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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관련>/◆ 축일 & 성인

축일 5월 1일 노동자 성 요셉

by 파스칼바이런 2011. 12. 5.
축일 5월 1일 노동자 성 요셉

축일  5월 1일 노동자 성 요셉

 

Saint Joseph the Worker

San Giuseppe Lavoratore

St. Jpseph, Opificis sponsi. B. M. C. Conf


 

 

성 요셉은 교회 전체의 주보로 공경 받을 뿐 아니라 노동자, 가정, 동정녀, 환자, 임종하는 자의 주보이기도 하다.

교황 비오 11세는 요셉을 무신론적 공산주의와 투쟁하는 자들의 주보로 정하였고(1973년), 교황 베네딕토 15세는 나자렛 성가정의 보호자 성 요셉에게 ’노동자의 수호성인’이라는 호칭을 부여하였다.

1955년 5월 1일에 교황 비오 12세는 이 날을 노동자 성 요셉 축일로 선포하였다.


요한 23세는 성 요셉을 제 2차 바티칸 공의회의 보호자라고 불렀다 (1961년).

한국 교회는 성 요셉을 복되신 동정 마리아와 더불어 한국 교회의 공동 수호자로 공경한다.

 


 

 

 

교회에서는 오랫동안 성 요셉 축일을 예수 부활 후 셋째 수요일에 지내오다가 3월19일로 성 요셉 대축일을 정했습니다.

또한 교황 비오 12세께서는 1956년에 5월 1일을 노동자의 날로 정하시고, 노동자 성요셉 축일을 설정하여 요셉 성인이 모든 노동 단체의 모범이 되시고 보호자가 되도록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요셉 성인의 표양을 본받아 활동을 하고 기술을 익혀야 하며, 요셉 성인의 정신으로 자기 책임을 완수하면서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고 세상을 다스리고 번영을 도모하여 영원한 생명의 상급을 얻어 누릴 수 있도록 노력하여야 합니다.

나자렛 성가정의 보호자이신 요셉성인은 자신을 본받아 따르는 모든 이에게 보호와 은총을 누리도록 빌어주시며, 그들의 거룩한 가정을 번영하게 하여 주시리라는 것은 명백합니다.



 


 

제 2차 바티칸 공의회의 「현대 세계의 사목 헌장」에서

(Nn. 33-34)


우주 안의 인간 활동


인간은 자기 노력과 재능을 다하여 자신의 생활을 발전시키려고 언제나 분투해 왔다.

현대에 와서 인간은 특히 과학과 기술의 도움을 받아 그 지배권을 거의 자연계 전체에 확장했고 또 계속 확장하고 있다.

또 무엇보다도 국가들 사이의 여러 가지 교류 수단이 증가함에 따라 인류 가족은 점차 전 세계의 한 공동체임을 자각하며 그렇게 형성되어 가고 있다.

여기서 인간은 한때 초인간적인 힘에 의존하던 많은 혜택을 이제는 스스로의 힘으로 마련할 수 있게 되었다.


전 인류에게 퍼져 가는 이 거대한 노력 앞에서 인간들에게는 많은 문제점이 생긴다.

인간 활동의 의의와 가치는 무엇인가? 이 모든 것은 어떻게 사용될 것인가?

개인적 내지 사회적 노력은 도대체 무슨 목적을 지향하고 있는가?

교회는 하느님의 말씀을 위탁받아 보존하며 거기서 종교적 내지 윤리적 분야 의 여러 원리를 찾아내고 있으므로, 개개의 문제에 언제나 즉각적인 해답은 주지 못한다 하더라도, 최근에 인류가 걷기 시작한 행로를 비추어 주기 위해 서 계시의 빛을 모든 사람의 경험에 결부시키고자 한다.


인간이 세기를 통하여 생활 조건을 개선하기 위해서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노력해 온 이 거대한 노력은 그 자체가 하느님의 계획에 부합한다는 것이 신자들에게는 명백한 일이다.

과연, 하느님의 모상을 따라 창조된 인간은 땅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지배하며 의롭고 성스럽게 우주를 통치하고, 하느님을 만물의 창조주로 인식하며 자신과 전 우주를 하느님께 바쳐 드리라는 명을 받았다.

따라서 인간은 만물을 인간에게 복종시킴으로써 하느님의 이름이 전 우주에 빛나도록 해야 한다.


이 명령은 또한 일상 노동에도 적용된다. 자기와 가족들의 생활 유지를 위하여 노동하면서 동시에 사회에 적절히 봉사하는 남녀는 자신의 노동으로 창조주의 사업을 계속하고 형제들에게 도움을 제공하며 역사 속에서 하느님의 계획을 성취시키는 데에 개인의 노력으로 이바지한다고 여기는 것은 당연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 신자라면 인간이 스스로의 재능과 힘으로 만들어낸 것을 하느님의 권능에 배치된다거나 이성을 가진 피조물을 창조주의 경쟁자라고 생각하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인류의 승리는 하느님의 위대하심을 드러내는 증거요 헤아릴 수 없는 하느님의 계획의 결실이라고 확신한다.

인간의 능력이 커질수록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인간의 책임도 더욱 확대된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메시지가 우주 건설에서 인간들을 외면시키거나 동료들의 복지에 무관심하라고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위하여 노력하도록 강력히 촉구하고 있음이 명백하다.


(가톨릭홈에서)



 

 

성 요셉과 예수님 (St. Issoire 대성당. 프랑스 중부)

- photo by Kolbe ManYoung, CHUNG. SJ


찬미가


본받을 노동자신 성요셉이여 나자렛 성가정에 숨어계시니

우리는 기쁜소리 높이외치며 겸손된 마음으로 노래하리다.


왕족에 맞지않는 검소한생활 태연히 받아들여 묵묵히참고

손으로 심한노동 기꺼이하며 거룩한 아드님을 길러내셨네


노동자 거울이신 성요셉이여 땀흘린 노동으로 성화되시고

일터도 성화하는 모범주시려 우리게 생활증거 보여주셨네


불쌍한 주린이들 도와주시고 방종자 이끄시며 분쟁막으사

그리스도의 신비체인 우리교회를 아버지 보호아래 키워주소서


삼위로 일체이신 하느님이여 누리의 창조주며 아버지시여

살아서 성요셉을 본받음으로 죽음도 요셉처럼 맞게하소서. 아멘.


의로운 요셉을 택하시어 성자의 유년기와 소년기를 돌보게 하신 주여,

우리도 형제들 안에서 그리스도의 몸을 섬기게 하소서.

땅을 가꾸며 지배하도록 사람들에게 맡겨 주신 주여,

우리로 하여금 세상에서 항상 주님의 영광을 생각하며 열심히 일하도록 가르쳐 주소서.


(성무일도 청원기도)



 


시에나의 성 베르나르디노 사제의 설교에서

(Sermo 2, de S. Ioseph : Opera 7, 16. 27-30).


충실한 양부(養父)이시며 보호자이신 성 요셉


하느님께서는 어떤 한 사람에게 은총을 베푸실 때 다음과 같은 일반 법칙에 따라 하십니다.

즉 특별한 은총을 주시려고 혹은 특별한 위치에 올리시려고 어떤 사람을 택하실 때 그 사람에게 자기 직분을 수행하는데 필요한 모든 은사를 베푸십니다.

 

이러한 법칙은 특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양부이시며 세상과 천사들 여왕의 참된 배필이신 성 요셉에게 훌륭히 실현되었습니다.

영원하신 아버지께서는 요셉을 당신의 가장 고귀한 보화이신 외아드님과 성모님의 부양자(扶養者)와 보호자로 택하셨습니다.

 

그리고 요셉은 이 직분을 충실히 완수하였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에게 "착하고 충실한 종아, 네 주인의 기쁨 안으로 들어오라"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요셉을 그리스도의 온 교회와 관계하여 생각해 본다면, 그는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실 때 아무런 물의를 일으키지 않고 가장 정당한 길로 오시도록 하느님께서 간택하신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교회가 동정녀 마리아를 통하여 그리스도를 받았기에 동정녀께 큰 은혜를 입고 있다면, 동정녀 다음으로 요셉에게도 특별한 은혜를 입고 있으며 그에게 감사와 공경을 바쳐야 합니다.


요셉은 구약의 완성입니다. 요셉 안에서 예언자들과 성조들이 받은 약속은 결실을 맺었습니다.

예언자들과 성조들에게 약속으로만 주어졌던 것이 이제 실현된 것을 요셉 홀로 직접 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지상에서 계시던 동안 당신의 아버지로서 요셉에게 보여 주셨던 그 친밀성과 지극한 존경심을 하늘에서도 거부하지 않으실 뿐 아니라 더 완전히 보여 준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에게 "자, 네 주인의 기쁨 안으로 들어오라"하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이 사람의 마음 안에 들어가는 것은 그 사람이 행복한 일이지만 주님께서 오히려  당신의 기쁨 안으로 들어오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상징적으로 그 기쁨은 단순히 사람의 마음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어디에서나 사람을 감싸주고 마치 하느님의 끝없는 심연 속에 삼켜지듯 사람을 흡수해 버린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해서입니다.


복되신 요셉이여, 우리를 기억하시어 사람들이 당신의 아들로 여긴 그분께 우리를 위해 전구해 주소서.

또 당신의 정배이시며 그리스도의 어머니이신 동정 마리아의 자비를 얻어 주소서.

그리스도는 성부와 성령과 함께 세세에 영원히 생활하시고 왕 하시나이다. 아멘


(가톨릭홈에서)



 

 

교황 비오 12세는 1955년 노동자를 보호하고 ’노동 축일’에 기독교적 의미를 부여하기 위하여 ‘노동자 성 요셉‘축일을 제정하였다.

모든 나라에서 이 기념일을 5월 1일에 지키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오늘날 이 기념일은 임의적인 것이 되었다.


나자렛의 겸손하고 위대한 노동자 성 요셉의 모습은 전 인류의 구원자이며 하느님의 아들이면서도 인간의 삶에 직접 뛰어들어 그 고난에 동참하신 그리스도의 모습을 연상케 한다.


이렇게 하여 노동은 하느님의 창조 역사에 동참하고 완성케 하는 신비한 능력을 인간에게 주는 것이라고 노동관이 성립되었고 이것은 인간의 진정한 노동가치에 눈뜨게 해주었다.


현대인들은 때로는 폭력을 사용하면서까지 자신들의 정당한 권리와 인격의 존엄성을 주장하게 되면서 이러한 가치를 깨닫게 되었다.

그런데 사회적 투쟁으로 인하여 자신의 이익에 손실을 보게된 일부 그리스도 신자들이 이러한 노동자들의 사회적 요구를 자주 외면해 왔다.

바로 이 점이 많은 현대인들의 눈에 5월 1일이 마치 교회에 대항하는 노동자 계급의 투쟁으로 비치게 된 이유이다.


이제 교회는 노동의 현실적 가치를 존중하며, 정의와 자유를 지키기 위해 몇 나라에서 아직도 계속되고 있는 투쟁 속에서 노동자 계급의 행위를 정당화하고 옹호하기 위하여 ’노동 축일’을 중요시한다.

또한 신도들에게 성직자들이 최근 들어 교황 요한 23세의 교서(Mater et Magistra)나 바오로 6세의 교서(Populorum Progressio)를 통하여 끊임없이 일깨워주려 하는 내용에 대한 대답을 듣기 위한 까닭이기도 하다.


’노동 축일’ 기간에 우리는 노동자 성 요셉의 보호아래 구원의 상징인 성찬 예식을 갖는다.

성찬 예식은 육일간의 창조 속에서 일하신 하느님께서(창세 1-2장) 새로운 세계의 창조를 이루기 위하여 제7일에도 그의 일을 계속하시기 때문에(요한 5,17)

그리고 이제 새로이 하느님의 아들이 된 우리가 동참하는 이 새 창조는 근본적으로 성찬 예식을 통하여 완성되기 때문에 이 성찬 예식은 자연적 가치이상의 더욱 고귀한 가치를 지니는 것이다.

성찬 예식은 현대의 기술 사회 속에서 그 목적이나 동기에 있어서 초자연적인 가치를 나타내주기 때문에 ’노동 축일’속에서 그 중요성을 가지게 된다.


새 창조를 이루기 위한 이 ’새’ 일은 자연적인 법칙을 따르지만, 우리를 피조물로서의 한계를 뛰어넘어 하느님의 아들의 자리까지 이끌어주신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비로소 완성된다.

하느님을 위한 일(요한 6,27-29;골로 3,23-4,1;1고린10,31-33 비교) 또는 하느님에 대한 감사의 행위(성경적으로 정확히 말하자면 ’성찬’이 된다)에 대하여 말한다면 신약에서는 인간의 노동은 은총과 그 은총에 활기를 더해주는 사회적 의미에 의하여 이미 ’새 세계’의 정신을 반영하고 있다고 주장한다(사도 18,3;20,33-35;에페 4,29 비교)


우리들이 성찬 예식에 참여한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새로운 세계를 건설하기 위하여 시작하신 일에 우리가 더욱 밀접히 참여하도록 허락해줌과 동시에 그것이 하느님의 창조 역사에 동참하는 길이며 모든 노동의 목적은 새로운 왕국의 건설에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주면서 우리가 인간적인 노동에 헌신하는 것조차 성화시켜 주는 것이다.


(성바오로딸수도회홈에서)



 

 

요셉은 히브리어로 ’하느님께서 더 하신다’이란 뜻이다.

교황 비오 12세는 노동자들을 위한 ’노동의 날’에 대한 뚜렷한 응답으로 1955년에 노동자들의 수호자 성 요셉의 축일을 제정하였다.

그러나 요셉과 노동자들과의 관계는 이보다 훨씬 더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


예수님을 평범한 인간 생활로부터 떼어 놓지 않으려는 계속적이고 필연적인 노력의 하나로 교회는 처음부터 예수님이 목수였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강조했다.

이 목수의 일에 따른 만족과 고통은 모두 요셉에게서 이어받은 것이 분명하다.


인간은 생각하고 사랑하는 것뿐 아니라 창조하는 것에서도 하느님을 닮았다.

인간이 탁자를 만들든지 대성당을 세우든지 그것은 인간이 자신의 손과 마음으로 결실을 거두라는 소명을 받은 것이며, 궁극적으로는 그리스도의 몸을 건설하기 위한 것이다.


"야훼 하느님께서 아담을 데려다가 에덴에 있는 이 동산을 돌보게 하시며…."(창세2,15)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만물을 창조하시고 인간에게 이 창조 사업을 계속하도록 명하셨다.

인간은 가정을 이루거나 하느님의 창조 사업에 참여하는 그들의 노동 안에서 자신의 존엄성을 발견한다.

노동자인 요셉은 우리가 창조의 가장 깊은 신비 안에서 하느님의 창조 활동에 참여하도록 도와준다.


비오 12세는 다음과 같이 말하면서 이를 강조했다.

"세상의 구세주이시며 신인(神人)이신 분으로부터 그대와 모든 사람에게로 영이 스며들어 온다.

그러나 그 어떤 노동자도 예수님과 가장 긴밀한 관계를 맺고 노동의 공동체를 이루며 가정  생활을 했던 예수님의 양아버지 요셉보다 더 깊이 그리고 더 완전하게 창조의 신비 속으로 들어가지는 못한 것이 명백하다.

따라서 여러분이 그리스도께 가까이 가고자 원한다면 우리는 오늘날에도 ’요셉에게로 가자.’(창세41,55)라는 말을 반복할 뿐이다."


예수의 작은 형제회 소속인 르네 브와이욤은 그의 저서 ’사람의 서리에서’에서 일상적 노동과 성덕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제 예수님의 성덕은 가장 일반적인 생활환경 안에서도 하나의 실재가 되었다.

언어생활, 가정생활, 한 마을의 사회생활이 성덕이 될 수 있는 상황에 이르렀으며, 이것은 가장 암담하고 단조로운 인간 활동도 하느님 아들의 완덕에 온전히 적응할 수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 신비와 관련해서 하느님의 아들에게만 고유했던 이 복음의 성덕은 생계를 위해서 노동을 해야만 하는 가난한 사람의 일상 생활환경에서도 가능하다는 확신을 내포하고 있다."


(성바오로수도회홈에서)



 


사람 서리에서 : -샤를르 드 푸코 신부와 예수의 작은 형제들-

글쓴이: 러네 보아욤 | 옮긴이: 강우일 | 출판사: 분도출판사 | 1995년


샤를르 드 푸꼬는 예수께서 나자렛에서 하신 가난하고 미천한 노동자로서의 숨은 생활을 본받고자 했다.

이 책은 러네 보아욤 신부(작은 형제회)가 작은 형제·자매들의 믿음과 형제적 애덕을 지도·격려하기 위해 보낸 대화체의 편지들로서 사람 서리에서 가난하고 겸손하게 살고자 하는 예수의 작은 형제·자매회의 영성을 잘 드러내 준다.


성 요셉은 하루하루의 의무에 충실하신 분이었고 오늘날 자신의 손으로 나날의 임무를 장만하지 않으면 안 되는 모든 사람들에게 좋은 모범이 되었다

 

Joseph the Carpenter-Georges La tour - 1645, Louvre, Paris


자모이신 교회에서는 예수 부활 후 셋째 수요일을 다년간 성 요셉 축일로 지내던 것을 3월 19일에 지내도록 하고, 그 대신 1956년부터 5월 1일을 고정적으로 노동자 성 요셉의 표준 축일로 결정했다.


성서에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마태 13, 55)라는 말이 있다.

이로 보아 당시 유다인들은 예수를 목수인 요셉의 아들로 생각했다는 것이 분명하다.

성가정의 보호자로 선택된 요셉은 자기 본 직업인 목수로서 일생을 보내며 성자를 무난히 양육했던 것이다.

따라서 예수께서도 30년간의 나자렛의 사생활에서 목수 일을 하시어 양아버지인 성 요셉을 도와드렸으리라는 것이 수긍된다.


과거 어느 때 보다도 현재처럼 노동 문제가 복잡해진 때는 없을 것이다.

교회에서는 이미 수차 노동 문제에 관한 칙서 즉 사회 질서의 대헌장을 반포함으로써 심각해진 노동 문제를 해결해 주고 노동자들의 앞길을 명시해 주며 철저한 노동 정책을 수립하도록 세계에 호소했던 것이다.

교회의 입장에서 노동의 신성성을 주장하며 교회의 정신에 입각한 노동 정책을 수립하도록 하고 인간의 품위와 권리를 보장함으로써 인간 본연 목적을 달성시키고자 여러모로 노력해 왔다.


여기에서 역대 교황의 유지를 받들어 교황 비오 12세께서는 저 장인(匠人)들과 노동자들이 성 요셉을 자신들이 보호자로 삼고 그의 모범을 본받아 나가기를 원했다.

그 이유는 성 요셉과 또한 예수께서 목수 일을 하시고 노동을 좋아하시면서 자기 정신을 연마했으므로 당연히 목수의 아들로 불려졌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이유로써 그들의 노동자 사회가 건전히 발전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각 개인에, 각 가정에, 또한 그들의 단체에 항상 같이 계셔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이야말로 노동 조합체의 특별한 목적이다.


여기에서 그들은 보다 나은 그리스도교적 신자생활을 영위하고 더욱 향상시키며, 하느님의 나라를 널리 전파하며 특히, 공장의 동료들에게 알려주어야 할 것이다.


이렇게 새로운 노동 조합체에 대한 교회의 관심이 커감에 따라 비오 12세 교황께서는 1955년 5월 1일, 로마에 노동자들의 모임이 있어 수많은 군중이 베드로 대성전 앞뜰에 모였을 때 그들을 훈시하며 노동 조합체의 결성을 간곡히 요청하셨다.


그 이유는 현대에 있어서 이것이 장인이나 노동자들로 하여금 그리스도교 교리를 당연히 닦게 하고, 그릇된 사회 조직과 경제적 오류를 피하도록 하며, 또한 교회에서 직공들의 권리나 의무에 대해 설명한 바와 같은 하느님께로부터 규정된 윤리적 질서를 잘 납득해서 좋은 결실을 내며 효과 있게 처리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이다.

또한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처음으로 이 문제에 관해 불변하고 가장 능률 있는 원칙을 전파하셨고 또한 교회에 전해 주셨기 때문이다.


인간의 노동의 품위와 원칙은 동일한 것을 형성하며 인간의 마음속에 더 널리 잠재하고 있는 것을 간파하신 비오 12세 교황께서는 노동자 성 요셉의 표준 축일을 설정하고, 성 요셉이 모든 단체의 모범이 되고 보호자가 되도록 하셨다.

그러므로 그의 표양을 따라 누구나 활동을 하고 첫째로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고 지상을 지배하며 경제적 번영을 도모함과 동시에 영원한 생명의 상급을 얻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성 요셉은 나자렛 성가정의 보호자이신만큼 자기와 비슷한 일을 하는 자에게 보호와 은총을 내려 주며 그들의 거룩한 가정을 번영케 해 주리라는 것은 의심 없는 일이다.

그러므로 가장 적합하게도 교황께서는 이 축일을 5월 1일에 지내도록 명했으며, 노동자들은 그 날을 집회의 날로 채택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의 발전이 기대될 것이며 특히 이 날은 목수인 성 요셉에게 봉헌되어 모든 미움과 논쟁은 감소될 것이고 세월이 갈수록 평화가 없는 나라의 사람들도 점점 행복하게 될 것이다.

또한 각국의 지도자들도 각성해 인간 사회가 요구하는 올바른 질서를 현명하게 처리해 나아가게 될 것이다.


(대구대교구홈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회칙


노동하는 인간. LABOREM EXERCENS


노동을 하여(Laborem Exercens) 인간은 자신의 일용할 양식을 얻어야 하고, 과학과 기술의 끊임없는 진보에 이바지해야 하며, 무엇보다도 한 가족인 형제들과 공동체를 이루어 살아가는 사회의 문화적, 도덕적 수준을 끊임없이 들어 높이는 데 이바지해야 한다.


노동이란 그 성격이나 환경이 어떻든 간에 인간에 의해 이루어지는 육체적이거나 정신적인 어떤 행위를 뜻한다.

즉, 인간성 자체로 인하여 그리고 본성으로 타고나 인간이 할 수 있는 수많은 행위들 가운데 노동으로 인식될 수 있고 또 인식되어야 하는 인간의 어떤 활동을 뜻한다.

인간은 하느님의 모상을 따라, 하느님과 닮은 모습으로, 볼 수 있는 우주 안에 창조되었으며, 땅을 다스리도록 그 안에 안배되었다.

그래서 태초부터 인간은 노동을 하도록 부름 받은 것이다.


인간을 다른 피조물들과 구별하는 특징 가운데 하나가 노동이다.

다른 피조물들이 그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하는 행동은 노동이라고 할 수 없다.

오직 인간만이 노동을 할 능력이 있으며, 오직 인간만이 노동을 하며, 동시에 노동을 통하여 자신의 지상 생활을 영위하고 있다.

그래서 노동은 인간과 인간성을 나타내는 특별한 표시이며, 인격체로 이루어진 공동체 안에 움직이는 개개의 인격체를 나타내는 표시이다.

그리고 이 표시는 인간의 내면적 특성을 결정하며, 어떤 의미에서는 인간의 본질 자체를 형성한다.


26. 노동을 통하여 인간이 창조주이신 하느님 자신의 활동에 참여한다는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특별히 강조하셨다.

나자렛에서 그분을 처음 본 청중들이 “저 사람이 어떤 지혜를 받았기에 저런 기적들을 행하는 것일까?

그런 모든 것이 어디서 생겨났을까? 저 사람은 그 목수가 아닌가?”하고 놀라워하였던 그 예수님에 의해서 강조되었다.

실로 예수께서는 자신에게 맡겨진 영원한 지혜의 말씀인 ‘복음’을 말로만 선포한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먼저 행동으로 실천하셨다.

그것은 또한 ‘노동의 복음’이었다.


복음을 선포한 그분 자신이 나자렛의 요셉처럼 노동하는 인간, 즉 장인이셨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분의 말씀에서 노동을 하라는 특별한 명령은 찾지 못한다 하더라도 - 오히려 어느 기회에 노동과 생활에 대한 지나친 걱정을 금하신 것을 볼 수 있다 - 그러나 동시에 그리스도께서 ’노동하는 세상’에 속해 있으며 인간의 노동을 이해하고 존중하신다는 것을 그분의 분명한 삶이 웅변적으로 말해 주고 있다.


노동하는 인간, 그리스도

 

참으로 그분은 인간의 노동과 그 여러 형태를 사랑으로 대하셨고, 노동의 여러 형태 안에서 각기 창조주요 아버지이신 하느님과 닮은 인간의 구체적인 모습을 보셨던 것이다.

"내 아버지는 농부이시다” 하고 말씀하신 분, 창세기를 비롯하여 구약의 모든 전통 안에 이미 표현된 노동에 대한 근본 진리를 여러 가지 방법으로 그 가르침 안에 담으셨던 분이 바로 그리스도 아닌가?


구약의 성서들은 인간의 노동에 대해 그리고 인간이 수행하는 각각의 직업에 대해 많은 것들을 언급하고 있다.

예를 들면, 의사 약제사, 목수 또는 장인, 대장장이 - 이 말은 오늘날의 주물공에 해당될 수 있다 - 옹기장이, 농부, 학자, 선원, 건축가, 음악가, 목자, 그리고 어부 등이다.

여성들의 노동에 대한 찬사는 잘 알려져 있다.


하느님 나라의 비유들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끊임없이 인간의 노동에 대해 언급하신다.

즉 목자, 농부, 의사, 씨 뿌리는 사람, 관리인, 종, 청지기, 어부, 상인, 일꾼 등의 노동이다.

그분은 또한 여러 가지 형태의 여성의 노동에 대해 말씀하신다.

그분은 사도직을 추수하는 사람들이나 어부들의 육체노동에 비유하신다.

또한 학자들의 노동에 대해서도 언급하신다.


나자렛 시절 당신의 삶으로써 모범을 보이셨던 그리스도의 노동에 관한 이 가르침은 특히 사도 바오로의 가르침에서 생생하게 반향 되고 있다.

바오로는 자신의 노동하는 직업(그는 아마 천막 만드는 사람이었을 것이다.)을 자랑하며, 사도이면서도 자기가 먹을 것을 벌 수 있게 한 그 노동에 감사하였다.

“우리는 여러분 중 어느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수고하며 애써 노동을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테살로니카인들에게 권고와 명령의 형식으로 노동에 관한 그의 가르침을 썼다.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런 사람들에게 명령하고 권고합니다. 말없이 일해서 제 힘으로 벌어먹도록 하십시오.”

실제로 “게으른 생활을 하며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남의 일에만 참견하는” 사람들을 보고 사도는 같은 맥락에서 주저 없이 이렇게 말한다.


“일하기 싫어하는 사람은 먹지도 말라.” 다른 곳에서 그는 이렇게 격려했다.

“무슨 일이나 사람을 섬긴다는 생각으로 하지 말고 주님을 섬기듯이 정성껏 하십시오.

여러분은 주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상으로 받게 되리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방인들의 사도는 인간 노동의 도덕성과 영성에 관하여 그 핵심을 분명하게 가르치고 있다.

사도의 그러한 가르침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행적과 가르침”안에서, 그분의 생애와 비유들 안에서 드러나는 신중하고도 위대한 노동의 복음을 보완하는 중대한 내용이다.


교회의 원천 자체이신 분에게서 흘러나오는 이 빛을 근거로 하여, 현대어로 표현되어 있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가르침을 교회는 항상 가르쳐왔다.


“인간 활동은 인간에게서 나오듯 인간을 향하고 있다.

인간은 활동을 통하여 사물과 사회를 변화시킬 뿐 아니라 또한 자신을 완성해 나간다.

많은 것을 배우고 자기 능력을 기르며 자기를 벗어나 자신을 초월한다.

이 같은 성장은 바로 이해한다면 외적 재산의 축적보다 훨씬 값진 것이다…

따라서 인간 활동의 규범은, 그것이 하느님의 계획과 그 뜻을 따라 인류의 진정한 복지에 부합하고,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인간으로서의 사명을 완전무결하게 추구하며 실천할 수 있도록 허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같은 인간 노동의 가치에 관한 전망, 또는 달리 말해서 이 같은‘노동의 영성’은 올바른 진보의 의미에 관해 공의회의 사목헌장이 같은 항목에서 말하는 것을 충분히 설명한다.

“인간의 가치는 무엇을 가졌느냐에 있지 않고 어떤 인간이냐에 있다. 마찬가지로, 더 나은 정의와 더 넓은 형제애와 더욱 인간다운 사회관계의 질서를 확립하려는 인간의 노력이 기술의 발전보다 훨씬 값진 것이다.

이런 기술의 발전이 인간 향상에 물질적 바탕은 마련할 수 있지만 그 힘만으로 인간 향상을 실현시킬 수는 없기 때문이다.”


진보와 발전의 문제 - 현대의 사상을 지배하는 주제이다 - 에 관한 이러한 가르침은 오직 인간 노동에 관한 확인된 영성의 결실로서만 이해될 수 있다.

오직 이러한 영성을 바탕으로 하여 그 가르침은 실현될 수 있고 또 실천될 수 있다.

이것이 ‘노동의 복음’에 뿌리를 박은 가르침이며 또한 하느님의 계획이다.


(가톨릭홈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