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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관련>/◆ 축일 & 성인

축일 6월 5일 성 보니파시오(Boniface) / 크레디톤(Crediton)

by 파스칼바이런 2012. 9. 10.

축일 6월 5일 성 보니파시오(Boniface)

San Bonifacio Vescovo e martire

Saint Boniface - Apostle to Germany

신분: 대주교, 선교사, 순교자

활동지역: 크레디톤(Crediton)

활동연도: 675?-754년

같은이름: 보니파시우스, 보니파키오, 보니파키우스, 보니파티오,

보니파티우스, 보니페이스, 빈프리트, 윈프리드, 윈프리트

 

 

크레디톤의 성 보니파시오(Bonifatius)

 

성 보니파티우스(Bonifatius, 또는 보니파시오)는 675년경 영국 웨식스(Wessex)의 크레디톤의 귀족가문에서 태어나 주로 수도원에서 교육받았다. 그는 불과 7세 때에 엑서터(Exeter)의 베네딕토 수도원 학교에 들어갔고, 14세 되던 해에는 너슬링(Nursling)의 베네딕토 수도원에서 윈버트(Winbert)의 지도하에 공부하였다. 그는 너슬링 베네딕토회에 입회하여 30세에 사제로 서품되었고, 수도원 학교의 교장이 되어 교수생활과 설교자로서의 생활이 성공하자 프리슬란트(Friesland)의 선교사가 되기로 결심하였다. 그러나 716년의 첫 번째 시도는 실패로 끝났다.

 

이렇게 되자 그는 718년에 교황 그레고리우스 2세(Gregorius II)가 계시는 로마(Rome)로 갔으며, 여기서 교황으로부터 라인 강 동쪽에 사는 이교도들을 개종시키라는 명을 받고 길을 떠났다. 이때부터 그는 보니파티우스로 개명하고 3년 동안 성 빌리브로르두스(Willibrordus, 11월 7일)를 도와 프리슬란트에서 선교사로 활약하였다.

 

그가 722년 가장 이교도적인 헤센(Hessen)으로 가서 아뫼네부르크에 베네딕토회 최초의 수도원을 설립하고 많은 사람에게 세례를 주는 등 선교활동의 대성공을 거두게 되자, 교황은 보니파티우스를 로마로 불러들여 주교로 서품하고 교회 법령집과 독일의 모든 수도자들과 관리들에게 보내는 추천서를 써주었다. 이 서한은 그의 독일 선교 활동을 보호하기 위한 것으로, 특히 프랑크 왕국의 재상인 카를마르텔(Karl Martell)의 보호를 받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보니파티우스는 카를마르텔의 보호를 받으며 723년부터 725년까지 제2차 헤센 선교에 나섰는데, 이때 그는 가이스마르(Geismar)에서 이교도들이 신성시하는 떡갈나무를 베어 경당을 짓는 데 사용하였다. 그런데 이 사건을 계기로 개종자들이 확산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 후 그는 튀링겐(Thuringen)에 가서 오르트루프(Ohrdruf)에 수도원을 세웠고, 영국의 수도자들을 독일의 선교사로 파견하는 일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였다. 또한 그는 여러 곳에 수도원을 세웠다.

 

744년에 그와 성 스투르미우스(Sturmius, 12월 17일)는 풀다(Fulda)에 수도원을 세웠는데, 이 수도원은 몇 년 지나지 않아서 북유럽에서 가장 큰 중심 수도원으로 발전하였다. 또한 그는 독일과 프랑크의 교황대사로 임명되었고, 피핀을 프랑크의 유일한 통치자로 세우는 대관식을 거행하였다.

 

성 보니파티우스는 754년에 마인츠(Mainz)의 대주교직을 사임하고 성 빌리브로르두스의 사후 이방 관습에 다시 떨어진 프리슬란트를 재건하는데 여생을 바쳤다. 그가 프리슬란트의 도쿰(Dokkum) 근처 보르네 강변에서 개종자들에게 견진성사을 주려고 준비하던 중에 이교도들의 급습을 받아 살해되었다. '독일의 사도'로 불리는 그의 축일은 비오 9세(Pius IX)로에 의해 1874년부터 전 교회에서 거행하고 있다.

 

(가톨릭 홈에서)

 


 

 

 

[성인들의 발자취] 성 보니파시오 대주교

독일의 수호성인 - 축일은 6월 5일

 

 

성 보니파시오 대주교 순교자는 680년 영국의 데본에서 출생했다. 그는 13살 되던 해에 액세터에 있는 베네딕또 수도원에 들어가 그곳에서 교육을 받고 사제로 서품됐다. 그 후 이교 지방이며 전교에 위험이 뒤따르는 독일에 전교할 것을 결심, 교황의 재가를 얻기 위해 로마로 갔다. 교황의 재가를 얻은 보니파시오는 독일로 건너가 그들이 받드는 우상을 파괴하고 그곳에다 교회를 지어 전교 활동을 시작했다.

 

한 번은 사람들이 우상으로 숭배하고 있는 쥬피터 신에게 봉헌한 아주 큰 참나무를 송두리째 잘라 버리고 그 나무로 교회를 지어 성 베드로께 봉헌했다. 이러한 공적을 교황으로부터 인정받은 보니파시오는 로마로 불림을 받아 주교로 서품됐으며 독일의 교세를 확장하고 교회를 건설하라는 명을 받고 다시 독일로 돌아갔다.

 

그 후 독일에 많은 교구와 수도회를 설립한 그는 745년 마인즈 교구를 자신의 교구로 선택했다. 이후 그는 네델란드에 있는 이교도 종족을 개종시키는 일에 착수했다. 그러나 보니파시오는 그곳에서 새로 영세한 이들에게 견진성사를 주기 위해 기다리다가 이교도 군대의 습격을 받았다.

 

이들의 습격을 받은 보니파시오 수행원들은 맞서 싸울 것을 주장했으나 보니파시오는 피를 흘리지 말 것을 간곡히 호소하고 일행 52명과 함께 장렬히 순교의 길을 택했다. 성 보니파시오 대주교 순교자는 독일의 수호성인이며 축일은 6월 5일이다.

 

[가톨릭신문, 1983년 6월 5일]

 


 

 

 

성 보니파시오(Boniface)

 

보니파시오는 라틴어로 "선행 실천"이란 뜻이다. 독일의 사도로 알려진 보니파시오는 독일 민족의 회개를 위하여 자신의 일생을 바친-원장으로 선출된 영광도 포기한-영국 베네딕토회의 수사이다. 그에게는 두 가지 특징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그의 그리스도교적 정통성과 로마 교황에 대한 충성이 그것이다.

 

이러한 정통성과 충성이 얼마나 필요했는지는 그가 교황 그레고리오 2세의 요청에 따라 719년에 첫 전교 여행을 하면서 본 상황에서 입증되었다. 그곳은 이교도적 생활 방식이 지배적이었다. 그가 그곳에서 본 그리스도교는 완전히 이교로 타락한 것이었으며 오류와 뒤섞인 것이었다. 이러한 상황은 주로 성직자들에게 그 책임이 있었는데 그것은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한데다가 정신이 해이했기 때문이며, 때로는 그들이 주교에게 순명하고 있는지조차 의심스러웠다. 어떤 경우에는 그들의 신품 자체까지도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이것이 보니파시오가 722년에 처음으로 로마에 돌아와서 보고한 그곳의 상황이었다. 교황은 그에게 독일 교회를 개혁하도록 지시했다. 이 사명을 수행하기 위하여 그는 그 지역의 주교가 되어야 했다. 교황은 교회와 세속 지도자들에게도 충고의 편지를 보냈다. 보니파시오는 후에 자신의 사명이 칼 마르텔의 안전 통행권 없이는 인간적인 관점에서 성공할 수 없는 것이었다고 인정했다.

 

그는 결국 그 지방의 주교가 되었고 독일의 모든 교회를 재편성 할 허락을 얻었다. 그리하여 그는 훌륭한 성공을 거두었던 것이다. 프랑크 왕국에서 그는 주교의 선거에 평신도가 개입하고 성직자가 세속화되고 교황의 통제력이 결여되는 등 큰 어려움에 부딪혔다.

 

프리지아에서 마지막 선교 중에, 그와 그이 동료 53명은 개종자들의 견진을 준비시키고 있던 중에 살해되었다. 독일 교회가 다시 로마에 충성하도록 하고, 이방인들을 회개시키기 위하여 그는 두 가지 원칙을 따랐다.

 

첫째 원칙은 로마의 교황과 일치를 이루고 있는 주교에 대한 성직자들의 순명 정신을 회복하는 것이고, 둘째 원칙은 베네딕토 수도회의 형식을 따른 기도의 집을 많이 세우는 것이었다. 수많은 앵글로색슨계의 수사와 수녀들이 그를 따라 대륙으로 건너갔다. 그는 베네딕토회 수녀들을 활동적인 교육 사업에 끌어들였다.

 

보니파시오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 십자가의 길을 따르는 것이라는 그리스도교 율법을 잘 지켰다. 보니파시오에게 그것은 육체적 고통이나 죽음만이 아니라 교회의 개혁을 위한 고통스럽고 그를 당혹스럽게 하는 일이었다. 선교의 영광은 새로운 사람들을 그리스도께로 데려오는 데 있다고 흔히 생각할 수 있다. 그러므로 신자들은 다스리고 치유하는 것은 보다 덜 영광스러운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가 않다.

 

보니파시오는 이교의 미신을 파괴하려는 시도에서 그리스도교에 글자 그대로 돌풍을 일으켰다. 미리 예고한 날 모여든 군중 앞에서 그는 구텔베르크 산에 있는 도나르의 신성한 참나무를 도끼로 찍었다. 거대한 나무는 네 조각으로 갈라지면서 무너졌다. 사람들은 신들이 보니파시오에게 저주를 내리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의 신이 무력하고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그 나무의 판자들을 성당 짓는 데 사용했다.

 

(성바오로수도회 홈에서)

 


 

 

 

크레디톤의 성 보니파시오(Boniface)

 

673년경 영국에서 태어났다. 엑시터 수도원에서 수도자가 되어, 719년 독일에 가 신앙을 전파하기 시작했고 큰 성과를 거두었다. 마인츠의 주교로 축성된 후 동료들과 함께 바바리아, 튀링겐, 프랑크 지방에 많은 교회를 세우고 재건하였다. 여러 공의회를 주관했고 많은 법을 공포했다. 프리스 지방에 전교하던 중 754년 그 곳 주민들에 의해 살해되었다. 그의 유해는 풀다 수도원에 안치되어 있다.

 

성 보니파시오 주교 순교자의 편지에서

(Ep. 78: MGH, Epistolae, 3, 352. 354)

 

그리스도의 양떼를 지키는 충실한 목자

 

교회는 세상이라는 바다를 항해하면서 이 현세 생활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유혹의 물결에 시달리는 큰 배와 같습니다. 이 배는 포기할 수 없고 어떠한 환경에서라도 꾸준히 조종해야 합니다. 이렇게 한 예로서 로마의 글레멘스와 고르넬리오와 다른 교황들, 카르타고의 치쁘리아노와 알렉산드리아의 아타나시오 등과 같은 과거의 교부들을 들 수 있습니다.

 

그들은 외교인 황제들의 치하에서 그리스도의 배, 즉 그리스도께서 사랑하시는 정배인 교회를 가르치고 보호하며, 교회를 위해 수고하고, 피를 흘리기까지 인내하면서 교회를 이끌어 나갔습니다.

 

이분들의 모범과 이와 같은 다른 분들의 모범을 생각해 볼 때 나는 두려움으로 가득 찹니다. "두려움과 무서움이 나를 덮치고, 내 죄의 어둠이 나를 뒤덮을 뻔 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교부들과 성서에서 이와 같은 선례를 찾을 수만 있었다면 교회의 행정 직책을 기꺼이 내놓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정이 이렇게 하는 것을 허락치 않고 또 진리는 진력날 수 있지만 패배당하거나 기만당할 수 없기에, 내 지친 영혼은 솔로몬을 통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분께로 피신합니다.

 

"마음을 다하여 주님을 신뢰하고 네 자신의 명철에 의지하지 말라. 무슨 일을 하든지 그분을 생각하라. 그러면 그가 네 앞길을 곧바로 열어 주시리라." 또 어디선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주님의 이름은 튼튼한 성루, 무죄한 사람에게 안전한 피신처가 되리라."

 

옳은 일을 행하는 데 굳건한 자세를 취하고 유혹을 막을 수 있도록 영혼을 준비시킵시다. 그러면 우리가 하느님의 힘으로 저항하면서 그분께 다음과 같이 말씀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 "주여, 당신은 대대로 우리의 피난처가 되시었나이다." 우리 힘만으로는 질 수 없는 이 짐은 주님께서 지어 주신 짐이기에 주님을 신뢰하고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라고 말씀하신 분의 도움을 빌어 지도록 합시다.

 

고통과 고뇌의 날들이 우리에게 닥쳐온 이때, 주님의 날이 임할 때까지 굳건한 자세로 전투에 임합시다. 우리 선조들과 함께 영원한 유산을 나누어 받을 수 있도록 그들의 거룩한 법을 수호하기 위해 하느님의 뜻이라면 죽음까지 불사합시다.

 

짖지 못하는 개가 되거나 말 못하는 양지기가 되지 맙시다. 늑대가 가까이 올 때 도망쳐 버리는 삯꾼이 되지 말고, 그리스도의 양 떼를 지키는 충실한 목자가 됩시다. 성 그레고리오께서 당신의 [사목 지침서]에서 제시하신 것과 같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능력을 주시는 한, 잘난 사람에게나 못난 사람에게나 가난한 이에게나 부자에게나 모든 계층과 연령의 모든 사람들에게 "기회가 좋든지 나쁘든지" 하느님의 온갖 뜻을 꾸준히 전파하도록 합시다.

 

(가톨릭굿뉴스 홈에서)

 


 

 

 

편  지

 

독일의 사도로 불리는 성 보니파시오는 원래 영국 사람이었는데 선교사가 되어야 할 소명을 느끼고 유럽으로 떠났다. 그는 여행하는 동안 사랑하는 가족과 친지들에게 소식을 전하고 자신에게 기도를 요청하는 사람들에게 응답하기 위해서 수시로 편지를 써야 했는데 참으로 재미있는 방식을 사용하였다. 우선 자신이 편지를 써서 순서에 올라 있는 맨 처음 사람에게 보내면, 받은 사람이 거기에 자신의 편지를 더해서 다음 사람에게 보내고 그 사람이 다시 편지를 덧붙여서 다음 사람에게 보내는 식인데, 한 바퀴 다 돌아오면 자신의 지난 편지를 빼 버리고 새것을 써 넣어 다시 돌렸다.

 

보니파시오가 사용한 이 연락 방식은 그 후 멀리 떨어진 사람들과 연락을 취하는 데 자주 사용되었다고 한다. 이런 방식으로 가족들끼리 소식을 나누는 전통을 세우면 어떨까? 편지 쓰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면 전자 우편으로 대체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 방법이 어떤 것이든 사랑하는 사람과 계속 연락을 취하는 것은 서로의 유대를 돈독히 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가족이나 친척들에게 편지를 쓴 적이 있는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관심을 갖고 자주 연락을 하겠다.

 

(까리따스수녀회 홈에서)

 


 

 

 

 

 

 

 


 

성화속의 크레디톤의 성 보니파시오(Bonifac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