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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실리오 회칙(會則) 영어 The Rule of St. Basil
성 바실리오(St. Basilius)가 폰투스(Pontus)에 있는 자기가 세운 수도원에서 사용하기 위해 쓴 수도계율로, 문답체(問答體)로 되어 있다. 이것은 55조(條)로 된 ‘대계율’(大戒律)과 313조로 된 ‘소계율’로 이루어져 있고, 주로 덕(德)과 악덕을 논하고, 수도정신, 순종, 청빈, 세속을 가르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이 계율은 법규적(法規的)인 것이 아니고, 바실리오 수도원에서 현재 영위하고 있는 생활양식을 보충하는 것이며, 수도생활의 구체적 조직의 여러 문제에는 언급하지 않고, 수도자의 영적(靈的) 도야에 대한 이상(理想)의 확립이 주안점(主眼點)이다. 계율의 텍스트에는 성서의 말씀이 많이 사용되고 있다. 이 계율은 동방(東方)의 수도생활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면서 그리스, 트라키아, 시리아, 팔레스티나, 남이탈리아에 유포,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동방교회에서의 계율 중의 주류(主流)가 되고 있다.
(가톨릭대사전에서)
바실리오는 330년 카파도치아 지방체사레아의 그리스도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학문과 덕행에서 특출했던 그는 은둔 생활을 시작했고 370년 체사레아의 주교로 임명되었다. 아리우스 이단들과 투쟁했다. 훌륭한 저서들 특히 수도 규칙을 썼는데 오늘날까지 동방 교회의 많은 수도자들이 이수도 규칙을 따르고 있다. 가난한 이들을 돕는 데 뛰어났다. 379년 1월1일 세상을 떠났다.
그의 할머니는 마끄리나(맏이), 그의 부친은 바실리오(맏이),그의 모친은 에멜리아, 그의 큰 누이는 마끄리나, 그리고 두 동생은 나싸의 그레고리오(축일:3월9일)와 세바스테아의 베드로인데, 모두가 성인품에 오른 분들이다. 그는 체사레아, 콘스탄티노블 그리고 아테네의 학교에서 교육받았으며, 이곳에서 나지안제의 성 그레고리오와 깊은 우정을 맺었다.
카파도치아의 세 광채: 성 대 바실리오, 니사의 성 그레고리오(축일:3월9일) 및 나지안조의 성 그레고리오
357년경에, 그는 동방의 주요 수도원들을 방문하였으며, 그 후부터 폰투스의 이리스 강 지역의 안네시에서 은수자로서 정착하였다. 바실리오는 불과 5년 동안을 그의 공동체와 함께 생활했을 뿐인데도, 동방 수도생활의 아버지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그는 성 베네딕또와는 달리 법 제정가는 아니었지만, 그의 영향은 정교회 수도생활에 깊은 흔적을 남겼고, 주요한 원리로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사제로 서품된 후, 성 바실리오는 365년부터 체사레아 교구를 위하여 일했고, 370년에 그곳의 주교로 선임되었다. 그는 또 아리우스파 황제인 발렌스가 정통 크리스챤들을 박해할 때 용감히 맞서 싸웠고, 이 때문에 그는 지방 총독 앞에 끌려가서 자신을 변명해야 하였다. 바실리오의 태도가 너무나 당당하였기 때문에 총독은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고 한다. "아마도 당신 같은 주교는 일찍이 본적이 없다"고 했다는 것이다. 이런 대화를 보더라도, 그의 성품을 짐작할 수 있으며, 그의 강직성 때문에 교황 성 다마소와 서방 교회 간의 관계에는 어려움이 많았다.
그는 병자와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는데 매우 적극적이었고, 요양원을 짓거나 혹은 대대적으로 진료사업을 펼쳤으며, 설교가로도 명성을 얻었다. 그는 아리우스파와의 투쟁을 계속하면서 동방 정교회의 지도자가 되었다. 그는 발렌시 황제가 전투에서 사망한 지 불과 한 달 만에 체사레아에서 1월1일에 사망하였다. 바실리오는 초대 교회의 큰 거인이었다. 비쟌틴 제국에서 아리우스파를 몰아낸 것이나 콘스탄티노블 공의회에서 아리우스파를 단죄한 배경에는 바실리오의 영향력이 대단히 컸었음을 증명하고도 남는다.
그가 폰투스에서 제정한 규칙과 조직이 동방 수도생활의 기초가 되었고, 현재까지도 그 전통이 이어져 온다. 또한 바실리오는 성직 매매를 완강히 거절하였으며, 가뭄과 한발의 희생자를 대대적으로 원조하였으며, 보다 훌륭한 성직자 양성을 도모하였고, 엄격한 성직자 법규를 주장하고, 과감하게 악습을 끊어버리면서, 카파도치아에서 만연된 매춘행위 관계자들을 파문하였다.
그는 유식하고 정치력도 있는 사람이면서도, 성덕이 뛰어났으며, 그리스도교회의 가장 위대한 설교가 중의 한 사람으로 손꼽힌다. 그의 박학한 저서들과 4백 여 통의 편지들은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성령에 관한 저서와 에우노미우스를 반박하는 세 권의 저서 그리고 그레고리오 나지안젠과 함께 편집한 필로깔리아가 그중에서도 유명하다. 그는 교회의 박사이며 동방 수도자의 아버지로 큰 공경을 받는다.
(성바오로수도회홈에서)
이러한 사람들은 교부(敎父)라고 칭하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분들 중의 한 분은 성 바실리오 대주교이다.
그는 330년 소아시아의 카파도치아주의 수도 체사레아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족은 실로 복을 받은 사람들로 교회의 역사상 가장 뛰어난 가문 중의 하나이다. 아버지 바실리오와 어머니 에밀리아도 성인이고, 조부는 순교자, 조모 마크리나는 신앙으로 인해 추방된 성녀, 누님 마크리나도 성녀이고, 두 동생 즉 니사의 주교 그레고리오와 세바스테아의 주교 베드로 성인, 이러한 식으로 마치 성인, 성녀만으로 이루어진 가정과 같았다, 그러한 가정의 한 사람이었으므로 바실리오도 어려서부터 선량한 감화를 받고 경건하게 자랐는데, 수사학(修辭學)을 가르치던 아버지에게서는 주로 일반학문을 배웠고, 종교의 지식은 거의 조모 마크리나에게 배웠다. 이 성스로운 조모의 훌륭한 모범과 교훈은 그의 어린 마음에 깊은 인상을 심어 주어 그 후 일생 동안 잊은 때가 없었다고 한다.
바실리오는 고향의 학교를 졸업한 후 수도 콘스탄티노플에 올라가 유명한 학자 리바니오에게 수사학 등을 배우고 다시 그 당시 학문의 서울이라 불리우던 그리스의 수도 아테네에 유학했다. 후에 나지안조의 주교 성 그레고리오를 알게 되어 친분을 맺고 서로 격려하며 학문을 배우려는 학생들이 다투어 가며 그의 산하에 모여들게 되어 그의 명성은 삽시간에 부근 일대에 퍼졌다. 그런데 누님인 마크리나는 바실리오가 현세의 명예 같은 것에 빠져 인생의 참된 목적을 망각하지나 않을까 염려하고 자신이 하느님께 자신을 봉헌하기 전에 그에게도 수도자가 될 것을 열심히 권유했기 때문에 바실리오는 그 지성에 감동되어 아직 받지 않았던 세례도 받고 또, 수도연구를 위해 이집트의 데바이스 광야로 은수자들을 방문하고 그들의 지도를 따르면서 같이 성스러운 생활을 했다.
이런 귀중한 체험에 의해 수도의 신성함을 깨달은 바실리오는 돌아가서 고국에도 은수자의 생활을 소개, 장려해 보려고 하던 차에 의외로 그의 부재중에, 어머니와 누님이 여자 수도원을 세우고 부인들을 모아 기도와 고행의 생활을 시작하고 있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바실리오도 그 수도원과 개울 하나 사이에 둔 곳에 남자 수도원을 세워 이곳저곳에 살고 있던 은수자들을 모으고 재산은 빈민에게 희사하고 예전에 데바이스의 수사들에게 배운 수도 생활을 하기로 하고 형제들을 위해 영적 지도서를 쓰기도 하고 회칙을 편찬하기도 했다. 이 모임은 지금도 그리스 교회에 유명한 바실리오 수도원의 시초이며, 그들의 목적하는 바는 자신의 수덕 외에 다른 사람들의 영혼 구원을 도모하는데 있었고, 그 수단으로서 수도원 부속학교를 설치해 아동 교육을 담당하고 병원 등을 열어 사회사업에 공헌했던 것이다.
당시의 체사레아 대주교 디아네오는 아리우스파로 기울어 졌다고 소문이 난 자로 평생 바실리오하고는 교제도 안했었는데, 임종시에는 그를 초대해 니체아 신경에 의한 가톨릭 신앙을 선언하고, 바실리오의 깊은 위로 중에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그의 후계자 에우세비오는 그를 사제로 서품하고 체사레아에 머물게 하도록 했으나, 바실리오의 수도 생활에 대한 동경은 억제할 수 없어 사퇴하고 본 수도원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바렌스 황제가 아리우스파의 이단에 기울어져 가톨릭의 세력을 말살시키려고 체사레아에 자기파의 주교를 임명했다는 소식을 듣자 바실리오는 그냥 있을 수 없어 다시 그곳으로 가서 붓과 혀로 그리스도료를 옹호 했으므로 도시(都市)의 신자들도 이단에 빠지지 않고 무사했다. 바실리오가 시민을 위해 진력한 것은 그것뿐이 아니다. 이듬해 대흉년이 들었을 때에 가난한 자의 구제에도 눈물겨운 활동을 했다. 그리하여 그가 체사레아 시의 사람들에게 아버지와 같이 존경을 받고 370년 그 곳의 대주교의 서거 후 일반 교우에게서 그 후임이 되어 주기를 열망 받은 것도 결코 신기한 일이 아니다.
총독 모데스토로 하여금 그에게 권고케 했다. 그러나 그러한 유혹에 걸려 진리를 떠날 바실리오가 아니었다. 한마디에 거절당한 총독은 "그렇다면 어쩔 수 없이 재산의 몰수나, 매질이나, 귀양이나, 사형이나 그중의 하나는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고 위협했지만, 대주교는 조금도 안색을 변하지 않고 "그러한 것이라면 추호도 무서울 것 없습니다. 나는 수도자이므로 몰수당할만한 재산도 없고, 고행에 익숙 되었기 때문에 매질도 그다지 어려울 것 없고 참된 고향은 천국 외에 없으므로 어디로 귀양 보내도 별 문제점이 없고 사형에 처한다면 즉각 천국에 갈 수 있으므로 도리어 그것을 원하는 바입니다.."라고 태연히 대답했다. 이에 총독 역시 어쩔 줄을 몰라 "바실리오의 신앙의 견고함에는 어떻게 할 수 없습니다."라고 보고했으므로 황제도 그 용기와 인내에 감탄하고 친히 그를 만나 벌을 주기는커녕 그의 자선 사업의 보조로 체사레아 부근의 별장지까지 하사했다. 그래서 바실리오는 곧 그 땅에 병원, 고아원, 양로원 등을 세워 한층 더 자선 사업에 노력했다. 이곳은 그 후 큰 읍내처럼 되어 사람들에게 바실리아스라고 불리우게 되었다.
아리우스파 교도들은 이를 못마땅히 생각한 나머지 자꾸 황제에게 그에 대해 무고했으므로 드디어 황제도 이에 기울어져 그를 유배에 처하려고 그 영장에 서명하려 하자 세 번이나 펜이 부러지고 게다가 그 밤부터 황태자가 갑자기 몹시 앓아 위독하게 되었다. 황후는 마음이 불안해져 "이것은 죄도 없는 바실리오를 귀양 보낸 천벌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라고 부르짖어, 그를 귀양 가는 도중에서 다시 불러들여 태자를 위해 기도를 청했던 바 그 처럼 위독하던 병도 깨끗하게 씻은듯이 완치되었으므로 황제도 결국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그를 귀양에서 면하게 해 주었다.
바실리오는 호교에, 사목(司牧)에, 저작에 눈부신 활약을 했는데 무엇보다도 가난한 이들의 구제를 낙으로 삼고 말년에는 당신 거처를 바실리아스라 칭하는 자선소 내에 두기에 이르렀다. 그는 이처럼 많은 사목을 하던 중에 병을 얻어 1379년 1월 1일, 60세를 일기로 고요히 잠들었다.
(대구대교구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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