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49215 최보슬 시인 / High 최보슬 시인 / High 트럼플린을 뛴다 무언가 들춰질 사람처럼 활기찬 심장을 내세우고 심판의 문턱이라도 넘을 것처럼 잠깐 나 좀 보실래요? 세계가 발밑에서 나를 놓쳐요 아니, 그것보다 내가 너무 많아 창피했어요 이렇게 드러난 것이 많은데 나는 나의 손을 잡고 흔들리는 정면들만 움켜쥐었다 새벽에도 트럼플린을 뛴다 이렇게 하면 우리의 영혼을 떨어뜨릴까? 만질 수 없는 것은 이토록 다 운명적일까 영혼은 한 자리에 있지 못해서 나는 그냥 트럼플린을 뛴다 신에게 닿으려는 의도는 아니고 좋은 공기를 마시면 어딘가 좋아질 거라는 말을 들었지만 악몽들은 내게서 다시 생기를 얻고 이것은 끔찍한 적선이야 뒤바뀐 얼굴을 갖는 일이지 그렇다면 잠깐 나 좀 봐 주실래요? 나는 내일의 나에게서 유실되어요 분명해 나는 나를 통해.. 2023. 5. 2. 서정임 시인 / 황홀한 폐허 외 1편 서정임 시인 / 황홀한 폐허 치명이다 슈퍼 푸드가 주는 달콤함에 빠져 파헤쳐버린 열대우림 호모 사피엔스의 돌이킬 수 없는 멸망이다 평형기능이 무너졌다 나도 모르게 나의 세계가 또 다른 세계를 무너뜨린다 내가 뻗어나간다 뿌리에 뿌리를 내리고 영역을 넓혀간다 매머드나 왕아르마딜로 같은 거대 동물이 사라진 자리에 맞이한 멸종을 간신히 벗어난 내가 새롭게 맞이한 세계 나를 위해 땅을 파헤쳐놓는다 빽빽이 들어찬 나무를 제거하고 야생동물을 제거한다 단숨에 베어버리거나 뽑거나 불을 지르는 그 야만에 울려 퍼지는 비명들 기우뚱 세계가 기울어진다 내가 제공하는 열매를 더 많이 원하는 사람들 높고 크게 자라는 나의 세계에 환호성을 지르는 사람들 점점 더 비대해져 가는 나는 물을 최대한으로 끌어들인다 나의 흡수에 다른 나무.. 2023. 5. 2. 이신율리 시인 / 모운동募雲洞 이신율리 시인 / 모운동募雲洞 기울어진 곳에 구름을 채운다 붉어지는 쪽으로 벼랑은 자란다 삭도가 길을 찢을 때마다 하늘에 그림자가 지천이다 머물 수 없는 사람들이 더는 늙을 수 없어 구름을 만드는 모운동募雲洞 별을 캐는 바다를 끌어올리고 감자 꽃은 달빛이 피우는 거라고 믿었던 사람들이 카나리아를 따라 탄광 안으로 들어갔다 새카만 개가 빳빳한 지폐를 물고 섰다 눈에 불을 켜고 극장과 우체국을 부른다 편지를 부치던 얼굴도 벽화 속으로 들어온다 축제가 시작되고 필름이 느리게 돌아간다 옥수수 발 사이로 기차가 온다 양귀비꽃 붉던 자리에 산국향이 나는 별을 꿀꺽 삼키고 새벽에 기차는 온다 거울 속 너머에서 잃어버린 얼굴이 나를 보고 있다 닫힌 갱도에서 겹겹이 구름을 열고 영화를 보고 화전을 굽던 사람들이 걸어 나.. 2023. 5. 1. 심창만 시인 / 길 외 2편 심창만 시인 / 길 지렁이 한 마리가 비 그친 직지사 극락교를 건너간다 한쪽 발을 시멘트 바닥에 고정시키고 나머지 한쪽 발을 오래오래 절 밖으로 들어올린다 그 사이로 해와 달이 지나가고 진입로가 서너 번 굽었다 펴진다 더럽고 먼 길, 내려놓을 수도 떠내려 보낼 수도 없는 다리 위 길 하나가 허공에 철사처럼 구부러져 녹슨다 심창만 시인 / 침묵의 지평선 태양이 게워내고 심연이 돌아누울 때 내 등을 토닥여준 텅 빈 그대여 심창만 시인 / 베트남제 오리털 점퍼 이 옷은 헐었다 나를 입고도 떨고 있다 임실 버스 터미널 구석에 한 여자도 떨고 있다 나와 같은 격자무늬 점퍼를 입고 가로로 세로로 여기까지 떠내려 와 같은 위도에 무릎을 웅크리고 있다 월남치마를 입던 오래 전 누이처럼 그녀의 무릎이 얇고 낯익어 가만가.. 2023. 5. 1. 김진희 시인(시조) / 견고한 잠 외 3편 김진희 시인(시조) / 견고한 잠 면사무소 휘휘 돌아 납작한 외딴섬에 열여섯에 시집와서 칠십년 산 큰어머니 구십 도 꺾인 허리를 땅속에서 펴신다 그날 그 후, 아래채도 무릎 꺾여 쓰러졌다 탄알이 후둑후둑 쏟아지는 한밤중에 한숨도 못 잔 담벽이 포격에 무너졌다 몸보다 허한 마음 서둘러 찾아가는 내 안의 정류장에 기다리는 사람 없어 빛바랜 가족사지만 소리없이 웃을 뿐 빈집에는 그늘처럼 적막이 쉬고 있다 눈을 뜨다 감았다 꽃잎이 피고 지고 낭자한 풀벌레 소리 파도처럼 일렁인다 김진희 시인(시조) / 무화과 1. 무얼까 이 두근거림은 그가 건넨 하늘 한 량 서투른 첫사랑이 꽃 피우지 못할 예감 속에서 활활 타는 듯 불덩이가 보인다 2. 애써 삼킨 못 다한 말 그 말에 목숨 걸고 탱탱이 버팅기다 뭉개지고 허물어진.. 2023. 5. 1. 문신 시인 / 독작 獨酌 외 1편 문신 시인 / 독작 獨酌 두 홉짜리 소주병을 땄다 병과 잔 사이는 한 치가 못 되었다 그 사이에 삼라만상의 근심이 깊었다 주섬거리지 않고 탁, 털어 넣었다 안주는 오래 물색하였다 달이 떴고 밤새 소리도 펼쳐 있었다 강물의 물비늘 두어 장을 쭉 찢었다 질겅거렸다 두 홉짜리 소주병이 비었다 강물의 수위가 한 치쯤 낮아져 있었다 노을에서 시작하였으나 어느덧 여명이었다 내내 독작이었다 문신 시인 / 누가 아프다는 이야기를 듣는 저녁 누가 아프다는 이야기를 듣는 저녁이다 공단 지대를 경유해 온 시내버스 천장에서 눈시울빛 전등이 켜지는 저녁이다 손바닥마다 어스름으로 물든 사람들의 고개가 비스듬해지는 저녁이다 다시, 누가 아프다는 이야기를 듣는 저녁이다 저녁에 듣는 누가 아프다는 이야기는 착하게 살기에는 너무 피로한.. 2023. 5. 1. 최명길 시인 / 초연히 홀로 외 1편 최명길 시인 / 초연히 홀로 설악산 구름밭에 올라앉은 용아장성 바위처럼 초연하게 홀로 볼 수 있는 것 조금 남겨둔 채 들을 수 있는 것 조금 버려둔 채 그저 초연히 홀로 이름 안 알려졌지만 냄새 맡을 수 있는 것 조금 남겨둔 채 맛 볼 수 있는 것 조금 할 일도 조금은 남겨둔 채 초연히 홀로 밤하늘 별들 중 너무 반짝이는 건 말고 너무 흐린 것도 말고 황소자리 한쪽 구석에서 눈에 뜨이는 듯 만 듯 잠깐 그렇게 초연히 홀로 속상한 것 모두 드러내지는 말고 잠시 눈 흘기는 것만으로 기분 나빠하지는 말게 낮게 그저 시는 말도 모두 다 뱉어내지는 말고 최명길 시인 / 돌거북이가 물어다 준 시 대해에는 거북이가 살고 있었습니다. 하도나 커 등짝이 꼭 섬 같았습 니다. 하루는 금은보화를 잔뜩 실은 해적선이 이 섬에.. 2023. 5. 1. 김진희 시인(여주) / 낮은음자리표 외 1편 김진희 시인(여주) / 낮은음자리표 마른 젖꼭지를 단 어미개가 거리를 배회하고 있다 저 마른 젖꼭지 한때는 탱탱하게 불어 거침없이 흔들거렸으리라 먹여 살려라 어미여 자식을 위해 버텨주어라 큰소리로 울지도 못하고 낮게 낮게 속울음만 삼키던 울음 젖을 채우려 허겁지겁 목구멍으로 우겨넣었던 생계 이제는 까맣게 말라버린 젖꼭지로 바닥을 향하고 있다 신이 되지 못해서 죽는 날까지 용서를 빌어야하는 어미의 생 자식 가진 어미는 끝내 하늘을 바라보지 못했다 -시집 『상처에 대응하는 방식』 2015. 문학의전당 김진희 시인(여주) / 건초 어제는 늦가을을 지나왔다 사람이 그리운 날의 허기처럼 안개가 마른 가지를 둘둘 말고 있다 소식을 어디다 떨구고 갔는지 새는 엽서 한 장 보내지 않는다 마른 몸으로 견디는 일만 남아 .. 2023. 5. 1. [정규한 신부와 함께하는 기도] (32·끝) 연재를 마치며 [정규한 신부와 함께하는 기도 따라하기] (32·끝) 연재를 마치며 가톨릭신문 2023-04-30 [제3341호, 15면] 기도의 목표는 하느님과의 일치이며, 이 일치를 위해서는 하느님의 뜻을 알아야 합니다. 하느님의 뜻을 알기 위해 우선적으로 해야 할 것은 하느님 현존을 체험하는 일입니다. 이를 위해서 지금까지 ‘기도 따라하기’에서 30주에 걸쳐 숙고하기(묵상과 관상)를 연습해왔고, 느낌이 오면 그 느낌에 머무르는 연습을 해왔습니다. 이 훈련 후에는 어느 느낌이든 머무르는 기도의 양이 많아져야 하며 ‘느낌의 다양성’(자신, 선한 영, 악한 영) 체험을 통해 다양한 영들을 체험하게 됩니다. 즉 자신으로부터 오는 것은 정화해야 하고, 악으로부터 오는 것은 물리쳐야 하며,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것에 머물러야 .. 2023. 5. 1. 이소연 시인 / 백색소음 이소연 시인 / 백색소음 주방을 옮기지 못하고 나는 그릇을 골라냈다 그릇은 흩어지기 위해 모여있다 그릇은 깨어지기 위해 모여있다 그릇이 쌓여 나보다 오래 가정을 지킨다 그토록 많은 그릇이 깨져도 멸종되지 않는 오목한 세계 품을 수 있는 세계에 종말이란 없다는 듯 포개진 그릇들의 둥근 바닥마다 인간에게서 빼앗은 목줄을 감추고 있다 꽃이 있는 그릇을 가져다주렴 나무가 있는 큰 접시를 새가 있는 작은 종지를 그럴 마음은 없었는데 마음이 생긴다 그릇이 나를 골라낸다 하지를 지나는 감자처럼 그릇이 내게 마음을 들킨다 6월은 5월보다 할 일이 많아 아침저녁으로 물방울이 창에 맺혔다 당신은 장마가 온 걸 알아채지 못했다 옆집 개가 화장실 벽을 긁는다 그릇을 버렸다 따뜻한 스튜처럼 떠먹기 좋은 마음들 골라내는 일에는 .. 2023. 5. 1. 배창환 시인 / 꽃 외 1편 배창환 시인 / 꽃 너의 고운 흔들림 앞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수식어를 붙이고 싶다 바람 한 점 없어도 흔들리고 바람 아무리 불어도 꺾이지 않는 너의 그윽한 입술 위에 세상에서 가장 따스한 햇살 한 올 포개주고 싶다 새벽보다 일찍 열리고 늦은 저녁보다 오래 남아 빛나는 흔들리면서 흔들리지 않고 어둠 속에서도 그 빛 잃지 않는 잠깐이면서 끝없이 목숨 이어갈 너의 뜨거운 이마 위에 세상에서 가장 서늘한 별빛 하나 얹어주고 싶다 그 오랜 낮밤을 건너, 오늘 이리도 귀한 반짝임으로 내 앞에 마주 선 배창환 시인 / 아버지의 추억 우리 집 짓는데 일꾼 중에 꼭 지금의 내 나이만 한 아버지를 닮은 분이 있다 나보다 훨씬 늙으신, 얼굴이 검게 그은 사진 속의 아버지처럼 담 그늘에 앉아 담배도 뻑뻑 피우시고 막걸리.. 2023. 5. 1. 김진희 시인(교수) / 바람이 분다 외 1편 김진희 시인(교수) / 바람이 분다 바람이 분다 골목은 쓰라리다 바람처럼 사람들이 스쳐간다 어둔 거리 숱한 얼굴들 이름 없이 사라진다 바쁘게 사라지는 그들의 등뒤 그림자만 남는다 그림자들 모여 안개가 핀다 안개에 갇힌 절규 소리를 잃는다 두절된 소리의 유배지 교신을 위한 주파수가 범람한다 너도 나도 돌리는 채널의 잡음 속 모두의 사연들 무산된다 아무도 응답하지 않는다 매몰된 비명을 암장하고 은폐된 골목은 더욱 쓰리다 오늘따라 바람이 거세다 김진희 시인(교수) / 폭우의 음모 비가 내렸어 도시 위에 건물들이 젖고 젖은 길 위를 달리는 차도 젖고 젖은 차 유리창에 머리를 기댄 사람들도 젖고 젖은 사람들의 발목이 젖고 젖은 발목들이 건물로 뛰어들었어 비는 언제나 밖에서만 내리지 오늘 사막에 때아닌 폭우가 내렸.. 2023. 5. 1. 이전 1 ··· 25 26 27 28 29 30 31 ··· 410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