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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관련>/◆ 신 앙 관 련

그리스도교 영성사 - 아일랜드의 수도원

by 파스칼바이런 2010. 3. 27.

 

그리스도교 영성사 - 아일랜드의 수도원

 

 

독실한 가톨릭 국가인 아일랜드는 위에서 언급한 두 성인 빠드리씨오와 골룸바노에 의해 꽃피우고 열매 맺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다분히 수도원 중심의 영성이 교회 분위기를 좌우하였다.

성 빠뜨리씨오는 프랑스에서 뚜르의 성 마르띠노가 세운 수도원과 러랭의 수도원에서 교육을 받았고 성 골룸바노도 아일랜드 수사들을 프랑스로 데리고 가서 수도원에서 교육을 받게 하였다.

귀족의 자제들은 당연히 수도원에서 교육을 받았다.

수사들은 노동에도 힘썼지만 그들 중에는 문학과 철학에 뛰어난 이들도 있었다.

 

이 시대에 아일랜드의 가장 큰 특징은 수도생활을 갈망하는 사람들이 많았다는 점이다.

이는 결과적으로 아일랜드 교회를 발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많은 젊은이들이 세상의 삶과 토지를 버리고 수도생활을 하기 위해 참회의 삶을 택하였다.

여자 수도자들과 여자 부제들도 교회 안에서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수도원들은 외딴 곳이나 이교인들의 마을이 있던 곳에 세워졌다.

 

어떤 이들은 외부인들과 접촉을 피하려고 섬이나 육지의 낭떠러지에 수도원을 지어 침입자들을 막을 수 있는 요새처럼 만들기도 하였다.

 

수도원의 고행은 고독 속에서 관상생활을 하기 위한 규칙으로 인도한다는 까씨아노의 가르침이 무조건 수용되었다.

6세기 말부터 많은 수도자들은 한 때 은수자의 삶을 도입하기도 하고 계절적인 은둔생활을 하기도 하였다.

즉 여름이 시작되면 해안 근처 외딴 바위 위에서 관상생활에 힘쓰다가 겨울이 되면 수도원으로 돌아갔다.

이는 '완전한 수도자'가 되는 한 방법으로 여겨졌다.

 

중세기 아일랜드의 수도생활은 일종의 참회의 삶이었다.

뉘우침과 보속의 방법으로 행해진 참회는 더 중요한 실천인 고해(告解)를 요구하였다.

그것은 성사의 형태를 띠었으나 동방에서, 특히 은수자들과 수행자들로부터 전해진 것으로서 아일랜드 수도원에서는 공동 수행의 실천으로 받아들여져 행해졌다.

 

수도원에서 행해지던 이런 수행 방법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전후하여 사라졌으나 옛날부터 대부분의 수도원에서 행해진 수행이었다.

'어느 수녀의 이야기'(우리말로는 '파계'로 번역되었다)라는 영화에서 공동체의 수녀들이 한 자리에 모여 무릎을 꿇고 공동체 앞에서 잘못을 고백하는 모습이 바로 이런 것이다.

개별적인 사적 고백은 통상적으로 죽기 전에 행해졌으나 특별히 미사 전에 신심적 고해라고 하여 고해신부나 영성 지도신부에게 뉘우친 죄를 고해하는 전통이 생겨났다.

그리하여 이와 병행하여 예외적으로 참회록이 생겨나게 되었다.

참회록이란 죄의 목록과 이에 상응하는 적절한 벌칙을 정해놓은 책을 말하는데 여러 개가 있었다.

참회록의 저자들은 인간이 하느님과 정상적인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법적인 보상을 해야 한다는 정신을 심어주려고 하였다.

 

예를 들면 이러하다.

악은 멀리함으로써 치유되고 대식가는 단식을 해야 하며 말이 많은 사람은 침묵을 지키도록 권고하는 것 등이었다.

그리고 고해신부는 식별력이 뛰어나야 하고 고해자들에게 뉘우치도록 권고해야 하며 적절한 훈시와 벌을 주어야 했다.

세월이 지남에 따라 참회록은 많이 사라졌으나 남아있는 것들은 서양 사람들의 양심 형성에 기여했다고 보여 진다.

그 영향력은 대단하여 영국과 유럽 여러 나라에서 사용되었다.

그리하여 14세기에는 아이슬란드에서, 15세기에는 스페인에서, 16세기에는 이탈리아의 북부에서까지 사용될 정도였다.

 

'엄격한 참회방법' 최고의 신심

 

아일랜드에서 시작된 사적 고해 방식은 전체적으로 보아 교회 안에서 영적 성장에 크게 기여하였다.

회개를 통하여 하느님과의 관계가 정상적으로 이루어지고 용서하시는 하느님께 대한 사상이 두루 퍼져나갔던 것이다.

이리하여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를 친숙하게 하려는 방법들이 생겨났으니 사적 미사와 대사(大赦) 그리고 영혼의 구원을 위하여 자발적으로 실천하는 참회 등의 신심이 일어났다.

다른 사람이 받아야 할 벌을 대신할 수 있다는 사상이 대사로 발전하여 8세기부터는 죽은 이들을 위한 전대사가 생겨났다.

이러한 사상이 계기가 되어 수도원에서는 이런 신심을 널리 전하였다.

 

아일랜드 수도원들의 엄격한 참회 방법은 최고의 신심이라고 볼 수 있다.

이리하여 엄격한 규칙들이 생겨났다. 하지만 엄격한 규칙의 준수와 분별력, 겸손, 순종의 덕목들이 논란거리가 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수행의 한 형태인 단식은 사순절 내에 엄격히 지켜졌다.

그들은 사순절을 셋으로 나누어 지켰는데, 겨울에는 엘리야의 사순시기, 봄에는 예수님의 사순시기, 여름에는 모세의 사순시기가 그것이다.

그리하여 어떤 이들은 물 외에는 아무것도 먹지 않았고 육체노동이 강조되었다.

 

참회 다음으로 하느님께 봉사하는 신심은 순례였다.

위대한 성인들은 자주 이렇게 말하곤 하였다.

"우리가 하는 순례는 주님의 이름을 위하여 하는 것이다".

또한 그들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영혼 구원을 위하여", "하늘 나라를 얻기 위하여"라는 표현을 즐겨 사용하였다.

여행은 즐거울 수도 있으나 수행의 목적으로 하는 여행은 많은 어려움과 위험을 동반한다.

어려움을 감내하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가족과의 단절을 목적으로 하는 여행은 순례였고 그것은 극기와 포기의 한 방법이었다.

다른 어느 민족보다도 가족간의 결속이 강한 아일랜드인들에게 있어서 가족을 떠난다는 것은 큰 희생이었다.

그러나 떠나고 포기함으로써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관대함을 보일 수 있었다.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삶으로 이해되었고 이를 통해서 아일랜드 교회는 영적으로 크게 성장할 수 있었다.

 

수도자들의 영성에 있어서 기도와 성서 봉독은 빼놓을 수 없는 필수적인 것이다.

그 수도자들이 행한 주 업무 중의 하나는 성서를 읽고 해설하며 필사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늘 그것들을 지니고 다니면서 읽었고 이를 통해서 관상하는 기도를 익혀나갔다.

그들이 하던 기도 중에 제일 으뜸가는 것은 미사였다.

미사는 언제나 준비와 의식으로써 성대하게 거행되었다.

수도원에서는 주일과 축일 그리고 수사들의 장례 때에 거행되었다.

신자들이 너무 많이 몰려와 수용할 수 없는 성당들도 있었다.

영성체가 강조되었고 이를 위하여 고해성사도 강조되었다.

미사는 자주 제물 봉헌으로 이해되었다.

또한 그들은 라틴어로 된 시편으로 기도하였고 켈틱어로 해설을 첨부하였다.

 

수도자들은 까씨아노의 가르침에 따라 엎드려서 기도하기도 하였다.

성 골룸바노는 하느님의 뜻을 알고 그것을 수행하는 방법을 공부(studium)라고 하였다.

그것은 구체적으로 위대하신 하느님과 인간의 비참함을 알고 그것을 묵상하는 것이었다.

성인의 생애를 기록한 저자는 "그는 성서를 어깨에 메고 다니면서 스스로 논쟁하였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만큼 그는 성서를 자주 읽고 성찰하며 살았던 것이다.

이러한 신심들은 아일랜드가 튼튼한 가톨릭 국가로 성장하는 데 크게 기여한 것들이다.

 

전달수 신부(교황청립 로마 한인신학원장)]

 


 

축일 11월 23일 성 골룸바노(Columb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