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일 6월 13일 성 안토니오(Anthony) Saint Anthony of Padua (Franciscan) Sant' Antonio di Padova Sacerdote e dottore della Chiesa 신분: 신부, 교회학자, 설교가 활동지역: 파도바(Padova) 활동연도: 1195-1231 같은이름: 안또니오, 안또니우스, 안소니, 안토니우스, 앤서니, 앤소니, 앤터니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Antonius)
포르투갈 리스본(Lisbon)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페르난도(Fernandus)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은 성 안토니우스(Antonius, 또는 안토니오)는 포르투갈 국왕 알폰소 2세의 궁중기사의 아들이었다. 안토니우스는 신앙심 깊은 부모의 영향을 받으며 자랐고, 리스본 주교좌성당 부속학교에서 교육을 받다가 15세 되는 해에 집 근처에 있던 아우구스티누스 참사 수도회에 입회하였다. 1212년에는 자신을 찾아오는 친구와 친척들을 피하기 위해 다시 쿠임브라(Coimbra)에 있는 성 십자가 참사 수도회로 옮겨 8년 동안 공부와 기도 생활에 전념하였다. 그 후 1219년에 사제로 서품되었다.
1220년 1월 16일 모르코에서 순교한 다섯 명의 작은 형제회 순교자들의 유해가 성 십자가 성당으로 옮겨져 왔는데, 이때 자신도 순교자가 되겠다는 열정에 사로잡힌 그는 그 해 코임브라의 작은 형제회로 옮겨 안토니우스라는 수도명을 받고 곧바로 아프리카 선교사를 지원하였다. 그의 소망대로 무어인들에게 설교하기 위하여 모르코로 파견되었으나, 도착 직후 병으로 인하여 되돌아와야만 했다.
그 후 1221년의 아시시(Assisi)의 포르치운쿨라(Portiuncula)에서 개최된 작은 형제회 총회에 참석했다가 쿠임브라에서 조용히 은둔하며 고행 생활을 하던 그는 포를리(Forli) 근처의 몬테파올로(Montepaolo) 운둔소로 가게 되었다. 어느 날 쿠임브라 관구장인 그란치아노(Granziano) 신부와 함께 사제 서품식에 참석하기 위해 포를리로 갔는데, 마침 미사에서 강론할 마땅한 사람이 없어 안토니우스가 맡게 되었는데 이 자리에서 그는 설교가로서의 큰 능력을 발휘하였다.
그래서 그는 가타리파가 성행하던 북부 이탈리아 지방과 알비파(Albigenses)가 성행하던 남부 프랑스에서 설교하라는 명을 받고 활발한 활동을 시작해 놀라운 성공을 거두었다. 그의 뛰어난 설교와 화술은 불같았고, 설득력이 있었으며 모여든 군중들을 매료시켰다. 그가 가는 곳마다 군중들은 구름처럼 운집하였다.
그는 작은 형제회의 첫 번째 신학 교수로 임명되었으나, 설교직에 더욱 헌신하기 위하여 공식적인 직책에서 면제해 줄 것을 간절히 바랐다고 한다. 사람들을 개종시키고 고해성사를 주는 신부로서의 그의 성공은 가히 놀라울 정도였다.
프랑스에서 활동하던 중 1226년 10월 프란치스코 성인이 사망하자 이탈리아로 돌아와 이듬해 에밀리아(Emilia) 관구의 관구장 대리로 선출되었으나, 설교에 전념하기 위해 1230년에 사임한 뒤 파도바 수도원에 정착하면서 빛나는 업적을 남겼다. 파도바 전체를 완전히 개종시킨 그의 설교는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또한 그는 채무자, 옥에 갇힌 사람들을 석방하는 일을 비롯하여 가난한 이들을 돕고 이단자를 개종시키는 등 끊임없이 활동하였다.
1231년 그는 수종 등을 겸한 열병으로 잠시 요양할 목적으로 캄포 산 피에로(Campo San Piero)로 갔으나, 병이 심해져 파도바로 되돌아오는 길에 베로나(Verona)의 아르첼라(Arcella)에 있는 클라라 수녀회에서 운명하였다. 이때 그의 나이는 불과 36세였다. 그의 유해는 현재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 성당에 모셔져 있다. 그는 이례적으로 바로 다음 해 교황 그레고리우스 9세(Gregorius IX)에 의해 시성되었으며, 1946년에는 비오 12세(Pius XII)로부터 교회학자, 복음적인 박사로 선언되었다.
성 안토니우스의 수많은 기적 이야기와 설교 능력은 가톨릭 교회의 전설 중의 하나가 되었으며, 그를 능가할 만한 설교가가 나오기는 힘들 정도로 높이 평가해왔다. 그 당시 사람들은 안토니우스를 일컬어 '이단자들을 부수는 망치', '살아있는 계약의 궤'라고 하였으며, 기적을 행하는 사람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리고 17세기부터 잃어버린 물건을 찾을 때 안토니우스 성인에게 기도하면 곧바로 찾는다는 전설이 생겼다. 이는 어느 수련자가 허락없이 성인의 시편집을 가져갔다가 성인이 발현하여 돌려달라고 해서 그 시편집을 돌려주었다는 이야기에서 유래하였다.
가난한 이들의 수호성인으로서 일생 그들을 위해 헌신했던 성인의 이름을 따서 19세기에 '안토니우스 성인의 빵'이라는 구호단체가 설립되어 오늘날까지 개발도상국의 가난한 이들을 위해 활동하고 있다. 그를 그림으로 그릴 때에는 팔에 아기 예수님을 안고 있는 모습으로 표현하는데, 그 이유는 한 방문자가 안토니우스 성인이 탈혼 중에 일어난 이 일을 기록했다는 이야기 때문이다.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 사제 학자
성 안토니오는 성 프란치스코 수도회의 초대 학자이며,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기적의 성인, 파도바의 성인' 이라 불리 운다. 성인은 하느님께서 당신을 작은이로 부르셨을 때 기꺼이 작은이가 되었으며. 그는 회의 작은 규칙 하나라도 어기지 않고, 창설자 프란치스코의 정신에 따라 가난하고 작은 자로서 프란치스코회의 이상을 실현시켰다.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 사제의 강론에서(I,226) :
행동이 뒤따를 때 입으로 하는 말은 효과가 있습니다.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은 여러 가지 언어로 말합니다. 이 여러 가지 언어란 그리스도를 증거해 주는 겸손, 가난, 인내 그리고 순종입니다. 우리가 생활에서 이들을 실천할 때 그 실천을 통하여 여러 가지 언어를 말하게 됩니다. 행동이 뒤 따를 때 입으로 하는 말은 효과가 있습니다.
입은 다물고 행동으로 말합시다. 우리는 불행히도 말로는 부풀어 있고 행동에는 텅 비어 있습니다. 이 때문에 주님께서는 잎사귀만 있고 열매는 하나도 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것처럼 우리도 저주하실 것입니다. 그레고리오가 말하는 것처럼 "설교자에게는 법이 하나 있습니다. 설교하는 바를 실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가르치는 것을 행동으로 파괴시킨다면, 사람이 법을 안다고 자랑하는 것을 행동으로 파괴시킨다면, 사람이 법을 안다고 자랑하는 것은 쓸모없는 일입니다.
"사도들의 마음은 성령으로 가득 차서 성령이 시키는 대로 여러 가지 언어로 말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인간의 영이 지시하는 대로 하지 않고 성령의 감도에 따라 말하는 이는 복됩니다. 그러나 자기 영이 지시하는 대로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의 말을 도용하여 마치 자기 말인 것처럼 넘겨줍니다.
주님께서는 이와 같은 사람들에 대해 예레미아를 통하여 말씀하십니다. "내가 똑똑히 일러둔다. 예언자들이 서로 내 말을 남의 입에서 훔쳐다가 떠벌이는데 결코 그냥 두지 않으리라. 내가 똑똑히 일러둔다. 이런 예언자들 내 말을 한답시고 혀를 놀리는데, 결코 그냥 두지 않으리라. 내가 똑똑히 일러둔다. 이런 예언자들이 개꿈을 꾸고 거짓말로 허풍을 떨어 가며 해몽을 하여 나의 백성을 속이는데, 결코 그냥 두지 않으리라. 나는 그런 말을 하라고 그것들을 보낸 적이 없다. 그것들은 이 백성에게 백해무익한 자들이다. 똑똑히 들어라."
성령이 지시하는 대로 말하도록 합시다. 우리의 오관을 완전하게 하고 십계명을 준수하여 오순절(성령 강림)을 다시 성취하도록 당신 은총을 내려주십사고 성령께 겸손히 또 열렬히 청합시다. 예리한 통회의 마음을 충만케 하시고 참된 신앙을 고백하는 혀 같은 불길을 우리 마음에 주시어, 성도들의 광채로운 불타오르고 조명되는 가운데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뵐 수 있게 해주시기를 청합시다.
성 안토니오(Anthony) 사제
안토니오(1195 - 1231)는 포르투갈 리스본에서 근위 해군 제독의 아들로 태어났다. 17 세에 코임브라에서 아우구스티노 참사회에 입회하여 사제 서품을 받았다. 여기서 신학과 성서에 깊은 조예를 쌓았다. 그는 작은형제회의 베라르도와 동료들이 모로코에서 순교했다는 소식을 듣고 순교의 관을 쓰기 위해서 작은형제회로 옮겼다. 그의 원에 따라 모로코로 파견되었으나 병으로 시칠리아에 되돌아왔다.
1221 년 총회에 참석하여 성 프란치스코를 만나게 되고 폴리 근처의 은든소에서 생활할 수 있는 허락을 받았다. 그러나 그의 뛰어난 설교 솜씨와 탁월한 학식 때문에 설교 책임자로 임명되고 프란치스코로 부터 작은형제회 첫 신학 교수란 칭호를 받게 되며 볼로냐에서 가르치기도 하였다. 곧 알비파에 대항하여 설교하기 위하여 남불 지방으로 파견되었다.
그는 이름 높은 설교가로 박학한 학자로 또한 뛰어난 덕행가로 일생을 보냈으며 마지막 3 년 동안은 관구 봉사자로서 형제들에게 봉사하기도 하였다. 1231년 36 세라는 짧은 나이로 거룩한 죽음을 맞이하였다. 그의 중재로 생전과 사후에 수많은 기적들이 일어났으며 죽은 지 1 년이 채 못 된 1232 년 5월 30일 시성되었고 비오 12 세는 교회학자로 선포하였다.
(작은형제회 홈. '프란치스칸 성인들'중에서)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
파도바의 안토니오는 1195년경 포르투갈의 리스본에서 태어났다. 그의 세례명은 Ferdinand였다. 그는 어린 시절을 부유한 가정에서 보냈으며, 리스본의 대성당 부설 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 그는 리스본 가까이에 있는 아우구스티노 규율 수도회의 San Vicenzo de Fora 수도원에 들어갔다가 후에 Coimbra에 있는 그 유명한 Santa Cruz 수도원으로 이동해 가게 되었다. 거기에서 그는 철학과 신학 공부를 철저히 하였는데, 특히 성서와 교부들의 글들을 열심히 공부하였다. Santa Cruz 수도원의 방대한 도서관은 그가 공부를 하는데 더할 나위 없는 자료들을 제공해 주었다.
1219년 그는 Coimbra에 머물던 작은 형제들을 처음 만나게 되었는데 이들은 모로코의 사라센인들을 복음화하기 위해 북아프리카 해안으로 가고 있는 중이었다. 1220년 1월 16일 이들 작은 형제들은 Marrakesh에서 순교를 당하였다. 그들의 유품들이 포르투갈로 이송되어 Coimbra에서 공경을 받았다.
이 때가 바로 Ferdinand가 선교를 가기 위해 작은형제회에 들어갈 것을 결심한 때였다. 그는 성 아우구스티노의 규율 수도회를 떠나 작은 형제가 되어 안토니오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그가 선교를 위해 북아프리카로 가던 도중 배가 폭풍우를 만나 시실리 해변 근처에서 난파되었고, 그는 시실리 섬에 표류해 가 잠시 머물게 되었다.
그는 Messina의 형제들로부터 1221년에 총회가 개최될 것이라는 듣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포르치운쿨라를 향해 떠났다. 아마도 이 총회 기간 동안 안토니오는 프란치스코를 만났을 것이다. Romagna 관구의 관구봉사자인 Graziano 형제는 안토니오를 자신의 관구에 기쁘게 맞이해 주었고, 그를 Monte Paolo의 은둔소로 파견하였다. 이는 그로 하여금 이 공동체의 평형제들을 위해 성사를 거행해 주게 하기 위함이었다.
사실 안토니오가 부탁을 받아 Forli에서 설교할 때까지 몇 달 동안은 안토니오의 지혜를 모든 사람이 눈치 채지 못하였다. 그 때부터 안토니오는 설교가로서 그리고 볼로냐와 프랑스, 파두바에 있는 형제들을 위한 신학 강사로서의 바쁜 삶을 살았다.
그는 Provence의 속관구장으로 있으면서 카타리파에 대항하여 설교하였다. 그 후 그는 Romagna 관구의 관구봉사자로도 선출되었다. 그는 자신의 생애 마지막까지 “Sermones”(강론집)을 저술하다가, 1231년 파두바 인근 지역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교황 그레고리오 9세는 1232년 성령강림 주일에 그를 시성하였다. 파두바의 안토니오는 우리 형제회의 첫 번째 신학자였으며, 프란치스코가 아직 살아있는 동안 설교가가 되기 위한 준비에 있어서 학문 연구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입증한 사람이었다.
(작은형제회 홈. '프란치스칸 사상의 학파'중에서)
성 안토니오(Anthony)
Fernando(안토니오의 본래 이름)는 1195년 포르투갈 리스본에서 부유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Martino di Alfonso였고, 어머니는 Maria 였다. 그의 집은 리스본의 대성당 가까운 곳에 있었다. 그는 어릴 적에 대성당의 학교에서 공부하였다. 그가 15살이 되었을 때 아오스딩 규율 사제회 소속 Sao Vincente 수도원에 입회하였다. 그후 얼마 있다가 그는 Coimbra의 Santa Cruz 수도원을 이동하여 거기에서 신학 공부를 계속하였다. 특히 성서학과 교부학을 이때 공부하였다.
1220년에 사제로 서품되었는데, 그는 이 때 사라센인들을 복음화하기 위해 북아프리카로 가던 이태리의 작은 형제들을 알게 되었다. 1220년 1월 16일 베라르도가 이끌던 이 형제들은 모로코의 Marrakesh에서 순교하게 되었다. Coimbra로 가져온 이 순교자들의 유해에 경배를 드리는 페르난도는 이 새로운 수도 가족에 들어가 북아프리카 선교에 합류할 결심을 하게 되었다. 그는 안토니오라는 이름을 받고 아프리카 해역으로 선교를 떠나게 되었다. 그러나 그에게 찾아온 병과 폭풍우 때문에는 그는 시실리 섬에 머물러야만 했다.
Messina 수도원에서부터 안토니오는 1221년의 성령강림 총회에 참석하기 위해 아씨시로의 여행을 계속하게 되었다. 당시 Romagna의 관구봉사자였던 Graziano 형제가 그를 Montepaolo의 은둔소로 보냈다. Forli에서 있었던 서품식 미사에서 안토니오는 설교를 하여 그가 가지고 준비해 온 신학 지식이 공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는 북이태리(Rimini, Bologna, Milano, Vercelli)와 프랑스(Montpellier, Arles, Limoges, Toulouse, Bourges)에서 순회설교가로 활동하였는데, 특히 카타리파 이단에 맞서 설교를 하였다. 그는 프랑스 형제들의 수호자요, Romagna 관구의 관구봉사자가 되었다.
그는 사순설교로 유명해지게 되었는데, 특히 파도바에서 했던 설교가 가장 유명한 것이었다. 그는 그의 생애 말년에 신비적인 체험들을 많이 하였으며 자신의 설교들(“Sermones”)을 저술하였다. 긴 투병기간 끝에 안토니오는 1231년 6월 13일 파도바에서 가까운 Arcella의 가난한 자매들의 수도원(클라라 수도원)에서 아직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그는 1232년 5월 30일, 성령강림 주일에 교황 그레고리오 9세에 의해 시복되었다. 1946년 비오 12세는 그를 교회의 박사로 선포하였다. 그는 “복음적 박사”로 알려져 있다.
(작은형제회 홈. '프란치스칸 신학자들과 교회학자들'중에서)
성 안토니오(Anthony)
1946년에 교회 박사로 공포된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는 교우들 위에 깊은 영향을 끼쳐 준 초기 프란치스코회 수사들 중의 한 분으로, 1105년 포르투갈의 수도 리스본에서 태어났다. 세례 때 이름은 페르디난도였으며, 어렸을 때 대성전 부속학교에 다니다가 열다섯 살에는 리스본에 있는 플로라의 성 빈첸시오회의 수도원 학교로 옮겼다. 그러다가 2년 뒤에는 다시 코임브레의 성 십자가라는 아우구스티노회 수도분원으로 들어갔다.
그는 아마 이곳에서 성직의 교육을 받고 신품도 받은 모양이다. 1220년에 포르투갈의 친왕(親王) 돈 베드로가 모로코에서 프란치스코회 수사 순교자 다섯분의 유해를 모셔 왔는데 젊은 페르디난도는 이 위험하고도 영광스러운 사명을 열광적으로 환영했다. 이것을 계기로 프란치스코회 수사가 되기를 청하여 허락이 내렸고, 수도명으로 안토니오라는 이름을 받았다.
그 뒤 곧 그의 소망대로 회교도인들에게 설교하기 위해 모로코로 떠났으나 병으로 인해 되돌아 와야 했다. 그것은 하느님의 섭리였다. 그는 배를 타고 그 지방을 떠났으나 폭풍을 만나 시칠리아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안토니오가 1221년 아시시에서 열린 프란치스코 수도회 지도자 총회에 가니 루마니아의 포플리 근처에 있는 성 바오로의 조그만 수도원으로 거처를 정해 주었다.
이곳에서 그가 보낸 생활은 지극히 엄격하면서도 몹시 고요한 은수 생활이었으며, 숨겨놓은 것 같은 것이었다. 그런데 마침 포플리에서 서품식이 있게 되었는데, 관례(慣例)로 되어있는 강론을 할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원장은 하는 수 없이 이 은수자에게 도움을 청했다. 이것은 뜻하지 않았던 발견이었으니, 이 무명의 수사가 기막힌 웅변의 소질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거기에다 불같이 타오르는 덕을 겸한지라 사람들은 그를 북부 이탈리아에 있는 프로테스탄트들을 반박하려 보냈다. 이 프로테스탄트 교인들은 흔히 성서를 잘 인용해 쓸 줄 아는 능란한 솜씨를 가진 이들이었다.
이 무렵에 성 프란치스코는 안토니오를 신학강사로 임명했다. 1123년에 안토니오 수사는 프랑스 땅에 와서 특히 로와르 강과 가론 강 사이에 있는 지방에서 전교 성직을 봉행했다. 그가 리무쟁 수도원장이 된 것이다. 안토니오는 브리브 라 가이야르드에 수도원을 하나 창설했는데, 지금까지도 그가 살던 굴을 볼 수 있다.
그는 1126년 10월 전에 아를르에서 열린 수도자 회의에 참석했으며 프랑스에서 뿌리 깊은 운동을 일으켜 많은 영혼을 더 나은 그리스도교인의 생활로 회개시켰다. 1227년에 안토니오는 이탈리아로 돌아왔다. 그는 베로나의 포악한 왕에게 퀠프 당원으로 옥에 갇힌 사람들을 위해 감히 청원을 했다. 이 청원은 결국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지만... 1230년부터는 파도바에 가서 자리 잡게 되었는데, 이 도시가 그때부터는 안토니오의 도시가 되었고 그곳에서 그는 환유(換喩)로 성인이라 불리어졌다.
1231년에 안토니오는 사순절(四旬節) 강론을 해서 크나큰 성공을 거두었다. 롬바르디아에서 그는 고리대금과 빚 때문에 사람을 옥에 가두는 것을 공격했고, 무산자(無産者)들을 변호했다. 그는 마침내 1231년 6월 13일에 36세를 일기로 세상을 하직했는데, 그의 장례식은 개선(凱旋)이나 다름없이 성대한 것이었다.
성 안토니오(Anthony)
안토니오의 전기는 1245년 이전에 어떤 동료 수사가 썼는데, 이 책은 가장 좋은 문헌이 된다. 안토니오가 이탈리아 밖에서 한 일에 대해서는 1294년 후에 씌어진 프란치스코회 수사 리무쟁의 요한의 전기를 참작하는 수밖에 없다. 안토니오는 1232년 5월 30일 그레고리오 9세 교황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이날 교황은 "지극히 착하신 박사여"하는 "대송찬미가(對誦讚美歌)"를 읊었는데, 이것은 현재 교회 박사들을 위한 찬미가이다. 이것을 보면 그레고리오 9세 교황은 안토니오를 교회박사로 정한 비오 12세 교황의 공식적인 선언을 미리 시작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산문(散文)으로 된 그의 성무일도서 경문은 중세기의 가장 훌륭한 예절 중의 하나라 하겠다.
파도바에는 성 안토니오의 무덤 위에 성을 지었는데, 이 건축은 1263년에 시작하여 1424년에 준공되었다. 1263년에는 성 보나벤투라가 그 유해의 확인을 행했는데 이 훌륭한 강사의 혀는 아주 훌륭하게 보존되어 있었다. 1350년과 1745년에는 또다시 비슷한 확인이 행해졌다. 안토니오가 생전에 기적을 행했는지 여부에 대해서는 중론이 일치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가 죽은 다음에는 이 "기적을 행하는 자"의 전구로 많은 기적이 나타났다. 당시 사람들은 안토니오를 일컬어 "이단자들의 망치", "살아있는 계약의 궤"라고 했으며, 기적을 행하는 사람으로 알려져 있었다.
오늘날에 있어서도 그의 공경은 대단히 성행되는 것이 틀림없는 사실이다. 대중은 그에게 대해 특별한 공경을 한다. 그는 가난한 이들의 수호성인이고, 잃어버린 물건을 찾을 때 안토니오 성인에게 기도하면, 곧 바로 찾는다는 전설이 있다. 그것은 아마 성인의 영성책을 훔쳐 가지고 달아났던 어떤 수련자가 성인의 기도로 인해 그에게 그 귀중한 책을 돌려주게 된 까닭에서일 것이다. 성 안토니오는 1946년 1월 16일에 비오 12세로 부터 교회 박사로 선언되었다.
성상이나 상본에는 성 안토니오가 책을 들고 있는데 이것은 그가 성서의 지식이 해박하다는 비유이다. 중부 이탈리아에서는 거기에다 불꽃을 덧붙였으며, 또 15세기부터는 심장을 그려 넣었는데, 이것은 그의 뜨거운 열심을 상징하는 것이다. 그리고 백합을 그의 정결을 표시하는 것이며 포르투갈에서는 백합에 십자가를 덧붙여 넣는다. 17세기부터는 그가 예수 아기를 안고 있는 것을 표시했는데, 이것은 그의 탈혼 중에 일어났던 일을 표시하는 것이다.
(대구대교구 홈에서)
성 안토니오(Anthony)
안토니오는 희랍어로 "대면하다"란 뜻이다. 모든 것을 버리고 그리스도를 따르라는 복음의 부름심은 바로 안토니오의 생활 규칙이었다. 하느님은 당신의 계획안에서 새롭게 어떤 것을 하도록 여러 번 계속해서 그를 부르셨다. 안토니오는 그때마다 예수님을 더욱 완전하게 섬기기 위해 희생과 새로운 열성으로 즉시 응답했다.
그의 인생행로는 하느님의 종이 되기 위해 미래의 부귀와 권력을 포기하고 아우구스티노 수도원에 들어가기로 결심했던 아주 젊었을 때부터 시작된다. 후에 최초의 프란치스코회 순교자들의 시신이 그가 머무르던 도시를 지나갈 때 그는 다시금 바로 예수께 가장 가까이 있던 사람들, 즉 복음을 위해서 목숨을 바친 사람들 가운데 하나가 되고자 하는 간절한 열망에 가득 찼다.
그래서 안토니오는 프란치스코회에 들어가 무어인들에게 복음 전파를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는 병이 들어서 이 목적을 성취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는 이탈리아로 되돌아와서 조그마한 은수자의 처소에 머무르며 그 곳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기도하거나 성서를 읽거나 천한 일을 하면서 보냈다.
하느님의 부름심은 다시 아무것도 말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그를 사제 서품으로 부르셨다. 겸손하고 순명 정신이 투철한 안토니오는 주저하면서 이 일을 받아들였다. 여러 해 동안 기도와 성서 봉독, 청빈, 정결, 순명 가운데서 봉사하며 예수님을 찾은 끝에 안토니오는 성령이 자기에게 주신 재능을 사용할 준비를 갖추게 되었다. 안토니오의 설교는 미리 준비가 안 된 웅변을 기대하는 사람들과 인간의 언어로 주어지는 성령의 능력을 모르는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위대한 지도자, 위대한 성서학자, 신학자로 인정받은 안토니오는 다른 프란치스코회 형제들에게 신학을 가르치는 최초의 프란치스코회 회원이 되었다. 또 다시 그는 그 직책에서 떠나 그의 해박한 성서와 신학 지식을 활용하여 이단자들을 향해 설교하며 오류에 빠진 사람들을 회개시키고 안심시키는 일에 부름을 받았다. 1232년에 성인품에 올랐다. 확실히 안토니오는 자신의 생활이 완전히 뿌리 뽑혔다는 것을 알고 예기치 못한 새로운 방법으로 나아가는 사람들의 수호자이다.
모든 성인과 마찬가지로 그는 자신의 생활을 온전히 그리스도께로 돌린 완전한 표본이다. 하느님은 안토니오와 함께 그의 마음에 드는 것을 하셨다. 그의 마음에 드는 것은 오늘날까지도 감탄을 자아내게 하는 영적 힘과 밝게 빛나는 생활이다. 일반 사람들의 신심을 찾아 주는 성인으로 기억되는 그는, 그 자신이 하느님의 섭리에 자기 자신을 온전히 잃어버림으로써 자신을 발견했던 것이다.
안토니오는 설교에서 이렇게 말했다. "성인들은 마치 별과 같다. 성인들이 다른 사람들 앞에서 빛나 보이고 싶어 하면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섭리로써 그들을 깊숙한 장소에 감추어 두신다. 그러나 그들을 준비시켜 그리스도의 초대를 마음속에 느끼자마자 고요한 관상 생활을 자선 사업으로 바꾸게끔 하신다."
(성바오로수도회 홈에서)
성인에 관하여
어린시절
안토니오는 포르투갈의 리스본에서 아버지는 말치노, 어머니는 데레사로, 귀족의 집안인 부모 밑에서 1190년 8월 15일 탄생하였는데, 그가 태어난 날은 성모 마리아 축일로 그가 태어났을 때 집 옆의 대성당의 종이 저절로 울렸다고 전해진다.
그의 아버지는 국왕 스테파노 2세의 궁전에서 국왕을 모시는 용감한 기사였고 드높은 기품과 너그러운 성격의 소유자였으며, 어머니 데레사는 경건한 마음을 가졌으며 지적이었고, 상냥한 성격으로 설득력과 교육에 특별한 자질이 있었다.
안토니오는 관례대로 나은지 8일째 성세 성사를 받았으며. 이름은 페르란도라고 지었다. 페르란도라는 뜻은 "평화 안에 용기 있는 자"란 뜻이다. 페르란도는 대성당 부속학교에 다니다가 16살에는 리스본에 있는 폴로라의 성 빈체시오 수도회로 학교를 옮기었다. 부모의 각별한 사랑과 훌륭한 교사 밑에서 교육을 받은 페르란도는 기사의 아들로서 부족함이 없는 아들이었다.
아우구스티노회 시절
페르란도는 1210년 5월 어느 날 성 아우구스티노회에 입회하여 포라 성 빈첸시오 수도원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곳에서 2년을 지내고 꼬임부라에 있는 성 십자가 수도원에서 덕과 학문을 탐구하였고, 1220년에 사제로서 신품 성사를 받았다.
프란치스코회로
이 당시 자모이신 성 교회는 심한 고통을 받고 있었다. 터키 제국이 가깝게는 서양에서 멀리는 동양에 이르기까지 가는 곳마다 이교도들이 승전을 거듭했으며, 같은 그리스도교 국민 사이에서도 여러 가지 분파와 새로운 학설이 그칠 사이가 없이 나와 분열된 상태였다.
페르란도는 이러한 불행을 보고 이교도가 살고 있는 곳에 가서 복음을 전파하고 "암흑의 세계"에서 헤매고 있는 영혼들에게 광명의 불을 켜주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였지만 페르란도가 소속되어 있던 아우구스티노회는 당시에 이교도 사이에 들어가서 복음을 전파하는 일을 하지 않았다.
이럴 즈음 움브리아 평야에 둘러싸여 있는 작은 마을에서는 새로운 작은 형제들이라는 프란치스코 수사들이 맹렬한 기세로 각지로 번져갔고, 자체 방어에 급급했던 다른 수도회와는 달리 사라센 사람이나 그밖에 이교도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러 다녔다.
1220년 포르투갈의 돈 베드로가 모로코에서 전교를 하다가 순교한 프란치스코회 수사 5명의 유해를 그가 생활하고 있는 수도원에 안치되는 것을 보게 되었다. 5명의 순교자는 비타르, 오베, 베드로, 아쿠스, 아쿨리 이었는데, 페르란도는 이것을 보고 수도원에서 편하게 지내는 것보다 그들처럼 사랑의 실천을 해야 한다는 강한 소리를 들으며 고뇌하다가 하느님의 뜻이 뚜렷하게 드러나는 기회가 주어졌다.
이 사실은 얼마나 다행스런 일이며 하느님의 오묘한 섭리를 깨닫게 해주는 것이다. 페르란도는 용기있게 원장에게 자신의 뜻을 알렸다. 그를 보물처럼 아끼던 원장과 아우구스티노회 수사들은 극구 만류하였지만, 그를 끝까지 잡고 있는 다면 그것은 하느님의 뜻을 거스리는 것이 된다는 생각에 그를 보내주기로 하였다.정 들었던 수사들과 마지막 인사를 할 때 한 노인 수사가 동료들을 대표하여 이렇게 말하였다. "페르란도 자! 그럼 부디 성인이 되시오" 이 예언은 훗날 그대로 이루어졌다.
페르란도에서 안토니오로.. 그리고 아프리카로
페르란도! 그를 부르는 속세의 마지막 이름이다. 나이 25세로서 가장 감정이 풍부하고 대담하던 성 아우그스티노회의 수사 신부이던 그는 이제 가난하고 초라한 아씨시의 작은형제들 틈에 끼어 수도복을 입었다. 그리고 당시 귀족들에게만 붙여지는 이름인 페르란도라는 이름을 안토니오로 개명하였다. 그 뒤 이교인이 있는 곳으로 전교 하러 가라는 명령을 고대하면서 정성을 들여 고행과 극기의 수덕에 여념이 없었다. 드디어 안토니오는 필리피노라는 수사와 모로코로 전교를 떠나라는 명을 받고 아프리카의 대륙으로 떠났다.
모나코에서 이탈리아로.
모나코에 도착한 안토니오는 그 동안 충분한 수면을 취하지 못했으며, 엄격한 극기와 대제를 지켜왔다. 거기에 심한 배 멀미, 겹쳐 몸이 극도로 쇠약해져서 중병으로 자리에 눕게 되었다. 당시는 신통한 의약품이 없었기에 병세는 더욱 악화되어 도저히 임무수행을 하지 못할 것이라고 같이 간 수사가 판단하여 본부에 보고함으로써 즉시 돌아오라는 명령을 받고 포르투갈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렇게 열망하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귀향을 하게 된 안토니오는 모든 것이 주님이 뜻이라는 신앙 안에서 위안을 받으며 배를 탔는데 이 배는 도중에 큰 폭풍을 만나 목적하던 곳으로 가지 못하고 표류하다가 이탈리아의 시실리아 섬에서 정착하여, 안토니오는 그곳 메싸니 수도원에서 건강을 찾아 움브리아로 갔다. 뽀르지웅꼴라 총회에서 프란치스코 사부의 축복을 받았으며 이것이 사부님과 첫 대면이자 마지막 대면이었다.
나타난 말씀의 은사
1222년 봄 어느 날, 이웃에 있는 포르리의 거리에서 프란치수코회 몇 사람과 도미니코회 수사들의 서품식에 참석하게 되었는데, 강론을 하게 되어있던 신부가 갑자기 참석치 못하게 되었다.
이에 당황하고 있는 것을 본 원장은 안토니오한테 강론을 요청하였게 되었고, 복음에 관해서 연구한 적은 있어도 강론은 한번도 해본 경험이 없는 안토니오의 강론은 참으로 겸손하면서도 힘찬 웅변으로 참석자들을 모두 깜짝 놀라게 하였다.
이것은 뜻하지 않은 발견으로, 이 무명의 수사가 이용가치가 풍부한 기막힌 웅변의 소질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원장 프라테그라첸은 안토니오가 기도와 극기 속에서 살아가며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기보다 당시 교회가 절실히 필요했던 인재는 이교들과 투쟁하며 교리를 옹호하고 그들을 회심시키는 것이었다. 이태리 북부 이교도들은 성경 지식에 능란하여 순진한 신자들이 동요와 심한 혼란을 받고 있던 상황이었다.
이 무렵에 안토니오를 신학강사로 임명했다는 것은 유효적절한 것이었다. 이태리 북부 이단자들은 서로 뭉쳐 단체를 조직하여 안토니오의 설교를 듣지 못하도록 길목을 차단하며 갖은 방법으로 방해하였다. 하지만 성인의 소문은 꼬리를 물어 멀리 이웃 지방에서도 성인의 설교를 들으려 찾아왔고 이단자들도 이 젊은 설교가의 날카로운 지혜와 이론, 뜨거운 사랑으로 호소하는 부르짖음에 마음이 변하여 가톨릭의 품으로 돌아오는 사람이 많았기에 당시 사람들은 이단자의 쇠망치라는 별명을 주었다. 그 후 교황 그레고리오 9세는 안토니오가 성서에 관해서 지니고 있는 깊은 학식과 지혜에 감탄해 "성서의 감실"이라는 명예로운 이름을 붙여주었다
프랑스에서의 활동과 프란치스코의 죽음
1223년에 안토니오는 프랑스 땅에 와서 특히 로와즈 강과 가론강 사이에 있는 지방에서 전교하고 있었다. 이때 슬픈 소식이 모든 프란치스코회를 비롯하여 전 세계에 전해졌다. 1226년 10월 4일 위대한 프란치스코가 뽀르지웅꼴라의 초라한 곳에서 세계적인 사랑의 찬가를 부르며 주님의 품으로 돌아간 것이다.
이 소식을 들은 안토니오는 성령강림 때 후계자를 선출하기 위하여 이태리로 떠났다. 1227년 총회에 참석하여 자신의 탁월한 교리의 지식과 성덕, 그리고 웅변으로서 다른 유명한 관구장들과 의논 끝에 덕망이 있고 총명하기로 이름난 기요반니 파렌티를 총장으로 추대하였다.
파도바의 안토니오
총회가 끝나고 안토니오는 프랑스에 돌아가지 않고 북부 이탈리아 지방을 순회하면서 신앙과 사랑에 넘친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들려주어 마음을 바로 잡아주고, 격려하여 "평화와 착함"의 씨를 뿌렸다. 이로 인해 많은 이단자를 회두시키고 수도원을 세워 많은 젊은이들이 수도원에 입회하였다. 이때부터 이 도시는 파도바의 도시로 불리게 되었다.
안토니오의 죽음
프란치스꼬 수도회가 성모 마리아를 특별히 모시는 것은 세상에 너무나 잘 알려진 사실인데 안토니오 성인의 성모 마리아에 대한 신심은 어린 때 깊었고 아름다운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성모 승천의 교리는 그의 친구 둔스 스코투스와 더불어 특별히 주장한 신덕 교리이다. 그러므로 안토니오는 성모 마리아의 도움을 많이 받았고 숨을 거두기 전에 천국의 문이 활짝 열리는 것을 볼 수 있는 은혜와 사랑스런 어머니에게 보호를 요청하면서, 성모 찬가를 불렀다.
안토니오는 마침내 1231년 6월13일 금요일 36세의 일기로 사랑하는 파도바에서 위대하고도 조용하게 막을 내렸다. 성 안토니오를 극진히 사랑하던 아르첼라의 사람들과 파도바의 시민들 사이에는 성인의 유해를 자기네 마을에 모시려고 다투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그러나 안토니오가 생전에 원하던 대로 그의 유해는 산타 마리아 수도원 성당에 안장하기로 하였다. 이 성당은 안토니오가 생전에 강론을 하고 성사를 주던 곳이다. 장례식은 장엄하여 개선 장군을 맞이하는 기념식 같았다.
성 안토니오
안토니오는 1232년 5월 30일 그레고리오 9세 교황에 의하여 스폴레또 대성당에서 죽은지 1년도 안되어 성인품에 올려졌다. 이 의식에서 교황은 "지극히 착하신 박사여"하는 대송 찬미가를 읊었는데 이것은 현재 교회 박사들을 위한 찬미가이다. 성인이 죽은지 1년이 되지 않아서 성인품에 올려진 사실은 그의 성덕이 얼마나 컸던가를 교회가 증명하는 것으로 길이 교회사에 빛날 것이다.
레오 13세 교황은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에게 "전 세계의 성인"이라고 붙였다. 그래서 성 안토니오는 모든 사람들에게 "기적의 성인" "파도바의 성인 " 이라고 알려지고 안토니오에 대한 신심은 다른 누구보다도 많이 전해졌다. 세계 어느 곳에 가든지 성인에게 바쳐진 성당이 있고 경당이 있으며, 성인에게 드리는 상본, 향대가 없는 곳이 없을 정도다. 성인이 세상을 떠난 후에도 그 유물이 있는 곳에서는 지금도 그칠 사이 없이 기적이 일어나 연간 수십만씩 순례자들이 밀려들고 있다.
파도바의 대 성전
신자들은 성인의 거룩한 덕과 애덕의 합당한 묘지를 세우기로 하여 1263년 기초 공사를 시작한 후 1424년에 장엄한 성당이 낙성되었다. 그의 유해를 이 성당으로 옮기는 의식을 집전한 사람은 프란치스코회의 수도자이며 총장인 보나벤투라였다. 수많은 신자들이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묘의 문이 열리고 그의 유해가 공개되었다.
죽은지 32년이 지나 그의 모든 부분은 흙으로 돌아갔으나 그의 혀만은 생생하게 남아 있었다. 이 확인은 1350년과 1745년에 또다시 행하였으나 그의 혀는 변함이 없이 보존되어 있었다. 이 고귀한 성당은 1749년에 일어난 화재로 회당의 일부가 불타버렸으나 전 세계로부터 보내온 헌신자들에 의해 다시 복구되었다. 이 회당에 인접한 큰 수도원에 살고 있는 형제들은 수세기를 통하여 파도바의 성당을 지키고 있는 보호자들이 되었다.
맺음말
오늘 날에 있어서도 그의 공경은 대단히 성행되는 것이 틀림없는 사실이다. "기적의 성인" "파도바의 성인"등 으로 불리운 성인의 참된 영예는 그의 학식이나 웅변, 그리고 기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그의 덕행과 거룩함 그리고 천주께서 당신의 뜻대로 그를 맡긴데 있다. 그는 가난한 이들의 주보이며, 그의 전구를 구하기 위하여 바쳐진 애긍은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줄 '안토니오의 빵'을 사는 것에 사용된다.
물건을 잃었을 때 안토니오에게 도움을 요청하는가? 그것은 성인의 성경책을 훔쳐 가지고 달아난 어떤 수련자가 성인의 기도로 그에게 다시 돌려준 이야기에서 시작된다. 성 안토니오는 1946년 1월 16일에 다시 교황에 의해서 "교회박사"라는 공식 선언을 받았다.
성상이나 상본에는 성 안토니오가 책을 들고 있는데 그것은 안토니오가 성경의 지식에 해박하다는 비유이다. 중부 이탈리아에서는 상본에 불꽃을 덧붙였으며, 또 15세기부터는 심장을 그려 넣었는데 이것은 그의 뜨거운 열심을 상징하는 것이다.
그리고 백합은 그의 정결을 표시하는 것이며 포루투칼에서는 백합에 십자가를 덧붙여 넣었다. 17세기부터는 안토니오가 예수 아기를 안고 있는 것으로 표시했는데, 이것은 그의 탈혼 중에 일어났던 일을 상징하는 것이다.
성인은 천주께서 당신의 뜻대로 성인을 프란치스코회에 부르셨을 때, 그는 기꺼이 응답하여 작은이가 되었다. 그는 회의 작은 규칙하나라도 어기지 않고 창설자 프란치스코의 정신에 따라 그를 본받고 충실하게 이행하여 가난하고 작은 자라는 이름을 받은 프란치스코회의 이상을 실현시킨 것이다.
(꼰벤뚜알 프란치스코수도회 홈에서)
성인의 이야기
어머니를 때리고 발을 자른 아들을 살려 주다.
하루는 부모를 때린 손은 잘라 버려야 한다는 안토니오 성인의 설교를 듣고 잘못을 뉘우친 아들이 어머니를 찬 발을 자르고 피를 많이 흘려 죽었다. 그의 부모는 즉시 성인을 모셔왔는데, 성인은 모든 사람들과 기도를 하였다. 소년은 다시 살아났으며 잘린 발도 다 나았다.
분실물
서양에는 뭔가를 잃어버리면 가장 먼저 성 안토니오에게 기도하는 풍습이 있다. 그에게 기도하는 내용은 잃어버린 열쇠를 찾아 달라는 것부터 믿지 않는 영혼을 찾도록 전구해 달라는 기도까지 그야말로 가지각색이다.
프란치스코회 수도 사제였던 성 안토니오는 어떻게 해서 "천국의 분실물 센터 소장"이 되었을까? 전설에 의하면 도벽이 있던 한 탁발 수사가 책을 훔쳐 가자 안토니오가 그것을 되찾게 해 달라고 기도를 했는데, 그 기도 덕분이었는지 훔쳐 갔던 사람이 양심의 가책을 느껴서 책을 도로 갖다 놓았다고 한다.
안토니오는 포르투갈 귀족의 아들로 태어났다. 처음에는 아우구스티노 수도회에 입회했으나 프란치스코회에 소속된 순교자들의 유해가 그의 마을을 지나쳐 간 것을 계기로 프란치스코회로 들어갔다. 교사와 설교가로 사랑받은 그는 죽은 지 1년이 채 못 되어 성인으로 선포되었다.
우리는 성 안토니오에게 잃어버린 것을 찾게 해 달라고 기도할 수도 있지만, 우리가 가진 것을 잃어버리게 해 달라는 기도를 드릴 수도 있다. 우리가 욕심꾸러기처럼 너무 많은 것을 소유하지 않고 청빈하게 살기를 바라는 성인은 가진 것을 줄이고 싶다는 기도를 더 기뻐할지도 모른다.
(꼰벤뚜알 프란치스코수도회 홈에서)
성 안토니오께 드리는 13일 기도
꼰벤뚜알 프란치스꼬회에는 예로부터 안토니오 성인께 드리는 13일 기도가 내려옵니다. 이 기도는 성인의 축일이나 특별한 신심일에 영적, 물적 차원의 청원을 드리는 13가지의 기도로서, 표현이 좀 예스럽지만 그러한 기도들은 내용에 있어 유효성을 지니는 것들입니다.
안토니오 성인은 참된 기도 양식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의 사람들은 지상의 것들을 위하여 열심히 기도하고 영원한 것들을 마지막 자리에 놓습니다. 그러나 천상적인 것에서부터 시작해야만 할 것입니다. 거기에는 우리의 보화가 있고 우리의 마음과 기도를 맡겨야 할 곳입니다."
"악한 사람이나 세속적인 사람이나 할 것 없이 평화로운 고요, 육신의 건강, 온화한 계절, 재산과 필요, 풍요로운 삶 등에 관한 것을 희망하는 것은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감정입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의 정신으로 주님께 청하는 이들은 자신의 뜻을 하느님의 뜻에 복종시키는 사람들입니다."
이러한 모든 것이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위한 묵상이 되도록 하기 위하여 13일 기도를 하도록 권하는 이유인 것입니다. 13일 기도와 성안토니오의 전구를 통하여 주님께 더 가까이 다가가시길 바랍니다.
성 안토니오께 드리는 13일 기도
1. 오! 영광 지극하신 성 안토니오여, 당신은 죽은 이를 부활케 하는 능력을 하느님께 받으셨으니 제 영혼을 깨워 주시어 열심하고 거룩한 생활로 부활하게 하소서.
2. 오! 지혜 지극하신 성 안토니오여, 당신은 성 교회의 참 빛이시며, 천상 진리의 빛이시니 제 영혼을 비추소서.
3. 오! 자비 지극하신 성인이시여, 고통 중에 당신께 달아드는 자를 돕는 데에 언제나 빠르고 능하시니 제 영혼을 현재의 비애에서 도와주소서.
4. 오! 능력 지극하신 성인이시여, 어려서부터 지옥의 원수를 이기기를 배우셨으니 제 영혼을 원수의 공격에서 막아주시고 혹심한 유혹에서 지켜주소서.
5. 오! 지극히 정결하신 성 안토니오여, 당신은 비할 데 없는 순결의 백합이시니, 불결의 지겨운 모병에 제 영혼을 결코 더럽히지 않게 하소서.
6. 오! 사랑하올 천상 의사이신 성 안토니오여, 무수한 병자들이 당신의 전달로 건강을 회복하오니, 죄로 상처받은 제 영혼을 고쳐주시고 악한 경향을 바르게 하소서.
7. 오! 지극히 충실하신 성 안토니오여, 풍랑 거친 인생행로에 제 영혼을 지배하시어 영원한 구원의 포구까지 인도하소서.
8. 오! 자애 지극하신 성 안토니오여, 당신은 인간 재판에서 유죄 선고 받은 자들의 구속자시니, 죄의 올가미에서 제 영혼을 해방시켜 주시어 하느님의 심판 받을 무리 중에 들지 않게 하소서.
9. 오! 참으로 기이하신 성인이시여, 몸에서 떨어졌던 지체들도 당신 전달로 다시 결합되어 생명을 얻었으니, 불신과 악습 때문에 떨어져 나간 지체들도 다시 성 교회에 결합시켜 주소서.
10. 오! 지극히 고마우신 안토니오여, 당신은 잃어버린 물건을 잘 찾아 주시오니 고마우신 안토니오여, 저로 하여금 성총과 하느님 사랑을 잃지 않게 하시고 만일 불행히 잃는다면 즉시 찾아주시어 다시는 잃지 않게 하소서.
11. 오! 사랑 지극하신 성인이시여, 젊은이도 늙은이도 당신께 달아들면 들어 허락함을 받나이다. 불쌍하고 가련한 저도 당신께 달아드오니 당신 사랑을 감하지 마시고 저를 또한 들어 허락하소서.
12. 오! 인자하신 성 안토니오여, 무수한 위험이 제 영혼을 둘러쌌으니, 저를 해방시키시고 구원하소서.
13. 오! 사랑 지극하신 성 안토니오여, 파도바의 당신 무덤 속에서 제게 요긴한 사정들을 굽어보시고, 당신 기묘하온 혀로써 하느님께 말씀 드리사, 마침내 위로받고 들어 허락함을 받게 하소서. 비오니, 오! 주님, 당신께 달아드오니, 안토니오 성인을 공경함으로써 우리 안에 평화가 충만하고 몸과 마음이 굳세어지고 영복을 받는 데 도움을 얻게 하소서.
(* 하루에 1번부터 13번까지 13일 동안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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