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가톨릭 관련>/◆ 교리 & 영성

최대환 신부의 인물과 영성 이야기 (4) 알프레드 델프 신부(상)

by 파스칼바이런 2016. 1. 30.

최대환 신부의 인물과 영성 이야기 (4) 알프레드 델프 신부(상)

나치 폭력 하에서 내면적 자유의 고귀함 지켜내

발행일 : 가톨릭신문 2016-01-24 [제2979호, 16면]

 

 

‘인간이 왜 정신적 존재인가’ 삶으로 보여

반전 지성인 단체 활동… 반역죄로 교수형

옥중 수기, 신앙인 지식인들에게 큰 영향

 

 

▲ 히틀러와 나치 치하 독일에서 자유의 참의미를 누구보다도

깊이 깨닫고 실천했던 알프레드 델프 신부.

 

“자유는 하느님과의 만남에서 시작한다”… 알프레드 델프 신부

 

감옥에서 피어난 자유의 영성

 

어둠이 깊은 시대에 놀랍게도 그 어둠의 야만과 폭력, 그리고 유혹으로부터 내면의 자유와 정신의 고귀함을 지켜내고 그 인격의 진면목을 보여준 빛나는 인물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이들을 대하며, 비로소 스스로 설정해놓은 정신적 삶에 있어서의 안이한 한계를, 세상의 불의와 위협과 타협하고 외면했던 마음을 부끄러워하기 시작합니다. 또한 내적 자유와 정신의 존엄을 지켜내는 정신적, 영적 힘을 하느님과의 영혼 깊은 곳에서의 만남을 통해 길어낸 신앙인들, 증거자들의 글과 행적을 대하면서 시대와 대면하는 살아있는 영성이란 무엇인지를 실감하게 됩니다.

 

히틀러와 나치 치하의 독일에서 양심과 자유와 신앙을 지키려 하다가 체포되어, 비밀경찰의 가혹한 심문과 거짓된 재판 끝에 교수형을 선고받고 죽어간 독일의 예수회원 알프레드 델프(1907~1945) 신부 역시 그러한 신앙인이자 증거자였으며 자유의 참의미를 누구보다도 깊이 깨닫고 실천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인간이 왜 정신적 존재인가를 삶으로, 글로써 보여주었습니다. 1944년 7월 28일 체포되어, 이듬해인 1945년 2월 2일 처형될 때까지의 시간 동안 그가 남긴 옥중 수기는 그의 깊은 영성을 담고 있습니다. 그의 ‘옥중 수기’는 ‘죽음을 눈 앞에 두고’(In Angesichtdes Todes)란 책으로 1947년 출간되어 세대를 거듭하여 오랫동안 특히 독일어권내 많은 그리스도인들과 젊은 지식인들에게 큰 감명과 영향을 주었으며 1988년에 간행된 그의 전집에는 ‘IV권: 감옥에서’라는 이름으로 실려있습니다. 2007년에는 같은 내용이지만 ‘묶인 손으로’(Mit gefesselten Händen)라는 제목으로 당시 독일 주교회의 의장 칼 레만 추기경의 서문과 함께 출판되었습니다. 이 새로운 제목은 매우 깊은 의미를 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알프레드 델프가 평소 좋아했고 자신의 방에 그 사진을 붙여놓았던 르네상스 시대 독일의 유명한 조각가 리멘 슈나이더의 작품인 ‘사슬에 묶여진 손’을 연상시키는 동시에 감옥에서 그가 처했던 상황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이번호 부터 세 번에 걸쳐 알프레드 델프 신부가 옥중에서 남긴 일기와 묵상 중 특히 생애의 마지막 공현 대축일을 보내며 적은 묵상과 우리에게 깊은 성찰을 하게하는 ‘주님의 기도’에 대한 묵상을 중심으로 그의 영성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저술에 담긴 깊은 영성과 통찰력 있는 시대진단은 지나간 어두운 시대에 대한 역사적 증언을 넘어 시대와 공간을 달리하는 우리들에게도 큰 호소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죽음을 눈 앞에 두고’ ‘묶인 손으로’ 그해 겨울, 대림에서 주님 봉헌 축일(2.2)의 시간 사이에 그가 남긴 신앙과 영성의 귀한 유산을 접하며 이번 겨울에 우리 스스로의 내면과 실천을 돌아보며 용기와 위로를 얻는 작은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마지막 겨울

 

원래 개신교적 종교적 배경에서 자라났던 알프레드 델프는 청소년기에 가톨릭으로 개종하였습니다. 1926년 예수회에 입회한 그는 1936년에 사제품을 받습니다. 사회학을 공부한 후 다시 철학을 본격적으로 연구하고자 했지만 나치 정권의 등장 후 본격화된 가톨릭 교회, 특히 예수회에 대한 정부의 적대감과 압박 때문에 원래 계획한 뮌헨 대학에서의 계속적인 철학 연구를 포기하고 예수회가 발간하던 시대 비판적인 잡지 ‘시대의 소리’(Stimmen der Zeit)에서 소임을 하게 되며, 1939년부터는 편집장을 맡기도 합니다. 한편 1941년에 나치 정권은 아예 이 잡지의 출판을 금지시킵니다. 1939년부터 1944년 7월 비밀경찰에 의해 체포될 때까지 그는 뮌헨 근교 보겐하우젠의 성혈 성당에서 본당 신부로 봉직하게 되는데 이 시기에 그는 여러 번 유대인들이 스위스로 망명하는 것을 도와주기도 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또한 지속적으로 글을 통해 그 시대의 ‘하느님을 알아본 능력을 잃은’ 사람과 문화를 비판적으로 성찰하고, 하느님과의 깊은 만남에서 오는 자유에 기초한 새로운 인본주의를 추구합니다. 이러한 정신적인 모색은 그가 관구장 제의에 의해 헬무트 제임스 폰 몰트케 백작을 주축으로 하는 크라이스아우어 모임에 함께하면서 심화됩니다. 그들은 히틀러 이후 새로운 정신적 질서의 건설을 위해 매우 심도 있게 견해를 나누었는데, 델프 신부는 새로운 사회 안에서 가톨릭의 사회적 가르침에 기초한 교회의 역할에 대해 깊이 고민하고 관심을 가졌다고 합니다. 이 크라이스아우어 모임과의 공동작업은 결국 알프레드 델프 신부에게는 자신의 생명을 건 모험이 되었습니다.

 

1944년 1월 몰트케 백작을 포함한 여러 크라이스아우어 모임 일원들이 체포되면서 델프 신부의 신변도 위협을 받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1944년 7월 20일 독일군 장교였던 클라우스 폰 슈타우펜베르크 백작 등이 중심이 되어 ‘작전명 발퀴레’란 이름으로 히틀러 암살이 시도되지만 실패하고, 바로 그 다음날 폰 슈타우펜베르크를 비롯한 주요 관련자들이 베를린에서 총살됩니다. 이런 상황에서 비밀경찰은 크라이스아우어 모임을 나치 정권 전복을 위한 광범위한 시도 중 하나로 옭아매려 했고, 결국 7월 28일 델프 신부는 보겐하우젠 성당에서의 미사 후 체포, 구금되어 고문을 포함한 가혹한 심문을 받게 됩니다. 그들이 원했던 암살 사건과의 관련은 입증하지 못했지만, 비밀경찰은 그와 크라이스아우어 모임의 동지들을 나치 이후 국가의 질서를 논의한 것 자체를 반국가적 행위로 규정하고 사형으로 몰고 갑니다. 무엇보다 이들이 깊은 신앙을 가진 가톨릭과 개신교 신앙인으로서 무신론적이고 반인간적인 나치정권과 다른 정신적 가치를 추구한 사실이 그들을 더욱 자극하였습니다.

 

예수회 사제였던 델프 신부에게 정권과 재판관들이 보여준 적대감은 이러한 정치적 재판이 사실상 비인간적 정권과 그리스도교 정신 사이의 양립할 수 없는 충돌에서 비롯했다는 것을 알게 합니다. 악명높은 재판관 프라이슬러가 이끈 선동과 거짓증언, 교활함으로 가득 찬 재판이 진행되었고, 그는 마침내 1945년 1월 11일 사형판결을 받습니다. 몰트케 백작 등이 1월 23일 처형된 것과는 달리, 델프 신부에 대한 사형집행은 한동안 유예되었고 동료에 대한 걱정과 애도, 감형에 대한 희망과 처형에 대한 각오 등이 그의 마음을 채웠던 그 마지막 날들이 얼마나 극단적인 인내와 용기를 요구했던 시험의 시간이었는지는 그가 가명을 써서 협조자들 도움으로 비밀리에 외부로 전한 쪽지들에 절절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마침내 2월 2일 주님 봉헌 축일에 그는 베를린 플뢰첸제에 있는 감옥의 교수대에 오르게 됩니다. 그의 수형생활과 임종을 돌본 페터 부흐홀츠 신부는 그의 평온하고 의연한 마지막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델프 신부는 그에게 마지막 순간에, “이제 반 시간 후면 나는 당신보다 더 많이 알게 됩니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델프 신부는 이미 자신의 수고에, “우리가 죽기 때문에 다른 이들이 언젠가 보다 더 잘 살수 있어야 한다. 보다 더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어야 한다”라고 적어두기도 하였는데, 이는 그가 얼마나 진지하게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준비하였는지를 보여줍니다. 처형 후 그의 시신은 화장되어 베를린 외곽에 뿌려졌습니다. 무덤 대신에 기념비가 그가 봉직한 본당 주변에 세워져 그를 기억하게 합니다.

 

최대환 신부 (의정부교구 정발산본당 주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