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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일 2월 27일 성 가브리엘 포센티(Gabriel Possenti) St. Gabriel Possenti St. GABRIEL of Our Lady of Sorrows San Gabriele dell’Addolorata Religioso 신분: 수사, 신학생 / 활동연도: 1838-1862년 같은이름: 가별, 뽀센띠, 뽀센티
성 가브리엘 포센티(Gabriel Possenti)
1831년 3월 1일 이탈리아의 아시시(Assisi)에서 법률가인 산테 포센티(Sante Possenti)의 13남매 중 11번째로 태어난 성 가브리엘 포센티는 프란치스코(Franciscus)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부유하고 신심 깊은 가정에서 성장한 그는 4살 때에 어머니를 잃고 큰누나 밑에서 자랐으나 그 누나가 콜레라로 사망하자 큰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그의 부친이 스폴레토(Spoleto)의 세액 사정관으로 임명되자 그는 예수 고난회에 입회할 때까지 그곳에서 살았다. 그곳의 예수회 대학교에서 공부한 그는 매우 지성적이며 능력이 뛰어났고, 문학과 예술에도 놀라운 재능을 보였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깊은 신앙심과 성모님에 대한 신심,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높은 애정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1857년 9월 22일 첫 서약을 하면서 그에게는 '성모 통고의 가브리엘'(Gabriel a Virgine Perdolente)이라는 수도명이 주어졌다. 그는 이때부터 사소한 일에서도 완덕을 얻으려는 특별한 노력으로 일생을 살았다. 그의 밝은 성품, 기도 정신, 다른 이들에 대한 배려, 규칙 엄수, 육체적으로 그리스도의 고난을 닮으려는 열망이 그의 모든 생활에서 빛을 발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짧은 수도생활에도 불구하고 높은 완덕을 닦을 수 있었다.
1861년에 소품들을 받은 그는 대품을 받을 준비를 계속하였지만 6년 동안의 수도생활로 체력이 소진되어, 1862년 2월 27일 이탈리아 테라모(Teramo) 지방의 이솔라 델 그란 사소(Isola del Gran Sasso)에서 결핵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유해는 수도회가 이솔라 델 그란 사소에서 운영하는 피정의 집 성당에 안치되었으며, 지금까지 그곳에 남아 있다. 이후 그의 무덤에서는 수많은 기적이 일어났다. 성녀 젬마 갈가니(Gemma Galgani, 4월 11일)가 그에게 기도함으로써 치유된 일도 있었다.
그는 1908년 5월 31일 로마의 바티칸 대성전에서 교황 성 비오 10세(Pius X)로부터 시복되었고, 1920년 3월 13일 교황 베네딕투스 15세(Benedictus XV)에 의해 시성되었고, 아브르초(Abruzzo) 지방의 수호성인이며, 청소년, 특히 수련자와 신학생들의 수호성인으로 선포되었다. 이탈리아에서 그는 가톨릭 활동에 참여하는 젊은이들의 수호성인으로 공경을 받고 있다.
[금주의 성인] 성 가브리엘 포센티 (St. Gabriel Possenti, 2월 27일)
몸은 약했지만 신심만은 강해 예수 고난회 입회, 모범적 생활하며 고통에도 미소 잃지 않아
1838-1862. 이탈리아 출생 및 사망. 예수 그리스도 고난 수도회 수련자. 가톨릭 청년과 신학생의 수호성인.
성 가브리엘 포센티는 25살에 짧은 생을 마감한 성인입니다. 그는 18살에 예수 고난회에 입회하기 전가지 부잣집 아들로 아쉬울 것 없는 삶을 살았습니다.
머리도 좋고 학업성적도 뛰어나던 그는 문학과 예술분야에도 재능을 보였습니다. 모든 것을 다 가진 듯 보였지만 하느님께서 건강만은 허락지 않으셨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몸이 약해 자주 아프곤 했던 그는 아플 때마다 '하느님, 제 병을 낫게 해주시면 꼭 하느님께 저를 봉헌하겠습니다.' 하고 기도했습니다.
하지만 몸이 조금 좋아지면 언제 그런 기도를 바쳤냐는 듯 생활했습니다. 그러나 성인의 기도를 잊지 않으신 하느님은 결국 성인을 성소의 길로 이끄십니다.
성모 행렬이 성인 앞을 지나갈 때 성인은 성모께서 '왜 네가 이 세상에 태어났는지 아느냐'고 물으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날 이후 성인은 세속의 즐거움에 빠진 자신을 돌아보게 됩니다. 그리고 아플 때마다 자신이 바쳤던 기도를 떠올리며 하느님 아들로, 하느님을 증거하는 삶을 살기로 결심합니다.
성인은 1856년에 예수 그리스도 고난 수도회(예수 고난회)에 입회해 그 누구보다 수도회 규칙을 철저히 따르며 모범적 생활을 합니다. 수도원 내에서 기도생활과 묵상, 단식과 고행을 하는 데 그를 따를 사람이 없었습니다. 몸이 약한 그를 걱정한 수도원장이 그에게 단식을 그만둘 것을 요청할 정도였습니다.
수도생활 내내 결핵으로 고생했던 그는 아픈 와중에도 밝은 미소를 잃지 않았습니다. 사제품을 준비하던 그는 결국 지병으로 숨을 거두고 맙니다. 이후 그의 전구로 많은 치유 기적이 일어났는데, 성녀 젬마 갈가니도 성인 전구로 병이 나았다고 합니다.
성인은 1920년 교황 베네딕토 15세에 의해 시성됐고, 교황은 성인을 가톨릭 청년과 신학생의 수호성인으로 선포했습니다. 성인은 통고의 모후 성 가브리엘(St. Gabriel of Our lady of Sorrow)로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이탈리아 아부르초 그랑사쏘 지방에 있는 성인 성지에는 해마다 많은 순례객과 관광객이 찾고 있습니다.
[평화신문, 2011년 2월 27일, 박수정 기자]
성 가브리엘 포센티(Gabriel Possenti)
그는 통고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성 가브리엘인데 많은 점, 특히 쾌활한 성격, 완덕에의 열심, 돌연한 회개 등으로 그가 그 고향의 선배 프란치스코와 흡사하다는 것을 대단해 흥미 있는 점이라 할 수 있다.
통고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성 가브리엘은 1838년 3월 1일 전술한 바와 같이 아시시에서 출생하여 속명을 프란치스코라고 했다. 그는 열세 아들 중 열한째로 아버지는 아시시의 시장이었고, 어머니도 경건하고 교양 있는 사람이라 아이들의 교육에 부족한 점이 없었지만 불행이라고 할 것은 프란치스코가 아직 4세밖에 안 되었을 때 훌륭한 어머니를 여읜 일이다.
어렸을 때의 프란치스코는 극히 활발하면서 성격이 드세고 거칠어 화를 잘 내는 점이 있고 해서 나중에 그가 성인이 되리라고는 그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의 교육을 맡아 본 어느 한 교사의 지도로 그는 점차 자기의 결점을 고치고 장점을 발휘하여 예수회의 학교에 들어간 후부터는 성격이 완전히 달라졌다.
본래 수재였던 그는 학교 성적도 대단히 좋아 가끔 수석을 차지하고 친구들 사이에서도 인망이 두터웠으므로 자연히 이 세상의 명예나 교제의 오락에 애착을 갖게 되었다. 또한 음악에 대한 재주나 광대한 지식 등이 상류 사교계(社交界)에도 출입하는 기회를 주었으므로 점점 사치함과 관극(觀劇)기타 쾌락에 취미를 갖게 되었다.
이와 같이 세속적인 사물에 몰두하면서도 타락의 길에는 떨어지지 않고 그의 영혼을 정결하게 보존할 수 있었다는 것은 참으로 다행으로 생각한다. 그는 종교상의 책임에도 결코 소홀히 하지 않았다.
하느님께서 그를 깨우쳐 주실 때가 다가왔다. 그가 세속적 쾌락에 빠져 있을 때 갑자기 병에 걸려 중태에 빠진 일이다. 그는 그때 비로소 이 세상의 허무함과 현세 사물의 허망함을 깨달아 만일 자기 병이 낫는 다면 반드시 수도원에 들어가 일생을 하느님께 봉헌하겠다고 굳게 약속했다.
기적과도 같이 그의 중병은 낫게 되어 전과 같은 건강한 상태로 돌아갔다. 그러나 인간은 연약하여 전과같이 건강하게 되니 전에 누리던 쾌락에 다시 마음이 기울어져 약속한 것도 잊어버린 듯 돌보지 않았다. 이것도 하느님의 섭리였다. 그는 오래지 않아 다시 병을 얻어 이번에는 생명이 대단히 위험했다. 목이 부어 올라 숨이 막혔기 때문이다.
어느 날 밤, 고통이 아주 심해 견딜 수 없었을 때 그는 예수회의 순교자 성 안드레아 보볼라의 상본을 들어 자기 목에 대고 그분의 전구로 이 병이 낫기만 하면 이번에는 틀림없이 수도원에 들어갈 것이라고 약속했다.
프란치스코는 다음날 즉시 예수회 수도원장을 방문하고 입회 허락을 청했지만, 지금까지 너무 세속적인 생활을 했기에 원장도 그의 진의(眞意)를 의심하여 고려해 보겠다고 약속하고 일단 집으로 돌려보냈다. 그 동안 프란치스코도 생각을 달리해 예수회보다 더 엄격한 십자가의 성 바오로가 창립한 예수 고난회에 들어가기로 결심했다.
성모 승천 대축일에 있었던 일이다. 과거 스보레도에 한창 유행했던 콜레라가 성모님의 전구로 소멸되었다는 이유로 이날 많은 시민들의 사은 행렬(謝恩行列)이 대대적으로 거행될 때 프란치스코는 행렬 중 대주교께서 모셔 들고 있는 성모상을 쳐다보니 그의 입이 움직이며 동시에 "프란치스코야, 어찌하여 세속을 버리기를 주저하고 있느냐?" 하는 말씀이 들리는 것 같았다.
그는 극히 감동되어 즉시 아버지께 자기의 결심을 말했다. 아버지는 장차 자기 직업의 후계자로 삼을 생각을 하고 있었기에 의외의 아들의 말을 듣고 매우 놀랐지만 하루 종일 열심히 기도하며 생각한 결과 그것이 하느님의 성의라는 것을 깨닫고 마침내 허락했다.
2, 3주간 후 프란치스코는 예수회 학교를 졸업했다. 여느 때와 같이 좋은 성적을 올린 그는 졸업생을 대표해 재주 있는 웅변으로 영광된 답사를 하여 사람들의 칭찬을 받았지만 이튿날 즉시 스보레도를 떠나 모로발레에 가서 거기에 있는 예수 고난회에 들어갔다.
그때까지 아무에게도 수도회 입회 사실을 말하지 않았으므로 많은 사람들이 놀라며 "일시적인 마음으로 수도원에 들어간 것 같으니 오래가지 못하리라. 곧 염증이 나서 도망쳐 나올 것이다"라고 생각했다. 그 예상은 맞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참된 열심을 가졌으므로 입회 11일째 되는 날 수련자가 되는 허락을 받아 미사 중에 예수 고난회 수도복을 입고 수도명으로 통고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가브리엘이라는 이름을 받았다.
The Seven Sorrows of the Virgin-DURER, Albrecht. c.1496. Oil on panel, Alte Pinakothek, Munchen and Gemaldegalerie, Dresden
그는 자기 자신을 수사들 중에서 제일 낮은 사람이라는 생각으로 형제들에게 봉사하고, 어려운 일이라도 자진해 맡아서 하고, 종종 있는 엄한 질책, 주의, 훈계도 감사하는 마음으로 들으며 수도 생활에 최선을 다했다.
이런 일들은 지금까지 세속에 있으면서 늘 남보다 나았던 안락한 생활과 모든 칭찬과 명예와 인망을 한 몸에 지니고 있던 그에게는 얼마나 힘들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는 일단 수도 생활을 결심한 이상 어떠한 희생을 치르더라도 완덕에 까지 도달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굳은 의지를 갖고 있었다.
예수 고난회의 목적은 주님의 수난에 대한 특별한 신심을 갖고 주님께 대한 사랑과 존경을 드린 것은 물론 통고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께 대한 신심도 뛰어났다.
그가 성모 마리아를 얼마나 사랑했는가는 "성모 마리아는 내 마음의 마음, 내 혼의 혼, 이 세상에서의 내 천국"이라고 한 말로써도 가히 할 수 있다. 실제로 그가 덕행의 길을 꾸준히 걸어갈 수 있었던 것은 성모님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매일을 하느님과 함께, 회칙을 세밀한 점에까지 충실히 지키며 6년의 세월을 보낸다. 그때 신학, 철학 공부도 거의 마치고 다음해 성탄절에 성품 성사의 하품인 4품까지 받기로 되어 있었지만 주님의 섭리로 폐렴에 걸려 병고를 잘 참아내다가 1862년 2월 27일 마침내 영원한 행복의 나라로 떠났다. 그때 그의 나이는 24세였고, 세상을 떠난 후 많은 기적이 그의 전구로 일어났으므로 1908년에는 복자품에, 1920년에는 성인품에 올랐다.
(대구대교구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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