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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글 모음>/◇ 법정스님 글

머리와 가슴의 거리 / 법정스님

by 파스칼바이런 2012. 2. 4.

머리와 가슴의 거리

 

 

비슷비슷한 되풀이를 하면서 살아가는 우리들의 삶도 어제와 오늘이 똑같은 삶은 아닐 것이다.

겉으로 보면 어제와 오늘이 달라진 것 없이 그냥 그대로인 듯, 싶어도 자세히 살펴보면 생각과 몸짓과 말씨 등 순간순간 그 삶의 모습은 다르다.

 

이 세상에 새로운 것은 없다고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거죽만을 보고 한 소리다. 안으로 유심히 들여다보면 그 어느 것도 똑같은 것은 없다.

 

순간순간이 늘 새롭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내가 다름이 없는 똑같은 나라면, 오늘은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대중이 많이 모여서 수도하는 큰절에서는 음력으로 초하루와 보름날 정례적인 법회가 열린다.

 

운문산(雲門山)의 선원에서 30여 년을 머물면서 선풍을 크게 떨친 당말(唐末) 오대(五代)의 운문선사(864∼949)는 보름날 법좌에 올라 이렇게 말했다.

 

"15일 이전의 일은 그대들에게 묻지 않겠다. 15일 이후의 일을 한 마디 일러 보아라."

 

과거를 묻지 말라는 말이 있듯이, 일단 지나가 버린 과거사에 대해서는 이러쿵저러쿵 논의하고 싶지 않다.

다만 앞으로 닥쳐 올 오늘 이후의 날들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지 한 마디 일러 보라는 것이다.

 

대중에서 아무 말이 없자 선사는 스스로 말한다.

"날마다 좋은 날이니라(日日是好日)."

 

'날마다 좋은 날'은 어디서 오는가. 거저 오지 않는다.

날은 비슷비슷한 그 날이지만 그 날을 내가 어떻게 맞이하고 이루느냐에 따라 좋은 날도 될 수 있고 궂은 날도 될 수 있다.

 

좋은 날을 맞이하고 이루려면 거기에는 반드시 좋은 날에 걸맞은 의지적인 노력이 따라야 한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라고 최초로 말한 이는 다름 아닌 운문선사다.

선사의 어록인 「운문광록(雲門廣錄)」에 이와 같이 실려 있다.

 

"여러 스님들 잘못 알지 말라. 하늘은 하늘이요, 땅은 땅이며(天是天 地是地)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며(山是山 水示水) 승은 승이요, 속은 속이니라(僧是僧 俗是俗)."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볼 것이지 어떤 선입견이나 편견을 가지고 보지 말라는 교훈이다.

하늘은 하늘이요, 땅은 땅이라 했는데, 이 하늘과 땅 사이에 사는 사람들이 하늘과 땅을 망가뜨리고 있다. 산과 물은 또 어떤가. 산다운 산과 물다운 물은 점점 우리 곁에서 사라져 가고 있다.

 

니체는 그의 짜라투스트라를 통해서 이와 같이 말한다.

"지구는 피부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 피부는 여러 가지 질병을 지니고 있는데, 그 질병의 하나가 바로 인간이다."

 

전에는 이 말을 선뜻 이해하지 못했는데 요즘에 와서 뒤늦게 알아차린다.

인간이, 바로 당신과 내가 이 지구를 괴롭히는 바이러스이고 세균이고 질병이라는 것이다.

 

이런 지적에 오늘의 우리는 변명할 여지가 없다. 해가 떠오르기 전 수평선 위에 붉게 물드는 새벽노을 빛은 신비롭고 거룩하게 보인다.

그러면서도 한편 어둠과 밝음이 교차되는 이 노을빛을 마주하고 있으면 문득 두려움을 느낄 때가 있다

 

하늘과 땅 사이에서 삶을 이어가고 있는 내 자신이 이 하늘과 땅에 대해서 도리를 다하고 있는가 하는 물음이 솟아오르기 때문이다.

바닷가는 바람이 많다.

바닷바람에 빨랫줄에 널어놓은 빨래는 잘 마르지만 깃발처럼 펄럭거리는 옷가지를 보고 있으면 내 몸이 허공에서 펄럭거리는 것 같아 어지럽고 스산하다.

 

이곳으로 옮겨 온 후 나는 한 마리 개와 친해졌다.

내 오두막으로 올라오려면 외떨어진 집을 거쳐서 와야 하는데 그 집에서 기르는 검둥이가 나를 몹시 반긴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이처럼 나를 반기는 생물은 일찍이 보지 못했다.

 

그 집은 60대의 부부가 단 둘이 살고 있다.

할머니는 시장에 나가 밭에서 가꾼 푸성귀를 내다 팔고, 할아버지는 아주 부지런히 밭농사를 짓는다.

 

요즘 같은 겨울철에는 주로 산에 가서 땔나무를 해오는 것 같다.

그러니 집을 비울 때가 많다.

빈집을 검둥이만 혼자서 줄에 묶여 집을 지키고 있다.

말 못하는 짐승이지만 얼마나 무료하고 외롭겠는가.

나를 보면 뭐라 끄응 끄응 거리면서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온 몸으로 반긴다.

밤이 늦어 그 집 앞을 지나올 때 검둥이는 내 발자국 소리를 듣고 아는 체를 하면서 어리광을 부린다.

 

이런 사이라서 내 마음도 그 검둥이에게 이끌리지 않을 수 없다.

밖에서 돌아올 때면 잊지 않고 검둥이 몫으로 먹을 것들을 챙겨 온다.

그 집은 시골집인데도 개에게 음식을 주지 않고 가게에서 파는 염소똥 같은 정제로 된 사료를 주고 있다.

토종개의 식성에는 맞지 않을 것 같은데 편리해서 그러는가 싶다.

요즘 시골 살림살이의 한 단면을 보는 것 같아 씁쓸하다.

검둥이는 내가 찾아올 시간을 기다린다.

 

오전 중에 한 차례씩 밥을 가지고 가는데, 내가 내려올 길목을 지켜보기도 하고 어쩌다 시간이 늦어지면 공연히 양은으로 된 밥그릇을 굴리는 소리가 내 오두막에까지 들린다.

내가 주는 밥을 검둥이는 너무도 좋아해서 씹지도 않고 마구 삼킨다.

 

"검둥아, 천천히 먹어라, 천천히 먹어. 그러다가 체하겠다." 하고 일러주지만 들은 척도 하지 않는다.

삽시간에 먹어 치우고 나를 빤히 쳐다보면서 연방 꼬리를 흔들어댄다.

이런 짐승을 마주하고 있으면 내 가슴이 따뜻해진다.

 

그 대상이 짐승이건 식물이건 혹은 어항 속의 물고기이건 간에 살아있는 생명체와 가까이 사귀게 되면 딱딱하게 메마른 가슴에도 물기가 돈다.

이게 생명의 신비이고 가슴의 기능이다.

사람의 중심은 머리가 아니라 가슴이다.

우리 검둥이를 통해서 나는 요즘 그 중심을 새롭게 배우며 익히고 있다.

당신의 머리와 가슴은 그 거리가 얼마나 되는가.

 

- 법정스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