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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관련>/◆ 축일 & 성인

축일 2월 15일 성 클로드 드 라 콜롱비에르

by 파스칼바이런 2012. 6. 1.

축일 2월 15일 성 클로드 드 라 콜롱비에르

(Claude de la Colombiere)

신분: 신부, 설교가

활동연도: 1641-1682년

같은이름: 글라우디오, 글라우디우스, 글로드, 끌라우디오,

끌라우디우스, 끌로드, 콜롬비에레, 콜롬비에르,

클라우디오, 클라우디우스

 

 

성 클로드 드 라 콜롱비에르(Claude de la Colombiere)

 

성 클로드 드 라 콜롱비에르는 프랑스 그르노블(Grenoble) 근교에서 태어났고, 그의 가정은 매우 신심이 깊었고 또 유복한 가문이었다.

유아기에서 특기할만한 사항은 없지만 리옹(Lyon)의 예수회 대학에 들어가 공부하다가 수도생활에 대한 강력한 이상에 사로잡혔으나, 얼마 동안 이를 억제하다가 끝내는 입회하였다.

아비뇽(Avignon) 수도원에서 수련기를 보내고 다시 철학 과정을 이수한 뒤에는 5년 동안 교사로서 활동하였다.

 

이 당시에 아비뇽에는 정치적 불안이 일고 있었다.

그러나 이것이 잘 평정되어 아비뇽 주민들은 평화를 되찾았는데, 이때 성 프란치스코 드 살(Franciscus de Sales, 1월 24일)의 시성식과 성모 방문 수녀회의 두 수도원이 이 평화에 큰 기여를 하였다.

성 클로드는 성 프란치스코 드 살의 시성식 때 생애 처음으로 설교하는 기회를 맞이하였다.

그의 설교는 대성공이었다.

이어서 파리(Paris)로 가서 신학과정을 마쳤는데, 그곳에 머물면서 그는 프랑스의 지성이 한데 모이는 학문적 분위기에 푹 빠졌다.

그는 당시의 저명인사인 콜베르와 친분을 가졌으나 수도회 안에서는 별로 친구가 없었다. 사제로 서품된 후에는 아비뇽 대학에서 설교가로 활약하여 큰 호응을 받았다.

 

그 후 종신서원을 발하기 전에 행한 대피정에서 큰 은혜를 받았다.

그는 특히 예수성심 공경에 전념하였고, 예수님의 생애 나이와 같은 33세 때에는 세상에 대하여 더욱 철저히 죽어야 한다는 계시를 받았다고 한다.

종신서원을 발한 두 달 뒤에 그는 파레이르모니알(Paray-le-Monial)의 예수회 원장이 되었다.

이때 그는 성녀 마르가리타 마리아 알라코크(Margarita Maria Alacoque, 10월 16일)를 만나 그녀를 지도하였다.

 

그의 다음 임무는 영국에서의 선교활동이었다.

영국내의 가톨릭 입장이 최악의 상태에 빠졌을 때 성 클로드는 놀라운 성공을 거두어 영국 가톨릭 재건에 크게 이바지 하였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성공은 많은 반대자들을 만들게 되어 투옥되었다.

그는 비록 순교의 영광을 입지는 안았으나 영국에서 추방령을 받고 쫓겨나야 했다.

감옥생활로 크게 손상된 그의 건강은 최악의 상태였다.

결국 다시 프랑스로 돌아온 그는 1682년 2월 15일에 운명하였다.

 

흔히 우리는 그의 지성은 예리하였고, 판단은 정확했으며, 예술 애호가였고, 프랑스 아카데미의 올리비어 파투뤼와의 친분을 높이 칭송한다.

그는 1929년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으며, 1992년 5월 31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그는 클라우디우스(Claudius)로도 불린다.

 


 

 

 

[복자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와 함께 읽는 성인전]

성 클로드 드 라 콜롱비에르

 - 성녀 마르가리타 마리아 알라코크 수녀의 영적 지도자

번역 송영웅 바오로(봉명학원 재단이사)

 

 

예수회 사제인 클로드 드 라 콜롱비에르(Claude de la Colombiere, 1641-1682) 신부는 당시 태동되기 시작하였던 예수 성심에 대한 신심을 널리 전파하는 데 앞장섰던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클로드는 1641년 2월 2일 프랑스 리옹(Lyon) 인근의 생 생포리엥 도종(Saint-Symphorien d'Ozon)에서 태어났으며 리옹에 있는 예수회 대학에서 정식으로 교육을 받았다.

1659년 그는 예수회에 입회하여 공부를 위해 아비뇽(Avignon)과 파리(Paris)에서 유학하였으며 그 후 사제 서품을 받았다.

클로드는 그 당시 루이 14세의 재무장관 장 바티스트 콜베르(Jean Baptiste Colbert)의 아들을 가르치는 개인교수로 초빙되었을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로부터 강론을 잘하는 신부로 존경을 받았다.

 

1675년 클로드는 파레-르-모니알(Paray-le-Monial)의 예수회 원장으로 부임하였다.

그곳에서 그는 학문적인 면에서 뛰어난 재능을 발휘하였고 신앙 교리의 중요한 신조들을 철저하게 지키면서 이의 중요성을 사람들에게 널리 알렸다.

클로드는 파레-르-모니알의 예수회 원장으로 있던 당시 성모 방문 수녀회에서 마르가리타 마리아 알라코크(Margarita Maria Alacoque, 1647-1690, 1920년 시성) 수녀를 만나게 되었다. 그는 마르가리타 마리아의 고해 신부로서 그녀에게 계시된 예수 성심 신심이 널리 전파되는 일에 적극 투신하여 마르가리타 마리아를 도와주었다.

마르가리타 마리아는 환시 중에 "클로드 신부는 참으로 이상적인 그리스도의 친구로서 그는 많은 사람들을 하느님께로 이끄는 은사를 받은 사람이다"라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그 후 클로드는 장상의 명에 따라 잉글랜드로 파견되어 요크(York) 공작 부인 메리 베아트리체 데스테(Mary Beatrice d'Este, 모데나의 메리)의 지도 신부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바로 그 무렵 오츠(Titus Oates)의 '가톨릭 음모사건'이 전 영국을 광풍(狂風)에 휩쓸리게 하였다.

이 음모사건은 영국의 국교인 성공회 성직자 오츠가 꾸며낸 터무니없는 모략으로, 그는 상당수의 예수회 신부들이 성공회 신자인 찰스 2세를 암살하고 가톨릭 신자인 요크 공작을 왕으로 추대하여 영국을 다시 가톨릭 국가로 돌려놓을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자 종교문제로 불안해하고 있던 잉글랜드는 온 나라가 이 광풍에 휩쓸려 들었다.

클로드 역시 이러한 소용돌이에서 무사할 수가 없었다.

그는 요크 공작 부인에게 충실하게 봉사하는 데 대한 적개심과 세인트 제임스 궁정에서 신뢰와 존경을 받는 위치에 있다는 점 때문에 부당하게 고소를 당하였다.

그리고 투옥된 다음 심한 고문을 받았는데 특히 예수회 신부였기 때문에 더 잔혹한 고문을 받았다. 클로드 신부는 여러 사람들의 도움으로 감옥에서 풀려난 뒤 잉글랜드에서 추방되었다.

그러나 그곳에서 받은 모진 고문으로 죽을 때까지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었다.

 

1681년 클로드 신부는 파레-르-모니알로 다시 돌아왔다.

사람들은 모두 그가 비록 사형에 처해지거나 피를 흘려 순교하지는 않았지만 신앙을 증거하기 위하여 얼마나 모진 박해와 고문을 당해야 했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에 비견되는 '백색'(白色) 순교자라고 존경하였다.

클로드 신부는 무척 혹독한 고문을 받았기 때문에 온 몸이 성한 데가 없었고 죽을 때까지 심한 고통을 겪었다.

그는 기침할 때마다 폐에 고인 피가 가래와 함께 쏟아져 나오는 객혈로 선종하였는데, 그가 임종할 때까지 얼마나 큰 고통을 당하였는지는 당시 교회 안에 널리 알려져 있었다.

 

1929년 6월 16일 교황 비오 11세는 그를 복자의 반열에 올렸고 1992년 5월 31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그를 로마에서 성인으로 선포하였다.

시성식에서 교황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클로드 신부님이 서거한 지 3세기가 지났습니다. 우리는 그동안 이 신부님에게 위탁되었던 메시지가 얼마나 중요한 것이었는지를 깊이 살펴볼 수 있었습니다.

그 시대의 많은 사람들은 신앙에 매우 열성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신앙에서 멀어지고 심지어는 신앙을 버리는 사태가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모순되는 시기에 그리스도의 인성에, 그분의 현존에 그리고 무한한 사랑으로 죄인들을 용서하여 주시는 그분의 자애로우심에 초점을 맞춘 신심활동을 편 것은 매우 의미심장한 일이었습니다. …앞으로 다가올 수많은 세대의 사람들이 점점 더 믿음에서 떨어져 나가는 사태가 벌어질 것으로 예견되고 있습니다.

예수 성심 신심은 이러한 도전에 맞서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영성적으로 더욱 큰 힘을 얻고 균형 잡힌 의식으로 대처해 나가는 원천이 됩니다."

 

성 클로드 드 라 콜롱비에르 신부의 축일은 2월 15일이다.

 

* 당시 잉글랜드 왕은 성공회 신자인 찰스 2세였고 그의 동생은 왕위 계승권을 가진 요크 공작 제임스였는데 제임스는 가톨릭으로 개종하였다.

그리고 찰스 2세의 왕비 브라간자의 캐서린(Catherine of Braganza)과 요크 공작 제임스의 부인 모데나의 메리도 가톨릭 신자였다.

그래서 성공회와 개신교 신자들과 성직자들이 앞날을 불안하게 보고 있었다.

 

[교회와 역사, 2011년 9월호]

 


 

  

 

[금주의 성인] 성 클로드 드 라 콜롱비에르

(St. Claude de la Colombiere, 2월 15일)

 

 

예수성심 환시 체험한 성녀의 고해사제, 설교가로도 명성

1641~1682, 프랑스 출생 및 사망. 예수회 사제. 수도원장. 선교사.

 

성 클로드 드 라 콜롱비에르는 '예수성심의 사도'로 불리며 예수성심에 관한 환시를 체험한 성녀 마르가리타 마리아 알라코크(1647~1690, 성모방문수녀회) 수녀의 고해사제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성인은 성녀가 수도생활을 하고 있던 파라이 르 모니알 지방의 예수회 수도원 원장으로 재직 중이었습니다.

성녀는 당시 환시를 경험했다는 이유로 동료 수녀들에게 비난을 사고 구박을 받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성녀의 이야기를 들은 성인은 깊은 묵상 중에 성녀의 환시가 하느님께서 주신 계시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성인은 이후 성녀의 환시가 공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도록 도왔습니다.

성인 역시 예수성심 신심의 열렬한 수호자가 돼 이에 관한 책을 저술하는 등 예수성심을 널리 알리는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교황 클레멘스 13세는 1765년 예수성심을 공경하는 축일을 공식적으로 선포했고,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1995년 '사제들에게 보내는 성 목요일 교황 서한'을 통해 예수성심대축일을 기리며 '사제 성화의 날'로 지낼 것을 권고했습니다.

 

성인은 생전에 많은 이들에게 존경을 받거나 '살아있는 성인'으로 추앙받은 인물은 아니었습니다.

그의 존재는 성녀 마르가리타 마리아 알라코크가 1920년 시성되면서 대중에게 알려졌습니다.

 

성녀의 고해사제로만 알려졌던 콜롱비에르 신부의 삶은 그가 남긴 기록들이 밝혀지면서 그가 완덕의 경지에 오른 성직자였다는 것이 드러났습니다.

 

성인은 프랑스 귀족 집안에서 태어나 17살 때 예수회에 입회했고 대학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했습니다.

이후 사제품을 받은 성인은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명강의로 이름을 떨쳤습니다.

 

성인는 항상 자신이 하느님께 맞는 사람인지 고민하며 고통스러워했고 매일 참회와 속죄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이런 고민을 기록해 놓은 자료들에선 그의 영성을 엿볼 수 있습니다.

 

성인은 설교가로 명성을 얻어 영국으로 건너갔습니다.

청교도혁명 이후 프로테스탄트 세력이 확장되던 때에 성인은 가톨릭 정통 교리와 예수성심을 전하며 교회를 떠난 이들의 마음을 되돌렸습니다.

 

하지만 주위 사람들 모함으로 감옥생활을 하게 됩니다. 이 때 성인 건강은 크게 악화됐고 프랑스로 돌아온 뒤 곧 세상을 떠났습니다.

성인은 1992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됐습니다.

 

[평화신문, 2011년 2월 13일, 박수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