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일 6월 1일 성 안니발레 마리아 디 프란챠 (Hannibal Mary di Francia) 신분: 신부, 설립자 활동지역: 메시나(Messina) 활동연도: 1851-1927년 같은이름: 메리, 미리암, 프란치아, 프란치아, 한니발
메시나의 성 안니발레 마리아 디 프란챠(Annibale Maria di Francia)
성 안니발레 마리아 디 프란챠(Annibale Maria di Francia)는 1851년 7월 5일 이탈리아 시칠리아(Sicilia) 섬의 메시나에서 태어났다. “추수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적으니 그 주인에게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달라고 청하여라.”(마태 9,37-38; 루가 10,2)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그가 젊었을 때부터 그의 영성과 사목의 샘이었다. 1878년 사제 서품을 받은 후부터 그리스도의 사제로서, 고아들과 가난한 이들의 아버지로서의 삶이 시작되었다. 안니발레 신부는 성체 안에 현존하시는 예수 성심에 대한 뜨거운 사랑으로 힘없고 어려움에 처한 이들에게 ‘하느님과 이웃’이라는 이상을 실현시키며 헌신적으로 복음을 전파하였다.
특히 목자 없는 양과 같이 버려진 사람들을 바라보며, 그들을 위해서 일할 일꾼들을 교회에 보내달라고 하느님께 청하는 기도(로가테, Rogate)의 확산을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안니발레 신부는 그리스도의 이 말씀을 실현하기 위해 ‘거룩한 열정의 여자 수도회’와 ‘로가치오니스티 남자 수도회’를 설립하였다. 그의 이러한 노력은 1964년 교황 바오로 6세(Paulus VI)가 ‘전세계가 성소를 위해서 기도하는 날’(성소주일)을 제정함으로써 그 결실을 맺었다. 복음의 덕을 평생 동안 산 안니발레 신부는 1927년 6월 1일 메시나에서 선종하였다. 1990년 10월 7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복자품에 오른 안니발레 신부는 ‘현대 성소 사목의 선구자’와 ‘고아들과 가난한 이들의 아버지’로서 인정을 받았으며, 2004년 5월 16일 바티칸의 성 베드로 광장에서 같은 교황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영성의 길 수도의 길] 거룩한 열정의 딸 수도회 하느님 일꾼으로 살며 성소 위해 끊임없이 기도
청빈, 정결, 순명 외 성소 청하는 '로가테' 서원 1987년 진출...그룹홈, 유치원, 어린이 집 운영 선교사, 교육자, 청소년 지도자, 어머니로 살아
2002년 어느 추운 겨울날, 내복 한 장만 달랑 입은 6살 남자아이가 혼자 서울 동작구 사당동 '거룩한 열정의 딸 수도회' 대문을 두드렸다. 수녀들은 아무것도 먹지 못해 비쩍 마른 아이에게 음식을 챙겨 먹이고 아이 부모를 찾아 나섰다. 인근 주택가를 수소문한 끝에 찾아낸 아버지는 심각한 알코올 중독으로 자기 자신조차 돌볼 수 없는 상태였다. 어머니는 오래 전에 집을 나가 소식을 알 수 없다고 했다.
아이를 그대로 방치할 수 없어 몇 달 동안 수녀원에서 데리고 살았다. 이를 계기로 결손가정 자녀들을 위한 그룹홈(공동생활가정)인 '마드레 나자레나의 집'(서울 강서구 화곡본동)이 시작됐다. 수녀들은 이런 저런 이유로 친부모와 함께 살 수 없는 불우한 환경의 아이들을 돌봐주는 사도직에 나서기로 결정한 것이다. 수도회 초대 총장 수녀 이름을 딴 마드레 나자레나의 집에서는 가정 해체나 방임 등으로 어린 나이에 큰 상처를 입은 아이들이 수녀들의 헌신적 보살핌으로 구김살 없이 밝게 자라고 있다.
하느님 섭리에 의탁하며 참 된 일꾼 되고자 노력
"그 아이를 우리 수녀원으로 보내신 것은 분명 하느님 섭리일 거예요."
사당동 공동체 원장 김순이(클라라) 수녀의 말에 십분 공감했다.
수도회 설립자 성 안니발레 마리아 디 프린치아(1851~1927) 신부도 하느님 섭리에서 비롯된 소중한 순간을 놓치지 않았고 수도회 설립으로 그 결실을 이뤄냈다. 그는 사제품을 받기 몇 달 전 우연히 눈먼 거지를 만나는 순간 자신을 온전히 내맡기기로 결심하고 평생 고아와 가난한 이들의 아버지로서 삶을 살았던 것이다.
아파트와 빌라가 밀집한 주택가에 자리 잡은 거룩한 열정의 딸 수도회 본원을 찾아가던 날은 장맛비가 요란하게 쏟아지고 있었다. 장대비 사이로 '송림유치원' 간판이 보인다. 1~2층은 유치원, 3~5층은 수녀원과 개인 피정을 위한 공간이다.
유치원 복도를 가로질러 수녀원으로 들어간다. 교실에서는 연신 '까르르'하는 어린이들 웃음소리가 새어 나온다. 2층 기도방에서 박인혜(요안나, 유치원 원장) 수녀가 혼자 성체조배를 하고 있는데 한 남자 아기가 살며시 들어와 박 수녀 옆에 앉더니 두 손 모아 '기도손'을 한다.
유치원 운영은 수녀들이 한국에서 선택한 첫 사도직 활동이다. 영어유치원을 선호하는 요즘 추세에도 인성교육과 창의성ㆍ독립성을 길러주는 몬테소리 교육을 추구하는 확고한 교육철학에 힘입어 '동작맘'(동작구지역 엄마)들이 '강추'하는 명문 유치원으로 통한다. 또 강서구 화곡동에서 구립 은도어린이집을 수탁 운영하고 있다.
본원 4층은 잠시 일상을 떠나 고요와 침묵 속에서 하느님을 만나고 기도 맛을 느끼며 재충전의 시간을 갖도록 미혼여성들을 위한 주말 개인피정과 소규모 위탁피정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여기까지만 보면 지금까지 소개한 다른 여러 수도회와 크게 다를 바 없어 보인다.
성소의 은총을 청하는 기도 사도직
"우리 수도회의 가장 중요한 사도직은 교회가 꼭 필요로 하는 일꾼들을 보내 달라고 성소의 은총을 청하면서 끊임없이 하느님께 기도하는 삶을 살아가는 일이에요. 회원들은 청빈ㆍ정결ㆍ순명 세 가지 서원과 함께 성소를 청하는 기도의 사도직으로 '로가테(Rogate, 청하여라) 서원'을 합니다."
설명을 듣고도 알듯 모를 듯하다. 김 수녀에게 구체적 설명을 부탁했다.
"우리가 아는 것처럼 오늘날 세계 여러 교회에서는 성소자 부족 문제가 심각합니다. 설립자 신부님은 일찍이 '성소는 은총처럼 위에서부터 내려온다. 그리고 청하지 않으면 내려오지 않는다. 성소 위기는 기도로 해결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어요. 우리 수도회 모토인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마태 9, 38)는 말씀은 주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내리신 명령이자 권고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든 기도의 시작과 끝에 '주님! 성 사도들을 당신의 교회에 보내주옵소서'하고 기도합니다."
'청하여라(Rogate)'는 무언가 꼭 필요로 할 때 드리는 기도를 말한다. 이 거룩한 소명에 응답하기 위해 '거룩한 열정의 딸'들은 하느님 나라를 위해 자신을 봉헌할 일꾼(사제, 수도자, 선교사, 좋은 부모 등)을 보내달라고, 그리고 이들의 성화를 위해 매일 끊임없이 기도하는 삶을 살아간다. 또 사제성소나 수도성소뿐 아니라 젊은이들이 각자 삶의 자리에서 자신의 성소를 발견하고 그 부르심에 응답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수도자들 스스로 하느님의 좋은 일꾼으로 살고자 선교사ㆍ교육자ㆍ청소년 지도자ㆍ고아들의 어머니로서, 가장 버림받은 이들을 위해 봉사한다. 사도직 활동은 시대 상황이나 교회 필요에 의해 다양하게 실현될 수 있지만 성소를 위한 기도 사도직, 즉 '로가테(Rogate)' 영성은 냉장고ㆍ에어컨 등 가전제품을 작동하게 하는 '전기'처럼 수도자들의 일상 안에 변함없이 흐르고 있다.
이탈리아 로마에 본부를 둔 거룩한 열정의 딸 수도회는 성 안니발레 신부 탄생 100주년이 되는 1951년 브라질을 시작으로 전 세계 15개국에 진출해 600여 명 회원들이 성소를 위한 기도, 교육, 사회복지 등 다양한 사도직을 수행하고 있다.
한국에는 1987년 수도회 설립 100주년을 기념해 진출했다. 현재 한국인 회원 수는 19명이다.
수도회 영성과 역사 "주인님께 일꾼을 청하여라"
1887년 이탈리아 성 안니발레 신부가 설립 1900년 성소 후원 청원회가 성소주일 기원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마태 9, 38).
설립자 성 안니발레 신부는 1851년 7월 5일 이탈리아 메시나 귀족가문에서 태어나 18살에 성소에 눈을 떠 1878년 사제품을 받았다.
그는 부제 때 우연히 시각장애인 거지를 만나 쥐들이 득실거리고 빈민 수백 명이 더러운 쓰레기와 뒤범벅이 된 채 살고 있는 교외 빈민촌을 처음으로 방문하게 된다. 이곳에서 큰 충격을 받고 가난한 이들을 위한 목자가 되기로 결심했다.
그는 사제품을 받은 후 즉시 버림받은 이에게 달려갔다. 주위에서는 "저 신부는 미쳤다. 사제직에 먹칠을 하고 있다"는 비난을 서슴지 않았다. 그러나 젊은 사제의 가난한 이들에 대한 사랑은 험담과 반대가 크면 클수록 오히려 더 깊고 뜨거워졌다. 그는 성체 안에 현존하는 예수성심에 대한 사랑으로 힘없고 어려움에 처한 이들을 위해 헌신하며 '가난한 이들의 아버지'로 공경 받았다.
안니발레 신부는 목자 없는 양과 같이 버려진 사람들을 위해 자신을 봉헌할 성직자ㆍ수도자가 많아져야 한다는 필요성을 느껴 '거룩한 열정의 딸 수도회'(1887년)와 '예수 성심의 로가찌오니스티 수도회'(1897년)를 설립했다. 그는 늘 교회를 위해 일할 일꾼들을 보내달라고 청하는 기도를 바쳤고 하느님은 이 기도를 언제나 들어주셨다. 주변에는 늘 그를 돕는 이들이 넘쳐났다.
그는 또 하느님께 성소를 청하는 기도에 동참하는 사람들을 모아 1900년 '성소 후원 청원회'를 만들었다. 이 같은 노력은 역대 교황들에게서 격려를 받았고 1964년 성소주일(전 세계가 성소를 위해 기도하는 날) 제정으로 열매를 맺었다.
1927년 선종한 성인은 1990년 10월 복자 반열에 올랐고, 2004년 5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됐다.
※ 성소문의 : 02-584-6367 http://cafe.daum.net/fdzelo http://fdz-rogate.or.kr
[평화신문, 2011년 7월 24일, 서영호 기자]
복자 안니발레 신부 16일 시성 거룩한 열정의 여자 수도회와 로가찌오니스티 남자 수도회 창립자
거룩한 열정의 여자 수도회와 로가찌오니스티 남자 수도회 창립자인 복자 안니발레 마리아 디 프란챠 신부(사진)가 16일 교황청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성인품에 오른다.
성인품에 오르는 복자 안니발레 신부는 1851년 7월5일 이탈리아 메시나 귀족가문에서 태어나 18세에 성소에 눈을 떠 1878년 사제품을 받았다. 이후 성체 안에 현존하는 예수성심에 대한 사랑으로 힘없고 어려움에 처한 이들에게 '하느님의 이웃'이라는 이상을 실현시키며 빈민가 사람들을 위해 헌신하며 복음을 전파했다. 특히 '청하여라(Rogate)'라는 복음 말씀으로 성소 계발을 위해 부단히 노력했으며 1887년 거룩한 열정의 여자 수도회를, 1897년 로가찌오니스티 남자 수도회를 각각 창설했다. 1927년 선종한 안니발레 신부는 1990년 10월 복자품에 올랐다.
안니발레 신부의 영성을 따라 사는 수도자들은 현재 전 세계 14개국에 진출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한국에는 1986년 수도회 창립 100주년을 맞아 거룩한 열정의 여자 수도회가, 2003년에는 로가찌오니스티 남자 수도회가 각각 진출했다.
여자 수도회는 서울 사당동과 화곡동 중심으로 유치원과 어린이집을 운영하고 있으며, 소년소녀가장들을 위한 공동생활가정을 꾸려나가고 있다. 종신·유기서원자 16명, 수련·지원자는 3명이다. 지난해 진출한 남자수도회는 현재 이탈리아, 필리핀, 한국 사제 1명씩 모두 3명이 서울에서 공동체를 이뤄 활동하고 있다.
거룩한 열정의 여자 수도회와 로가찌오니스티 남자 수도회는 창립자 시성을 기념, 오는 6월 1일 오후 3시 서울 사당5동성당에서 서울대교구 이한택 주교 집전으로 축하미사를, 6월 6일 오전 11시 서울 봉천8동성당에서 기념미사를 각각 봉헌한다.
[평화신문, 2004년 5월 16일]
[금주의 성인] 성 안니발레 마리아 디 프린치아 (St. Annibale Maria di Francia) 로가테 기도 힘으로 사목, 청원기도에 강한 믿음, 빈민사목 사제성소에 힘써
1851~1927. 이탈리아 출생 및 선종. 사제. 수도회 설립.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마태 9,38 ; 루카 10,2).
성 안니발레 사제의 삶을 하느님께로 이끌어준 성경 구절입니다. 성인은 특히 '청하여라'는 뜻의 라틴어 로가테(rogate)를 자신의 사목표어로 삼고 평생 하느님께 청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매일 성체를 모실 정도로 신심이 깊었던 그는 17살 때 성경을 읽다 '주님께 일꾼을 보내달라고 청하여라'는 구절에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하느님께 봉헌하고 이 말씀을 실천하며 살 것을 다짐했습니다.
성인은 사제품을 받기 몇 달 전 우연히 시각장애인 거지를 만나 교외 빈민촌을 처음으로 방문합니다. 부유한 집안에서 자란 성인은 빈민촌 현실에 큰 충격을 받고 이들을 위한 목자가 되기로 결심합니다.
성인은 사제품을 받자마자 빈민촌에 들어가 생활하며 가난한 이들을 위한 사목에 앞장섰습니다. 특히 고아원을 지어 버려진 아이들을 돌보는 데 헌신했습니다. 때문에 성인은 가난한 이들의 아버지로 공경받았습니다.
성인은 늘 교회를 위해 일할 일꾼들을 보내달라고 청하는 기도를 바쳤고 하느님께선 이 기도를 언제나 들어주셨습니다. 주변에는 늘 그를 돕는 이들이 넘쳐났습니다.
성소문제에 있어서도 '로가테' 기도를 바치며 사제양성에 각별한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그는 거룩한 사제가 세상을 구원할 수 있다는 강한 믿음으로 신학생들에게 기도와 영성생활을 강조했습니다.
또 신자들에게 하느님께 사제성소를 청하는 기도를 바칠 것을 당부하며 성소를 위한 기도를 바치는 모임을 만들기도 했는데 이같은 노력은 1964년 성소주일(전 세계가 성소를 위해 기도하는 날) 제정으로 열매를 맺었습니다.
성인은 로가테 말씀을 살기를 원하는 이들과 함께 '거룩한 열정의 여자수도회'(1887년)와 '로가치오니스티 남자수도회'(1897년)를 설립했습니다. 1927년 선종한 성인은 2004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됐습니다.
[평화신문, 2011년 5월 29일, 박수정 기자]
[영성의 향기] 수도회 창설자를 찾아서 성 안니발레 마리아 디 프란챠 거룩한 열정의 수녀회 설립
사람은 때로 자기 인생의 방향을 틀어놓는 획기적인 ‘전환점’을 맞게 된다. 여태까지 살던 생활방식을 바꾸고 새로운 삶의 형태로 돌입하게 하는 접점(接點)을 경험한다. 다마스커스로 가던 사도 바오로가 예수 그리스도의 빛을 받던 순간처럼 그렇게 극적이지는 않다고 할지라도, 크든 작든 간에 이런 전환점은 우리로 하여금 지난 과거를 돌아보게 하고 새로운 미래를 설계하게 한다. 신앙인들은 이 전환점을 회개의 순간, 은총의 순간이라고도 하고 ‘거듭난다’는 표현을 쓰기도 한다.
1851년 이탈리아에서 태어난 성 안니발레 마리아 디 프란챠(1851-1927) 신부는 평생 동안 두 번의 큰 전환점을 맞았다. 그는 하느님의 섭리에서 비롯된 이 소중한 순간을 놓치지 않았고 ‘거룩한 열정의 수녀회’와 남자수도회인 ‘로가찌오니스티회’ 설립으로 그 열매를 맺었다.
안니발레 프란체스코 공작과 토스카나의 네 자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두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23세에 젊은 과부가 된 어머니 슬하에서 자랐으나 시토회가 운영하는 학교에 입학, 훌륭한 영적 지도를 받음으로써 매우 영특하고 신심 깊은 어린이로 성장하게 된다.
그러나 안니발레는 수도회 탄압으로 15세 때 그 학교를 떠나야 했고, 다시 한 시인이 운영하던 학교에 들어갔다. 그곳에서 그는 작가로서의 성공을 꿈꾸며 문학에 심취했다. 지적이고 강한 의지력을 지녔던 안니발레는 사냥과 체스 게임을 멋지게 즐길 줄 아는 유망한 상류층 청년이었다. 하느님은 이런 안니발레를 뜻하지 않은 때 사제직에로 불렀다. 그는 훗날 이렇게 기록했다.
“내 성소에는 세 가지 특성이 있다. 그것은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석조건축과 자유주의 시대의 내 종교를 사랑했고 사제가 될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또 그것은 불가항력적이었던 것이다. 나는 은총의 힘을 거역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끝으로 그것은 확실했던 것이다. 하느님이 나를 위해 계획한 성소에 대해 조금의 의심도 없었다.”
안니발레의 두 번째 전환기는 그가 부제가 된 지 얼마 되지 않아 다가왔다. 당시 아비뇨네라고 불리던 빈민가는 쥐들이 득실거리고 수백 명의 빈민이 더러운 쓰레기와 뒤범벅이 된 채 살고 있어 ‘인간 짐승의 무리를 마구간에 넣어 놓은 듯한 지긋지긋한 곳’이라는 별명이 붙어 있었다. 그곳에서 안니발레는 한 눈먼 거지를 우연히 만났는데 바로 이 만남을 통해 그는 앞으로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분명히 인식하게 된 것이다.
1878년 안니발레는 모든 이의 축복 속에 사제서품을 받았다. 사람들은 그가 본당에서 안정된 사목활동을 하기를 기대했으나 그는 서품 후 즉시 버림받은 이에게로 달려갔다. 주위에서는 “저 신부는 미쳤다. 사제직과 자기 가정에 먹칠을 하고 있다”는 비난을 서슴지 않았다. 초라한 옷차림, 뒤축이 닳아 해진 신을 신고 다니며 복음을 전한 한 젊은 사제의 가난한 이들에 대한 사랑은 험담과 반대가 크면 클수록 오히려 더욱 깊고 뜨거워졌다.
그는 불쌍하게 버려진 고아들을 돌보기 위해 1887년 ‘거룩한 열정의 수녀회’를 설립했고 그로부터 10년 후에는 남자 수도회인 ‘로가찌오니스티회’도 창설했다. ‘로가찌오니스티’라는 이름은 안니발레의 영성을 단적으로 드러내준다. “추수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적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추수 주인에게 빌어 그의 추수밭에 일꾼들을 보내시라고 하시오”(마태 9,38)라는 복음 말씀은 그의 온 생애를 지탱한 축이었다.
‘청하여라(로가테)’로 시작되는 이 말씀을 안니발레는 한 순간도 잊지 않았다. 그는 동시에 이 말씀이 권고이자 명령이라는 것을 깨닫고 하느님 나라 확장을 위해 일할 일꾼을 계속 보내달라고 끊임없이 간청했다. 이와 같은 영성은 후대 회원들에게는 성소를 위한 기도 사도직과 제4허원으로 자리잡고 있다.
“성소 위기는 기도로 해결해야 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친히 명하고 지적해준 것이기 때문에 틀림없는 치료약이며 구제책입니다. 성소는 은총처럼 위에서부터 내려오는 것입니다.” 안니발레는 이 기도에 동참할 사람들을 모아 1900년 ‘성소 후원 청원회’를 조직하기도 했다. 이 사업은 교황 레오 13세를 비롯한 역대 교황으로부터 격려를 받았으며, 한 주교는 “안니발레 신부는 우리 모두로 하여금 기도하도록 무릎을 꿇린 사람이다”라고 말했다.
착하고 부지런한 일꾼은 자신들의 편안함이나 안위를 추구할 틈이 없다. 일꾼의 성실성은 그들이 얼마나 주인을 위해, 그리고 이웃을 위해 일했는가 하는 점으로 평가된다. 안니발레 신부는 성소의 소중함을 가슴 깊이 간직한 채 평생 가난한 이들을 위해 헌신했다. 그리고 성소의 보석은 구체적인 희생과 인내, 가난한 이들에 대한 봉사가 수반될 때 그 찬란한 빛을 발한다는 것을 자신의 삶을 통해 말하고 있다.
안니발레 마리아 디 프란챠 신부는 2004년 시성되었기에 복자에서 성인으로 수정함
[평화신문, 1996년 12월 15일, 남기은 기자]
[영성의 향기를 따라서] 거룩한 열정의 수녀회 (상) 희생, 가난한 이들 위한 봉사 통해 하느님의 참된 일꾼되고자 노력
1887년 복자 안니발레 마리아 디 프란차 신부에 의해 이탈리아에서 창설된 '거룩한 열정의 수녀회'는 "추수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적으니 그 주인에게 추수할 일꾼을 보내 달라고 청하여라"는 마태오 복음 말씀을 그리스도께로부터 받은 수도회 설립의 은총, 카리스마(carisma)로 받아들이고 있다.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과 치열한 생존경쟁 사회에서 낙오된 사람들, 정신적 소외감으로 고립되어 사는 사람들, 그리하여 그 고귀한 삶을 피기도 전에 포기하는 사람들을 초대해야 할 그리스도의 복음 전파자들이 부족한 상황을 수도회가 펼쳐나가야할 가장 기본 소명으로 인식한다는 것이다.
곧 '청하여라(Rogate)'로 시작되는 그 말씀은 거룩한 열정의 수녀회 회원 모두에게 명령이자 권고이며 하느님 나라 확장을 위해 일할 일꾼을 보내 달라고 끊임없는 간청으로 이어진다.
이와 같은 영성으로 회원들은 청빈 정결 순명의 서원과 함께 성소를 위한 기도의 사도직으로서 청하여라 (Rogate)를 제4서원으로 삼고 있다.
'청하여라' 영성은 거룩한 열정의 수녀회의 고유한 색깔이다. 사도직은 그 시대의 상황이나 요구, 교회의 필요에 의해 다양하게 나타날 수 있겠지만 추구하는 기본 영성에는 변함이 없다.
창립자는 이와관련 "성소위기는 기도로 해결해야 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친히 명하고 지적해 준 것이기 때문에 틀림없는 치료약이며 구제책입니다. 성소는 은총처럼 위에서부터 내려오는 것입니다"라고 설파했다. 회원들은 착하고 부지런한 일꾼은 자신들의 편안함이나 안위를 추구할 틈이 없다는 것, 즉 그들의 삶은 오직 하느님의 영광과 인간의 구원을 위해 내어주는 삶이며, 'Rogate'를 기본 정신으로 삼아 성체 안에 현존하시는 예수님의 성심과 하나 되어 거기서 힘을 얻고 함께 살아가는 회원들과 이웃 안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하고 실천하며 거룩한 열정의 수녀회의 소명을 실현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1851년 이탈리아 메씨나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1878년 3월 16일 요셉 과라니 대주교에 의해 사제로 서품된 안니발레 신부는 서품 후 성체 안에 현존하시는 예수성심에 대한 뜨거운 사랑으로 힘없고 어려움에 처한 이들에게 「하느님과 이웃」이라는 이상을 실현시키며, 빈민가인 아비뇨네 사람들을 위해 헌신적 삶으로 복음을 전파했다.
성소의 소중함을 가슴깊이 간직한 채 평생을 가난한 이들과 함께 했던 그는 성소의 보석은 구체적인 희생과 인내, 가난한 이들에 대한 봉사가 수반될 때 그 찬란한 빛을 발한다는 것을 삶을 통해 제시했다.
회원들은 이러한 창립자 정신을 본받아 먼저 하느님의 참된 일꾼들이 되고자 힘쓰며, 사도직 활동을 통해 다른 이들이 각자의 부르심에 합당한 응답을 드리며 좋은 일꾼으로서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고, 또한 교회가 꼭 필요로 하는 일꾼들을 보내 달라고 끊임없이 하느님께 기도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안니발레 신부는 1927년 76세를 일기로 선종했으며 1990년 10월 7일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고 이번 5월 시성식을 앞두고 있다.
[가톨릭신문, 2004년 5월 2일, 이주연 기자]
[영성의 향기를 따라서] 거룩한 열정의 수녀회 (하) 어린이집, 청년 기도모임 등 통해 하느님께 받은 소명 충실히 수행
거룩한 열정의 수녀회 창립자 안니발레 신부가 수도회 역사를 시작할 수 있었던 것은 어느날 우연히 닥친 은총의 순간을 놓치지 않았고 하느님 섭리에 자신을 온전히 내맡김으로써 가능한 것이었다.
그는 신학교 과정중 부제 시절 눈먼 거지 '장코네'를 우연히 만나게 되는데, 이 만남은 안니발레 신부 자신의 특별한 소명을 명확하게 알게 되는 계기가 되었고 이를 통해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분명히 인식하게 되었다.
서품 즉시 모든 사목활동을 포기하고 '장코네'가 살고 있던 '아비뇨네' 빈민가로 들어간 안니발레 신부는 하느님을 모르는 불쌍한 이들에게 교리를 가르쳤으며, 온갖 위험에 무방비 상태로 방치된 소녀들을 위해 고아원 설립 작업을 하면서 이를 도울 수 있는 수도회의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안니발레 신부는 이 과정에서 목자 없는 양을 일컬은 복음 말씀을 발견하고 신앙적인 시야를 넓힐 수 있었다.
"…. 목자없는 양같이 버림받은 채 무기력해져 있고 방황하는 수백만명의 군중들 앞에 과연 이 극소수의 구원받은 고아들과 가난한 이들은 무엇인가? 이 질문 앞에서 나는 보잘 것 없는 내 힘의 한계, 내 능력의 초라함을 생각하곤 했다. 끊임없이 하나의 해결점을 모색하던 중에, 나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말씀을 발견하게 되었다. '추수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적으니, 그 주인에게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달라고 청하여라' 그때 나는 모든 선한 일들, 영혼을 구원하는 일들의 비밀을 발견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이때 부터 그의 끊임없는 선교 활동 즉, 주 하느님께서 많은 성직자들을 이 세상에 보내 주시도록 교회와 하느님의 백성이 다 함께 기도와 일상의 희생을 바치게끔 하는 부단한 노력이 시작된다. 결국 그의 염원은 '거룩한 열정의 수녀회'(1887)와 '로가찌오니스티 수도회'(1897) 창설로 이어진다.
안니발레 신부는 또한 1900년 성소를 위한 기도에 동참할 사람들을 모아 '성소후원 청원회'를 조직, 젊은이들이 더 적극적으로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기도 했다.
이 활동은 교황 레오 13세를 비롯한 역대 교황으로부터 격려를 받았으며, 한 주교는 "안니발레 신부는 우리 모두가 기도하도록 무릎을 꿇게 한 사람이다"라고 말했다.
그의 수도회는 그후 세계 16개국으로 뻗어나가 지역 교회와 상황이 필요로 하는 것에 응답하는 참된 일꾼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세계 곳곳 각 분원에서의 사도직은 학교, 유치원, 농아자들을 위한 학교와 기숙사, 고아원, 미혼모의 집, 대학생 기숙사, 피정센터 운영 등이며 교리교육, 의료활동, 무료급식 활동도 벌이고 있다.
한국 진출은 수도회 창설 100주년을 맞는 1986년 이뤄졌다. 이후 한국 분원은 유치원 운영과 구립 어린이집 위탁 교육, 결손 가정의 아이들을 위한 가족 공동체 그리고 주말 개인피정과 젊은이들을 위한 기도 모임의 사도직, 그리고 교리교육 등 봉사를 계속하며 소명에 임하고 있다. 남자 수도회 로가찌오니스티 수도회는 2003년 1월에 한국에 진출, 한국 이탈리아 필리핀 출신 신부 세명이 서울서 공동체를 이루고 있다. 한편 안니발레 신부는 오는 5월 16일 교황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된다.
[가톨릭신문, 2004년 5월 9일, 이주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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