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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일 7월15일 성 보나벤투라(Bonaventure)(2) San Bonaventura Vescovo e dottore della Chiesa St. Bonaventure of Bagnoregio St. Bonaventura, Ep. Doct
성 보나벤뚜라의 중부 이딸리아 박뇨 레지오에서 1217/1221년에 탄생하였다. 성인께서 태어난 지 일년이 채 되지 않아서 매우 심하게 아팠다. 그때 마침 성 프란치스코께서 보나벤뚜라 성인이 살고 있는 도시를 지나가게 되었다. 성인의 어머니께서는 아기를 안고 성 프란치스코가 지나갈 때 아픈 아기를 위하여 기도해 줄 것을 간청하였다. 성 프란치스코께서 그 아기를 보자마자 단지 "Oh! Bona ventura"라고 말하였다. 이 뜻은 "오! 참 좋은 행운이여"라는 뜻이다. 그러자 아기의 병은 씻은 듯이 나았다. 그래서 그때 이후로 아기의 이름은 보나벤뚜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그 후 보나벤뚜라 성인은 17세에 프란치스코회에 입회하였다. 그 후 빠리대학에서 수학하고 다시 그곳에서 강의하였다. 37세에 프란치스코 수도회 총장이 되었다. 교황 그레고리오 10세(1271-1276)는 그 당시 일어났던 어려운 교회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될 상황에 처해졌다. 그 어려운 문제들 중에서 특히 성직자의 규율문제와 예수 그리스도의 성지에서의 곤란한 일 그리고 동방교회를 로마교회로 돌아오게 하는 일들이었다. 이런 어려운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하여 교황은 제2차 리용 공의회(1274)를 소집하였다. 이 공의회에서 위의 어려운 문제들에 대하여 논의하기 위하여 그 시대의 권위 있는 학자들을 불렀다. 교황께서 부른 학자들 중에는 보나벤뚜라 성인도 포함되어 있었다. 교황은 그를 추기경으로 임명하였으나 리용 공의회를 하면서 보나벤뚜라 성인은 운명하였다.
이제 보나벤뚜라 성인에 대하여 간략하게 살펴보자. 성인에 대해서 크게 4가지를 중심으로 살펴보는 것이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 교회 학자로서의 성보나벤뚜라 보나벤뚜라가 프란치스코회 들어갈 때는 청년이었다. 프란치스꼬회에 입회한 후 그는 빠리대학에서 열정적으로 신학을 공부하였다. 그리고 매우 착실한 생활을 하였다. 그러기에 빠리대학 교수였던 알렉산더는 "보나벤뚜라는 원죄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알렉산더 교수 수하에서 보나벤뚜라는 지혜와 완덕에 있어서 날로 진보하였다. 그는 27살부터 자기가 공부하던 빠리대학에서 교수가 되어 강의를 하였다.
우리 교회에서 보나벤뚜라를 세라핌적인 학자라고 한다. 이는 그가 "지혜는 하느님을 더 사랑하기 위한 수단이다."라고 말하였고 또 그렇게 생활했기 때문이다. 보나벤뚜라는 "우리 지능을 밝히는 빛이 우리 마을까지 감동을 시키지 않으면 효과가 없는 빛이다."라고 말하였다. 자기가 하느님의 사랑을 불태우고 그 사랑으로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였다. 위대한 학자로서 그는 우쭐거리지도 않고 작은 형제처럼 겸손하게 살았다.
어느 날 그는 한 할머니를 만나게 되었는데 그 할머니가 "보나벤뚜라가 이렇게 큰 지혜를 가지고 있음을 하느님께서 잘 알고 있으니 죽은 후에 틀림없이 천당에 가게 되어 하느님의 가장 앞자리에 앉으실 것입니다."하고 말하자 보나벤뚜라는 "나보다 할머니가 하느님 앞에 더 가까이 가실 수 있을 것입니다."하고 말하였다 한다.
☆대 성인 으로서의 보나벤뚜라 보나벤뚜라가 사람들의 정신을 지혜롭게 밝혀주며 마음을 훈계하고 하느님의 사랑에까지 이르도록 하였다. 어느날 성 토마스 아퀴나스가 보나벤뚜라를 찾아와서 "어디에서, 어떻게 그런 지혜를 배웠습니까?"하고 물었다. 그러자 보나벤뚜라는 십자가를 보여주면서 "이것이 나의 지혜의 샘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는 일화가 있다. 또 다시 어느 날 성 토마스 아퀴나스가 보나벤뚜라를 찾아갔는데 마침 그때 보나벤뚜라는 프란치스코 성인의 전기를 쓰고 있는 중이었다. 이를 보고는 토마스 아퀴나스는 "성인을 위하여 일하고 있는 성인을 방해선 안되지!"하며 발길을 돌렸다는 일화도 있다. 보나벤뚜라는 자신의 삶이기도 한 완덕으로 가는 길에 대하여 가르치는 많은 작품들을 저술하였다.
☆ 프란치스코 수도회 총장으로서의 보나벤뚜라 보나벤뚜라는 빠리 대학에서 오랫동안 가르치지는 못했다. 왜냐하면 약관 37세에 수도회 총장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성 프란치스코가 돌아가신지 31년도 채 되지 않았는데 프란치스코 성인이 세운 수도회는 날로 발전하고 커져만 갔다. 보나벤뚜라를 일컬어 "제2의 창설자"라 불릴 정도로 수도회의 조직을 위하여 많은 일을 하였다. 특히 프란치스코 성인이 만든 회칙을 시대 상황에 맞게끔 형제들이 생활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작은 형제회의 첫 회헌 "나르보나 회헌"(Narbona)을 만들었다.
☆ 알바노의 추기경으로서의 보나벤뚜라 성교회는 교회에 처한 어려운 상황에서 보나벤뚜라의 지혜와 성덕을 높이 사 추기경으로 임명하였다. 보나벤뚜라는 그 직책을 거절하고 싶었지만 회칙의 정신에 따라 순명할 수밖에 없었다. 추기경 임명장을 가지고 왔던 전달자는 보나벤뚜라를 부엌에서 만났다고 한다. 1274년 추기경으로써 제2차 리용 공의회에 참석 중에 하느님의 부름을 받고 하늘나라로 떠났다.
St Bonaventure Joins the Franciscan Order - HERRERA, Francisco de, the Elder. 1628.Oil on canvas, 231 x 215 cm Museo del Prado, Madrid.
☆ 연혁
1217 이탈리아 박뇨 레지오에서 출생 1226 소년시기에 병이 들었으나 그의 어머니가 프란치스코에게 전구하여 병이 회복됨 1235-1243 파리대학에서 박사학위 득할 때까지 수학함 1243 파리에 있는 프란치스코회에 입회하고 로마관구에 등록함 수도원에서 알렉산더 할레스 문하에서 신학을 연구하고 그의 사망 후 (1245) 오도네 문하에서 연구를 계속함 1250-1252 그의 기념비적인 작품인 "룸바르두스이 명제집"저술 1253-1257 파리대학에서 교수생활을 계속하면서 그의 사상 이해에 있어서 중요한 작품인 "그리스도에 관한 지식"의 3편의 토론집을 완성함 1254-1257 작은 형제회 신학교의 책임자가 됨. 로마에서 교황 알렉산더 4세가 참석한 회의에서 프란치스코회 총장으로 선출됨 1257.4 작은 형제회 첫회헌 작성 (파리에서) 1259 프랑스 관구 총회 개최. 라베르나산에서 "영혼의 여정" 저술 1260 라르보네 총회 (나르보네 회헌 작성). 성녀 글라라 귀천 1261 파리와 이탈리아에서 거주 1262 "성 스테파노의 발견" 강론 1263 빠도바의 성 안또니오 귀천 1265 클레멘스 4세가 대주교로 임명했으나 사양함. 파리에서 총회 개회 (여기서 유명한 "성 프란치스코에 대하여" 강론).1267 독서 강화집 "십계명에 대하여" 저술 1268 독서 강화집 "성령칠은에 대하여" 저술 1270 스페인과 독일에서 체류 1272 로마에서 교황 그레고리오 10세 대관식에 참석 리용총회 참석 1273 독서 강화집 "창조의 여섯째 날" 저술. 후에 인노첸시오 5세가 된 도미니꼬회의 뻬드로네프란타샤와 후에 요한 21세가 된 빼뜨로 히스파뇨와 함께 알바뇨의 주교 겸 추기경으로 임명됨. 1274 총회 개최 여기서 예로시모 형제가 총장으로 선출됨. 제4차 리용 공의회 참석 1274.7.15 공의회 도중 귀천. 리용의 프란치스코 수도원에서 거행된 장례식은 교황이 주례하고 공의회에 참석했던 모든 교부들이 참석 1482 교황 식스토 4세는 칙서 "천상 고향 예루살렘"으로 보나벤뚜라를 성인품에 올림 1587 교황 식스토 5세는 칙서 "환호하는 예루살렘"으로 보나벤뚜라에게 "교회박사" 의 칭호를 내림.
- 꼰벤뚜알 프란치스코회 홈에서 -
보나벤투라는 1217년(1218년?) Bagnoregio에서 태어났다. 그는 Hales의 Alexander가 프란치스칸이 된 이후에 작은 형제들이 교수직을 가지고 있었던 파리 대학에서 수학하였다. 총 봉사자로서의 보나벤투라는 때때로 "형제회의 두 번째 창설자"라고 알려지고 있다. 그는 행정가로서의 독보적인 자질을 가지고 있었으며, 지혜와 거룩함을 겸비한 사람이었다.
1257년 4월 23일 그는 자신의 생애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문제들 몇 가지를 언급하는 편지를 회람 편지를 형제들에게 썼다. 그는 형제들이 사도적 직무를 위해 준비되도록 조처를 취하였지만, 동시에 형제들의 생활을 특징 지워 주는 가난의 양식도 고수하였다. 1259년 그는 라베르나에서 피정의 시간을 보내고 나서 그 유명한 신비적 작품인"하느님께로 가는 영혼의 여정"을 저술하였다.
Narbonne 총회(1260) 기간 동안 그는 형제회의 첫 번째 회헌을 형제들에게 주었다. 이 총회는 보나벤투라에게 성 프란치스코의 새로운 전기를 쓰라는 요청을 하였다. "성 프란치스코의 대전기"가 집필되어 1263년 Pisa 총회에 제출되었다. 1266년 파리 총회는 대전기 이전의 다른 모든 전기들을 파기할 것을 명령하였다. 대전기는 공동체 형제들과 영적인 형제들을 화해시키기는 데 있어서 필요한 보나벤투라의 정치적인 도구였을 것이다.
보나벤투라는 파리의 재속 성직자들로부터 오는 불의한 공격에서 탁발 수도회원들을 변호해 주기도 하였는데, 특히 1269년에 쓴"Apologia pauperum"(가난한 이들의 변호)작품에서 그렇게 하였다. 그는 1273년 리용 공의회를 준비하기 위해 Albano의 주교(추기경)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공의회 회기 기간 중이었던 1274년 7월 14일에 세상을 떠났으며, 프란치스칸이었던 두 교황에 의해 (Sixtus 4세와 Sixtus 5세)에 의해 각각 성인품에 올랐고, 교회의 박사로 선포되었다.
알렉산데르 모레토의 성 보나벤투라(Bonaventura, 좌)와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Antonius, 우)
성 보나벤투라의 성 프란치스코 대전기
■ Giovanni Fidanza 1217년 이태리의 Lazio 지역에 위치한 Bagnoregio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에 앓고 있던 Giovanni는 성 프란치스코의 중재 기도를 통해 기적적으로 치유되었다(대전기 서문 3항). 그는 파리 대학에 들어가서 Hales의 Alexander 아래서 수학하였다.
■ 이 유명한 학자(Hales의 Alexander)는 작은 형제회에 들어가 파리 대학에서 프란치스칸 교수들이 가르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하였다. 보나벤투라도 작은 형제회에 들어가 공부를 계속하여 성서학사 학위를 받았다. 그 후 그는 Peter Lombard의 명언집을 주석하였고, 이 대학 내에서 교구 신학자들과 탁발수도회(프란치스코회와 도미니코회) 신학자들 사이의 길고도 치열한 논쟁이 진행 중이던 때에 프란치스칸 학파를 이끄는 거장이 되었다.
■ 1257년 2월 2일, Aracoeli 총회에서 그는 Parma의 요한에 이어 총 봉사자로 선출되었다. 그가 착수한 첫 번째 작업 중 하나는 형제회를 안정시키고 일치시키는 일이었다. 이런 이유 때문에, 형제회의 내의 공식 전기로서 “성 프란치스코의 대전기”라는 이름의 성 프란치스코의 생애를 저술하였는데, 이 일은 Narbonne 총회(1260)가 위임한 것이었고, Pisa 총회(1263)에 제출되었다. 파리 총회(1266)는 대전기만을 성인의 공식적인 전기로 인식시키기 위해 성 프란치스코의 다른 전기들을 모두 파기시키라는 명령을 내렸다.
■ 이 명령이 첼라노의 3부작에게 불행을 가져오게 되었다. 여러 세기 동안 통상적으로 유일하게 공식적으로 인정된 성 프란치스코의 생애는 대전기 뿐이라고 여겨졌다. 첼라노의 3부작에 대한 사본들은 학자들이 시토회 수도원들과 분도회 수도원들에서 연속적으로 발견하였다. 그 수도원들은 총회의 결정이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지 못한 곳이었다. 보나벤투라는 또한 성 프란치스코 대축일 8부 기간 동안에 전례에 쓰기 위해 “소전기”에다 대전기를 요약하여 소개하였다. 보나벤투라는 리용 공의회의 준비하기 위해 1273년 Albano의 추기경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공의회가 진행 중이던 1274년 7얼 14일 세상을 떠났다. 프란치스칸 교황인 식스토 4세가 1482년 그를 성인품에 올렸고, 또 다른 프란치스칸 교황인 식스토 5세가 1588년 그를 교회의 박사로 선포하였다. 그는 세라핌적 박사로 알려져 있다.
■ 대전기는 서문으로 시작을 하는데, 여기에서 보나벤투라는 성서적인 관점에서 프란치스코를 소개하고 있다. 프란치스코의 사명을 모세와 엘리야 그리고 세례자 요한의 사명과 같은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프란치스코는 간택된 자의 이마에 구원의 십자가를 각인시켜 주시는 살아 계신 하느님의 인장을 지닌 묵시록의 천사로 나타난다. 이러 표상은 우연하게도 성령의 시대에 관한 피오레의 요아킴의 종말론적인 주장을 받아들였던 여러 형제들에게는 매우 매력적인 것이었는데, 이 형제들은 형제회 내에 대단히 큰 어려움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형제회는 이미 “Communitas Ordinis” 즉 공동체주의 형제들과 영적인 형제들 사이에 갈등이 자라나고 있음을 체험하고 있었다. 보나벤투라는 중재자의 역할을 한 셈이며, 많은 수의 학자들은 이 대전기가 형제회의 역사 안에서 긴장이 매우 크게 조성되던 시기에 총 봉사자가 가지고 있던 정치적 도구였다고 지적해 왔다.
■ 대전기는 15장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각 장은 프란치스코의 덕목들을 하나 혹은 몇 개씩 칭송하고 있다.(대전기의 신학을 전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음의 책을 참조하면 된다: E. Cousins, “Bonaventure. The Soul’s Journey into God. The Tree of Life. The Life of Saint Francis.”머리말은 I. Brady가 썼음. Paulist Press, New York, 1978). 보나벤투라는 역사학자로서 첼라노가 써 놓은 것들에 새로운 자료를 보태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문서화된 사료들, 특히 첼라노 전기의 내용을 보존하고자 했다는 점에서 그 공로를 지니고 있으며, 이 사료들을 신비적인 형태로 종합해 놓고 있다. 보나벤투라는 정말로 프란치스코의 충실한 아들이었다. 그는 형제회를 멀리 까지 두루두루 다녔으며, 문제점이 무엇인지를 꽤나 잘 알고 있었기에 정말로 필요한 것에 대해서 관대한 마음으로 응답할 수 있었다. 대전기는 이 모든 것 이상의 것을 담고 있으며, 프란치스코에 관한 고전적인 전기들 중 하나로 남아 있다.
■ 대전기는 화가 지오토에게 아시시 대성당의 상부 벽에 프란치스코의 생애에 관한 24개의 프레스코 작품을 그리는 데 영감을 불어넣어 준 작품이다.
- 작은형제회 홈에서 -
프란치스코 데 수르바란의 리옹 공의회의 성 보나벤투라(Bonaventura)
프란치스코 데 수르바란의 기도 중인 성 보나벤투라(Bonaventura)
축일 7월15일 성 보나벤투라(Bonaventure)(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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