 가득히 온통 그대뿐인데 어째서 나는 그토록 눈멀 수 있었을까요. 돌아오는 길에는 우연이듯 싱싱한 별도 몇 개 .. 2023. 4. 29.
김하늘 시인 / ​고전적 잉여 외 1편 김하늘 시인 / ​고전적 잉여 ​ 아이스크림, 돌고래, 기도 내가 좋아하는 거야 지옥은 쓸쓸하다는데, 연한 잎처럼 새살이 돋을 때 이마에 얹힌 무능한 손과 영영 죽지 않을 속살이 있다면 순교자처럼, 오로지 네 힘으로만 걸어갈 수 있을까 ​ 여름이 끝나는 동안 원치 않는 사람들의 죽음이 있었고 다시 돌아오지 않을 하늘에게 나는 고백하기로 했어 서로가 서로를 몰라서 죄짓지 말자고, 단순한 섹스 스캔들이라고, 이번 생은 역시 NG에 지나지 않다는 걸 ​ 이것이 의아한 세계인 것이다 ​ 네가 있는 배경에 날 그려 놓고 꼴불견 광대처럼 얼굴에 색칠하고 웃었지 곱고 예쁘다는 얘기는 질리더라 맹세하는 게 좋아, 열정적으로 삶을 사랑하지 않겠다고 어쩌라고, 난 나쁜 계집앤데 굿 걸, 이라는 소리는 좀 그만해 울지 않을.. 2023. 4. 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