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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관련>/◆ 교리 & 영성

[사도신경 해설 11] “천지의 창조주”

by 파스칼바이런 2016. 1. 17.

[사도신경 해설 11] “천지의 창조주”

(1) ‘창조주’ 하느님

최영철 알폰소 신부

 

 

 

 

“한 처음에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창세 1,1). 성경의 첫 구절은 창조에 관한 말씀이다. 하느님께서 행하시는 첫 사랑의 행적은 창조이다. 그래서 신경이 하느님에 대해 고백하는 첫 내용도 “하늘과 땅의 창조주”라는 것이다.

 

창조는 아무 것도 없는 데서 지어내는 것이므로 전능한 존재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창조 이전에는 “어둠이 심연을 덮고 있었는데”(창세 2,2) 심연 위에는 하느님의 영이 감돌고 있었고, 하느님께서 말씀하기 시작하자 창조가 개시되었다. 하느님은 어떠한 기존재료나 도구에 의존하지 않고 오로지 말씀과 영으로써 창조하셨다. ‘말씀’과 ‘영’은 후대 성경에 의해 성자와 성령으로 밝혀진다. “주님의 말씀으로 하늘이, 그분의 입김으로 그 모든 군대가 만들어졌네”(시편 33,6). 창조는 성부의 주요 업적이지만 성자와 성령도 동참하신 일이다. “한 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모든 것은 그분을 통해서 생겨났다”(요한 1,1-3).

 

창조는 하느님의 구원 계획과 실행의 시작이고 기초이며, 따라서 구원 역사의 개시이다. 구원은 아브라함의 부르심이 아니라 창조와 더불어 시작되었다. 구원은 창조의 계승이며 새 창조이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창조 이후 죄가 들어와서 그로 말미암아 문란해진 세계질서를 바로잡고 회복시키는 복구이다. 창조된 모든 것이 구원의 대상이다. 창조가 구원과 관련하여 이해될 때 그 의미와 목적이 분명해진다.

 

“세상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창조되었다.” 창조의 목적은 하느님이 “당신의 영광을 더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영광을 드러내고 나누어 주시기 위해서”다. 하느님께서 당신 사랑과 선하심에서 창조하셨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이 부족함을 보충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당신의 선을 나누고 완전함을 드러내시기 위해 창조하셨다. 하느님의 영광은 인간의 행복이고 완성이다. 하느님은 말씀과 영에 의해 창조하셨으므로 만물은 그분의 능력과 지혜에 따라 지어졌다. 그러므로 세상 만물은 우연의 선물도 아니고 어떤 필연성의 소산도 아니다. 하느님께서 피조물들을 당신의 선과 사랑에 참여시키고자 자유로이 창조하셨으므로 그것들을 하느님의 지혜와 아름다움의 표현이다. “주님, 당신의 업적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 모든 것을 당신 슬기로 이루어졌습니다”(시편 104,24). 피조물들은 하느님의 지혜와 선에서 창조된 작품들이므로 진, 선, 미 자체이신 하느님을 나타내는 방편이다. ‘주님, 하늘은 당신 영광을 노래하나이다.’

 

예수님은 창조주의 의도에 비추어, 어떤 이유로든 혼인의 인연이 풀릴 수 없다고 단언하셨다. “창조 때부터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 하느님께서 맺어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마르 10,6-9). 창조 신앙을 근거로 그분은 하느님을 이용하여 헛된 약속을 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치셨다. “하늘을 두고도 맹세하지 마라. 하느님의 옥좌이기 때문이다. 땅을 두고도 맹세하지 마라. 그분의 발판이기 때문이다”(마태 5,34). 창조 신앙은 어떠한 난관 앞에서도 예수님이 좌절하지 않고 극복할 수 있는 힘과 희망의 원천이었다. 창조주가 전능하신 아버지이신 까닭에 예수님은 어떤 처지에서도 희망하고 신뢰할 수 있었다. 아울러 예수님은 만물을 보살피는 하느님의 섭리에 의지할 것을 우리에게 당부하신다. “하늘의 새들은 씨를 뿌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을 뿐 아니라 곳간에 모아들이지도 않는다. 그러나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는 그것들을 먹여 주신다. 너희는 그것들보다 더 귀하지 않느냐?”(마태 7,26).

 

 


 

 

[사도신경 해설 12] “천지의 창조주”

(2) 하느님의 ‘섭리’

 

 

"하느님께서 보시니 좋았다"(창세 1,3.13.19.21.25.31). 하느님은 6일간 창조하셨는데 창조의 하루가 끝날 때마다 ‘좋았다’고 평가하셨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선과 완전성을 나누어주기 위하여 지혜와 능력으로써 자유로이 세상을 지으셨으니 피조물 세계는 좋을 수밖에 없다. 세상은 선과 질서, 조화와 아름다움 속에 지어졌다. 그런데 왜 ‘좋고 선하게’ 지어진 세계 안에 무질서와 불균형, 추함과 악이 성행하는가? 왜 전능하고 선하신 창조주는 피조물 세계 안에 악이 스며들고 작용하게 허용하시는가? 세상 안의 악과 불행에 관한 질문에 대해 성경은 명확히 답하지 않는다. 성경은 두 가지 대답만을 분명히 제시한다. 온전히 자유로우신 하느님께서 인간의 성숙과 완성을 위하여 그에게 자유를 사용하도록 선사하셨다는 것과, 인간이 자유를 남용하여 죄를 지음으로써 세상에 악과 불행을 끌여들였다는 것이다. “한 사람을 통하여 죄가 세상에 들어왔고 죄를 통하여 죽음이 들어왔다”(로마 5,12). 성경은 ‘악의 존재’와 관련한 문제 해답들을 추구하는 대신에 하느님의 섭리를 강조한다.

 

전능하신 창조주께서 피조물들을 보살피는 행위를 ‘섭리’라 한다. 피조물들을 그 완성에로 이끄시며 보호하고 보살피는 사랑의 배려이다. 창조는 마치 건축가가 건물을 지은 후 그대로 방치해 두는 그런 행적이 아니다. 하느님은 만물을 시초부터 존재하게 만드실 뿐 아니라 보존하고 발전시키며 완성시키는 창조주이시다. 모든 피조물은 비록 스스로 하느님을 떠날지라도 온전히 하느님의 손안에 있다. 그러므로 사랑의 배려로 섭리하시는 창조주께 우리는 마음 놓고 신뢰할 수 있다. 예수님은 창조주 하느님의 전능에 대한 전적 신뢰를 촉구하신다. “목숨을 부지하려고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또 몸을 보호하려고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마라. 목숨이 음식보다 소중하다. 들에 핀 나리꽃들이 어떻게 자라는지 지켜보아라. 그것들은 애쓰지도 않고 길쌈을 하지 않는다. 들풀까지 하느님께서 이처럼 입히시거늘, 너희야 더 잘 입히시지 않겠느냐?”(마태 6,25-30). 세상 곳곳에서 자연 재난이 발생할지라도 우리는 하느님께서 전능과 애정으로 세상을 돌보심을 확신해야 한다. 하느님은 가장 작은 것들까지도 보살필 정도로 세밀하게 배려하신다. “참새 두 마리 가운데 한 마리도 너희 아버지 허락 없이는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 그분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두셨다”(마태 10,29).

 

섭리에 대한 신뢰는 하느님께서 주신 것을 우리가 잘 이용하도록 이끈다. 우리는 섭리에 대한 신뢰심과 선행을 통하여 섭리에 협력할 수 있다. 악까지 하느님의 섭리에 벗어나 있지 않다. 하느님은 당신만이 아시는 길을 통하여 죄악까지도 활용하신다. 마침내 죄악으로부터 선을 이끌어 내실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곧 선에 근거한 전능의 힘이다. 섭리에 대한 신뢰를 촉구하려는 의도에서 예수님은 ‘가라지의 비유’(마태 17,24 이하)를 들려주신다. 이 비유를 통해, 인내와 선으로써 악을 대하고 극복하라고 권고한다. “주인님, 밭에 좋은 씨를 뿌리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가라지는 어디서 생겼습니까?” 하인의 보고를 들은 주인은 원수의 짓인 줄 알고는 가라지들을 거두지 말고 그대로 두어라고 지시한다. ‘너희가 가라지들을 거두어 내다가 밀까지 함께 뽑을지도 모르니 수확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 수확 때에 내가 알아서 처리하마.’ 섭리에 대한 신뢰는 악을 악이 아니라 선으로 대하며 극복할 수 있게 해준다. 섭리는 재앙을 축복으로 바꾸는 ‘전화위복’의 하느님을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