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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관련>/◆ 103위 성인들

성 황석두 루카(黃錫斗 Luke)

by 파스칼바이런 2012. 10. 5.

성 황석두 루카(黃錫斗 Luke)

축일 9월 20일

 

 

 

신      분: 회장, 순교자

활동지역: 한국(Korea)

활동연도: 1813-1866년

같은이름: 누가, 루가, 루까, 루카스, 루크, 황 루가, 황 루카, 황루가, 황루카

 

성 황석두 혹은 황재건이라고도 하는 루카(Lucas, 또는 루가)는 충청도 연풍의 어느 양반 집안에서 삼대독자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아들이 자기 가문을 화려하게 번영케 할 것이라는 희망에 부풀어 열심히 글공부를 시켰고, 과거에 급제하여 출세하기만을 기다렸다. 그리고 그도 역시 아버지의 소망을 저버리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20세가 되던 해 과거를 보기 위해 한양으로 향하였는데, 그가 묵은 어느 주막에서 천주교 신자를 만나 성교회의 도리를 듣고 큰 감명을 받은 나머지 천주교 교리책을 여러 권 얻어 가지고 집을 떠난 지 3일 만에 부친에게로 되돌아갔다.

 

부친은 아들이 되돌아 온 이유를 알자 분노가 치밀어 아들을 마구 때리고 급기야는 작두를 마당 가운데에 놓고 아들의 목을 작두에 걸게 하였다. 그러나 황 루카가 태연히 목을 내밀자 아버지는 눈물을 흘리면서 사랑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부친의 책망과 모진 매질에도 결코 굴하지 않고 그는 2년 이상을 말 한마디 하지 않고 벙어리처럼 살았다. 그러던 중 어느 날 루카는 아버지 앞에 나아가 천주교 교리책을 한번 읽어 보시라고 설득하니, 이때부터 온 집안이 교리를 배워 영세 입교를 서두르게 되었다. 시일이 지남에 따라 비신자들까지도 루카의 신심과 열성 그리고 이에 못지않은 그의 훌륭한 예의범절에 감탄하여 마지않았다.

 

그때 페레올(Ferreol, 高) 주교가 조선에 입국하자 루카는 성교회를 위해서 자기 일생을 바칠 것을 주님께 서약하였고, 페레올 주교는 처와 별거한다는 조건 하에 루카를 사제품에 올리려고 계획을 세웠으나, 교황청에서 당시 조선 땅에는 여자 수도회가 없다는 이유로 거절하였다고 한다. 그 후 페롱(Feron, 權) 신부의 한문 선생 겸 전교회장 일을 맡아 수행하던 황 루카는 또 베르뇌(Berneux, 張敬一) 주교를 돕게 되었다. 그는 주교와 함께 “회죄직지”를 위해 원고를 썼고, 다블뤼(Daveluy, 安敦伊) 주교를 도와 번역 출판과 그 교정에 힘썼다.

 

그러던 어느 날 포졸들이 다블뤼 주교를 잡으려고 몰려오자, 다블뤼 주교는 루카에게 안전한 곳으로 피하라고 권하였다. 그러자 루카는 "아니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십니까? 오늘까지 주교님을 모셔온 제가 피신하다니 될 말입니까? 그래, 주교님은 혼자 천당 가시려는 심사인가요?"라고 말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결국 주교와 신부들과 함께 잡혀 서울로 압송되었다. 이윽고 그는 1866년 3월 23일에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는 다블뤼 주교와 다른 두 신부들과 함께 보령 갈매못으로 끌려가서 참수형을 받아 치명하였다. 이때가 1866년 3월 30일이요, 그의 나이는 54세였다. 그는 1968년 10월 6일 교황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청주교구 연풍 성지 기념관 경당 벽에 걸린 성 황석두 루카의 영정

 

[한국교회 선교의 뿌리를 찾아서] 평신도 - 성 황석두 루카

복사 · 교우촌 회장으로 봉사, 교회서적 번역 등 다방면에서 재능보여

 

 

다블뤼 주교와 위앵 신부, 장주기 요셉 등과 함께 군문효수로 순교한 황석두(루카) 순교자. 그의 영성은 현재 그의 이름을 딴 선교회가 있을 만큼 의미가 있으며, 우리들에게 친숙하다.

 

황석두가 천주교에 입교하게 된 동기에 대해서는 그를 가르치던 한문선생의 권고로, 또는 우연한 기회에 천주교인을 알게 돼 인연을 맺었다는 등의 이야기가 있는데 이로 미루어보아 그의 가문이 전통적 천주교 가문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한 이야기에 의하면, 충청도 연풍의 부유한 양반가문에서 태어난 황석두는 어느 날 부친의 뜻에 따라 과거시험을 치르러 상경하던 중, 한 주막에서 천주교인을 알게 된다. 교리를 배우다 과거시험을 치르지 않고 일찍 돌아온 그에게 아버지는 이루 말할 수 없이 화를 냈다. 그렇게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3년 동안 벙어리 행세를 하며 교리서를 탐독한 그는, 이에 감동한 아버지와 가족들을 천주교에 입교하도록 했다.

 

이토록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던 황석두는 1845년 페레올 주교가 입국한 이후에는 아예 주교에게 절제와 금욕을 위해 아내와 별거할 것을 허락받았으며, 사제가 되기 위해 다블뤼 신부에게 몇 년 동안 가르침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이미 아내가 있기 때문에 교황청에서 사제가 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자 공부를 그만두고, 서천 산막골로 이사해 1858년 페롱 신부의 복사, 교우촌의 회장 등으로 활발하게 활동했다. 또 다블뤼 주교의 복사로 전교활동을 도왔으며, 함께 교회서적을 번역하기도 할 만큼 교회의 여러 방면에서 재능을 보였다.

 

황석두 역시 1866년 병인박해가 휘몰아칠 당시 순교했는데, 홍주 거더리에서 다블뤼 주교와 위앵 신부, 오매트르 신부가 체포되자, 자신을 체포하지 않는 포졸들에게 직접 주교를 따라가겠다고 당부해 함께 서울로 압송됐다고 전해진다.

 

포도청의 신문과정에서도 황석두는 '대군대부'인 천주를 배반할 수 없다고 자신의 신앙을 증거 했으며, 3월 23일 사형선고를 받고 같은 달 30일, 충남 보령의 갈매못으로 이송돼 목이 잘렸다. 당시 그의 나이 54세였다.

 

이후 황석두의 형의 아들이자 양자였던 황천일(요한)이 그의 시신을 거두어 본가로 옮겼다가 홍산 삽틔에 장사지냈다고 전해진다. 1968년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시복됐고, 1984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돼 현재 한국의 103위 성인 가운데 한 명이 됐다.

 

[가톨릭신문, 2011년 7월 31일, 오혜민 기자]

 


 

 

성 황석두 루카(黃錫斗 Lucas, 탁희성 비오 작)

 

성 황석두(黃錫斗) 루가(1813-1866)

 

일명 '재건'으로도 불리는 성 황석두 루가는 충청도 연풍에서 양반집 3대 독자로 태어났다. 성장하여 부친의 뜻에 따라 과거보러 상경하던 중, 한 주막에서 천주교인과 사귀게 되어 입교했다. 그 후 부친의 반대를 무릅쓰고 3년 동안이나 벙어리 행세를 해가면서 교리서적을 탐독하였고 그 결과 박대하던 부친과 가족들도 입교하였다. 이같이 뛰어난 덕행과 교리지식으로 그는 주교와 신부들의 복사로, 또 회장으로 활동했다.

 

또 고 페레올 주교에게 금욕과 절제를 위하여 아내와 별거할 것을 허락 받고 독신생활을 하였다. 안 안토니오 다블뤼 주교를 도와 교리서를 번역하여 교회서적 출판에도 참여했다. 1866년 3월 충청도 홍주 거더리에서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는 안 주교를 몇 십리나 따라가 결국 체포되어 주교와 함께 서울로 압송되었다. 3월 23일 사형을 선고받고 3월 30일 충남 보령군 '갈매못'에서 안 주교, 민 신부, 오 신부, 장주기 등과 함께 군문효수형을 받고 54세로 순교했다.

 


 

 

수원교구 미리내 성지의 103위 시성 기념성당 옆벽에 설치된 한국 순교성인화입니다. 성 오메트르 베드로, 성 위앵 루카, 성 다블뤼 안토니오, 성 황석두 루카, 성 장주기 요셉의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조창원 작, 황석두 루카와 장주기 요셉의 순교, 58 x 87.5cm, 2008년

 

 

 

 

 


 

성금요일의 순교자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