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례를 살다] 영성체 예식 (1) 최창덕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신부 (대구가톨릭대학교 부설 평신도신학교육원 원장)
축성(祝聖)하고 봉헌한 음식인 거룩한 주님의 몸을 받아먹는 식사를 영성체라 합니다. 미사가 잔치라는 성격을 뚜렷하게 드러내는 부분입니다. 잔치의 특성은 함께 먹고 마시는 데서 느끼는 기쁨과 즐거움입니다. 자신의 몸을 우리의 음식으로 내놓으신 그리스도의 인간에 대한 사랑이 가장 강렬하게 드러나는 곳도 바로 영성체를 통해서입니다. 그러나 솔직히 현재 우리가 받아먹는 성체를 가지고서는 도대체 식사 잔치의 성격도, 그리스도의 사랑도 제대로 드러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듭니다. 입에 넣으면 금방 녹아버리는 무슨 종잇조각 같은 작은 제병 모양은 도통 빵이란 생각이 들지 않기도 합니다. 50년도 넘은 옛날, 첫 영성체 준비 교리를 배울 때 수녀님에게서 들은 말씀이 지금도 머리에 맴돕니다.
“예수님의 몸을 씹어 먹으면 예수님이 피를 흘리시니까 씹지 말고 삼켜야 한다.” 불행히도 지금도 그렇게 알고 계시는 분이 많은 것 같습니다. 식탁에서 부모님이 어린 아이들이나 자녀들에게 음식을 건네주실 때 “꼭꼭 씹어 먹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데 그럼 성체는 음식이 아닌가요? 사제가 영하는 큰 제병의 성체는 씹어 드시는데 작은 성체는 삼켜야 하는지요? 경직된 교리가 실천적인 면에서 구체화되는 잘못된 전형입니다. 일선 사목자들은 씹을 수 있을 정도로 크고 두꺼운 제병을 준비하면 좋겠습니다. 그것도 본당 예산 문제와 연결되는지? 무엇보다도 주님의 몸이 음식이라는 생각이 들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베푸신 최후의 만찬은 파스카 식사의 양식을 따른 식사였습니다.
영성체 안에서 성찬례 거행과 실제적인 성찬례 참여가 완성됩니다. 영성체는 잔치 전체의 본질적 부분이자, 두 번째 정점이며 원래의 목표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자신을 몸과 피를 건네주시면서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먹어라.”와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 마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미사는 그 기원과 내용이나 형식으로 보아 성대하고 거룩한 식사 예식입니다. 어떤 사람이 성체와 성혈로 변하는 “변화 신심” 또는 경배 신심에만 머물러 있고 그로써 만족하기를 원한다면 그는 성찬례를 거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찬례의 목적과 의미는 주님의 몸을 받아 먹음으로써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고 또한 같은 빵을 나누어 먹는 그리스도인들 간에 이루는 일치에 있기 때문입니다.(1코린 10,16-17 참조)
이 예식의 라틴어 명칭(‘꼬무니오, communio’)은 원래 ‘상호 염려’, ‘공동 소유’, ‘함께 나눔’ 등을 뜻했습니다. 공동체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함께 나누거나 함께 참여함을 뜻했습니다. 후에 이 단어는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요한 6, 56)는 성경 말씀에 따라 거룩한 잔치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이루는 일치와 친교로써 그 의미를 가졌습니다.
예식에 관해서는 초세기까지만 해도 별도의 영성체 예식이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4세기 이후부터, 정확히는 313년 콘스탄틴 대제의 그리스도교 박해 종식령으로 인하여 신자 수가 늘어나면서 합당하게 영성체 준비를 하지 않거나 중죄를 짓고서도 함부로 성체를 영하는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게다가 성체와 성혈은 예수님의 거룩한 몸과 피라는 사실이 강조되고 여기에다 부당한 영성체를 경고하는 사도 바오로의 말씀과 교부들의 가르침이 부각되었습니다. “누구든지 올바른 마음가짐 없이 그 빵을 먹거나 주님의 잔을 마시는 사람은 주님의 몸과 피를 모독하는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각 사람은 자신을 살피고 나서 그 빵을 먹고 그 잔을 마셔야 합니다.”(1코린 11,27-28 참조) 시간이 지나면서 차츰 합당하게 성체를 받아 모시기 위한 준비 예식이 하나 둘씩 도입되었습니다. 이제 자연히 주님을 합당하게 받아 모시려면 먼저 각자가 마음을 깨끗이 하고, 주님 및 형제들과 화해를 하는 것이 마땅한 도리라고 생각하여 차츰 영성체 전후의 예식을 강화했습니다. 그 결과로 1년에 한 번에서 두 번까지 혹은 더 드물게 성체를 모시는데 만족함으로써 교회사 안에서 성찬례의 올바른 관점이 점점 멀어져갔습니다. 이러한 배경에 따라 형성된 현행 영성체 예식은 영성체를 합당하게 모시기 위한 준비 예식(주님의 기도), 본래의 영성체(동반 행렬, 영성체 노래), 그리고 받아 모신 주님께 감사와 찬미를 드리는 감사 예식(영성체 후 기도) 등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영성체 예식의 의미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모시기 위해 올바른 준비를 하고 그에 맞갖은 찬미와 감사를 드리는데에 있습니다.
주님의 기도 (1)
우리는 흔히 주님의 기도 하면 으레 모든 사람들이 바칠 수 있는 기도로 생각하기 쉬운데 그 역사를 보면 초대교회에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그러하지만 그 때만 해도 주님의 기도는 교회의 가장 소중한 보배 중의 하나로 여겼습니다. 따라서 주님의 기도는 교회의 정회원들, 곧 세례 받은 교인들에게만 유보되어 있었으며, 미신자들, 심지어는 예비 신자들에게조차도 가르쳐 주지 않았습니다. 주님 친히 가르쳐 주신 기도를 바칠 수 있다는 것은 세례 교인의 특권이었습니다. 이에 주님의 기도는 또 다른 이름인 ‘신도들의 기도’라는 명칭도 가졌습니다.
그 시대 신자들이 얼마나 삼가고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이 기도를 바쳤는가는 동서방을 막론하고 교회의 전례에서 아직도 사용하고 있는 주님의 기도 인도문만 보아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동방 교회가 주님의 기도를 시작하기 직전에 오늘날까지 사용하고 있는 인도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주여, 우리가 기쁜 마음으로 또한 분수에 넘치지 않게 하늘에 계신 하느님 당신을 아버지라고 부르며 삼가 아뢸 수 있게 하소서, 하늘에 계신 우리 우리 아버지….”
서방 교회인 로마 교회는 오늘날도 주님의 기도를 바치기 전에 전통적인 인도문인 “하느님의 자녀 되어 구세주의 분부대로 삼가 아뢰오니….” 하고 주님의 기도를 바치게 인도합니다. 주님의 기도를 바치는 자리도 동서방 교회 공히 성찬 전례와 관련을 맺어 주님의 몸을 받아 모시는데 합당한 준비의 기도로 바쳤음을 분명히 밝혀주고 있습니다. 옛 교회에서는 이처럼 주님의 기도를 바칠 때 늘 삼가고 두려워하는 마음을 다듬곤 하였는데 오늘날 우리에게서 이러한 태도를 찾아보기 어려운 점은 유감스럽습니다. 이제라도 제대로, 그리고 마음을 모아 기도 중의 기도요, 주님께서 친히 가르쳐 주신 유일한 기도인 주님의 기도를 정성껏 바칩시다.
[월간빛, 2014년 7월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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