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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관련>/◆ 축일 & 성인

축일 3월23일(3월22일,9월14일,9월15일) 제노아의 성녀 가타리나

by 파스칼바이런 2011. 10. 27.

축일 3월23일(3월22일,9월14일,9월15일)

제노아의 성녀 가타리나

St. CATHERINE of Genoa

Santa Caterina Fieschi Adorno da Genova Vedova

 

 

제노아의 귀족 가문의 자녀인 가타리넷따('작은 가타리나"라는 뜻) 피에시는 1447년 태어났다. 13세에 수도원에 들어가기를 희망했으나 너무 어려서 거절당했다.

16세에 젊은 귀족 줄리앙 아도르노와 형식적인 결혼을 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그녀는 때때로 성녀 가타리나 피에시 아도르노라고 불리운다.

남편은 바람기가 많고 성미가 급한데다 불성실했다.

가타리넷따에게 이것은 굉장한 시련이었다.

한동안 이러한 실망들을 여러 가지 오락의 소용돌이 속에 가라앉게 하려고 하면서도 그녀는 하느님께 굳은 신뢰심을 두었고 신앙생활을 포기하지 않았다.

 

1473년 어느날 수녀가 된 여동생을 만나러 수도원을 방문하고 그곳에서 고백성사를 보았는데, 이 고백성사가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다.

슬픔과 절망 속에 있던 그녀는 하느님을 향하게 되었고, 주님은 그녀의 영혼을 축량할 길 없는 은총으로 가득 채워서, 자신의 죄를 생생하게 깨닫게 해주시고 그녀의 마음을 천사적 사랑으로 불타오르게 하셨다.

매일 성체성사를 영하기 시작했고, 남은 여생도 계속 그렇게 하였다.

참으로 열렬한 신앙생활에 몰입하였다.

개심을 한 뒤 남편을 변화시켰고,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에게 헌신하였다.

 

그러나 그동안 남편의 낭비가 심한 생활로 인해 로멜리니에 있는 궁전같은 집을 처분하여, 그들은 제노아에서 가장 큰 자선시설인 파마토네에 거주하게 되었다.

그후로 그들은 수사와 수녀처럼 지내면서, 가타리나와 남편은 자선사업에 완전히 자신들을 봉헌하였다.

1490년 가타리나는 병원의 여성병동을 돌보는 사람이 되어 죽을 때 까지 21년 동안 이 일에 종사하였다.

 

1497년 남편이 죽은 후에 무서운 흑사병이 4년 동안 제노아에 퍼져 인구 5분의 4의 생명을 앗아갔다. 가타리나는 밤이나 낮이나 환자들에게 영웅적으로 헌신하였다.

동시에 참회예절과 신앙생활도 꾸준히 하였다.

빈번히 탈혼에 빠졌으며, 바쁘게 일에 종사하고 있을 때라도 마음은 천상적인 것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녀는 실용성과 또 다른 세상을 완벽하게 연결하는 놀라운 태도로 일에 임하였다.

 

연옥에 관한 훌륭한 논문과 '영혼과 육체의 대화'라는 훌륭한 저서도 남겼다.

로마 성청은 이 작품들만으로도 그녀의 참된 거룩함에 대한 충분한 증거가 된다고 선언하였다.

 

가타리나는 "연옥은 비록 견디기 어려운 고통들 중 어느 하나도 감소되는 곳은 아닐지라도, 기쁨이 없는 곳이 아니라 오히려 기쁨으로 가득한 곳"이라고 지적하였다.

가타니나는 대녀 토마시나 베르나자에게 작별을 고하며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토마시나, 네 마음에 예수님이 계시기를! 네 마음에 영원함이 있기를!

너의 모든 행동에 하느님의 뜻이 함께 하시기를! 그러나 무엇보다도 사랑, 하느님의 사랑, 흠없는 사랑이 함께 하시기를!"

그것은 또한 그녀 자신의 삶의 모토이기도 하였다.

 

참으로 신비스럽고 불가사의한 병, 곧 하느님 사랑의 불길이 가타리나의 마지막 9년간 삶과 함께 하였다. 1510년 8월 어느 날 저녁, 별들이 뱇나는 하늘을 바라볼 수 있도록 창문을 열어달라고 부탁하였다. 수많은 촛불이 밝혀지고 죽어가는 청순한 이 연인은 '오서서 창조주 성신이여'를 노래 불렸다. 그녀는 소리쳤다.

"가자, 더 이상 이 땅에서 더 이상 이 땅에서..." 2주일 후인 9월15일, 십자가 현양축일에 사망하였다. 교황 클레멘스 12세는 1737년 그녀를 시성하였다.

(평화의 사도, 한국재속프란치스코회 50주년 기념집에서)

 


 

야고보 피에쉬와 프란치스카 디 네그로의 딸인 성녀 카타리나(Catharina, 또는 가타리나)는 이탈리아의 제노바에서 태어났는데, 5명의 자녀 가운데 막내딸이었다.

그녀는 어릴 때부터 수도생활에 남다른 관심을 보였지만, 그녀의 부친이 사망하자 16세의 나이로 줄리아노 아도르노란 사람과 결혼하게 되었다.

그녀의 남편은 성마르고 방탕하였으며 아내에게 불성실하였다.

반면에 그녀는 민감하고 신중하였으며, 거의 유머가 없었으나 그렇다고 매몰스런 여인은 아니었다. 불행하였던 이 결혼은 10년이 지나면서부터 남편의 방탕으로 인하여 극도의 가난에 빠지게 되었다.

 

이때부터 그녀의 남편은 자신의 생활을 개선하게 되어 프란치스코 3회원이 되었으며, 함께 회개 생활을 하기로 약속하였다.

처음에 그들은 팜메토네 병원에서 일하였는데, 특히 카타리나는 아주 뛰어난 영성생활로 다른 이들의 주목을 끌기 시작하였고, 1479년에는 아예 그 병원에서 생활하였으며, 1490년에는 원장이 되었다. 이때 그녀는 흑사병으로 거의 사경을 헤매었으나, 기적적으로 회복하자 자신의 직분을 사임하였다. 그 후 1년 뒤에 남편이 죽었다.

 

이때 그녀는 자신의 영적 지도자가 된 카타네오 마라보토를 만났다.

그녀는 수많은 신비 체험을 하였으며, 악화된 병으로 인하여 한없는 고통을 받았다.

그러나 그녀의 신심은 비범하였다.

 

그녀는 세속에 있으면서 천상적인 사물을 관상하는 뛰어난 명상가였으며, 그녀가 가장 두려워한 것은 ‘악으로 서서히 물드는 세상의 오염’이었고, 인간을 하느님에게서 떼어놓는 마귀의 간계였다고 한다.

“영혼과 육신의 대화”, “영혼론”은 신비신학 분야에서 유명한 저서가 되었다.

이 책들이 1934년에 영국에서 간행된 바 있다.

(가톨릭홈에서 www.catholic.or.kr)

 


 

Catherine of Genoa :

Purgation and Purgatory, the Spiritual Dialogue

by Serge Hughes (Editor)

 

 

3월19일(9월15일?) 제노아의 카타리나 성녀 (3회)

St. CATHERINE of Genoa

 

카타리나는 1447년 제노아의 귀족 피에치 집안에서 태어났다. 매우 신심이 깊었던 그녀는 겨우 13세에 수도생활에 강하게 끌렸으나 나이가 어려서 허락을 얻지 못했다. 16세 때 자신의 뜻과는 반대로 변덕스러운 젊은 귀족 율리아노 아도르노와 결혼하게 되었다.

덕이 없는 남편은 신심 깊은 어린 아내에게 결혼생활을 고문과 같이 만들었다.

쾌락을 찾아다니고 화를 잘 내는 그는 카타리나를 집안에 홀로 남겨두는 시간이 대부분이었다. 이러한 생활은 그녀에게 참기 힘든 짐이었다. 그래서 몇 년 동안 그녀는 이러한 실망을 쾌락의 소용돌이에 휩쓸려 묻어버리려 했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지켰으며 신앙생활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어느 날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그녀에게 나타났다. 이 환시의 인상이 너무나 강하여 카타리나는 즉시 자신의 모든 생활에 대한 총고백을 하고 매일 성체를 영하기 시작하였는데 이것을 죽는 날까지 지켰다. 그런 후 그녀는 남편이 회개하도록 기도하기 시작했다. 경제적인 몰락으로 그들은 성을 떠나 초라한 집으로 옮겨갔다. 인내하며 참음으로써 그녀는 마침내 남편의 마음을 변화시켰다. 그들은 함께 회개생활을 하기로 하고 팜마토네에 있는 병원의 환자들을 돌보기 시작했다.

 

1497년에서 1501년까지 역병이 창궐하여 도시 인구의 1/5을 앗아간 시기동안 카타리나의 사랑은 참으로 영웅적이었다. 그 병원의 경영은 그녀에게 맡겨졌으며 그녀는 병자들을 위하여 밤낮으로 헌신하였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늘 하던 회개생활도 포기하지 않았다. 이러한 엄격한 생활에 기진한 그녀는 마침내 쓰러졌다. 죽기 전에 그녀는 많은 고통을 겪었다. 1510년 3월 19일(9월 15일)에 그녀는 크나큰 마음의 평화 가운데 숨을 거두었다. 그녀가 남긴 글들은 그녀의 영혼의 위대함을 보여주고 있다. 1737년에 성인품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