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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관련>/◆ 전례 & 미사

[거룩한 미사전례] 새 로마 미사 경본 中 수정사항

by 파스칼바이런 2018. 3. 9.

[거룩한 미사전례] 새 로마 미사 경본 中 수정사항

 

 

 

 

 

 

미사 중 주례 사제가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Dominus vobiscum)라고 하면 회중이 “또한 사제의 영과 함께”(Et cum spiritu tuo)라고 주고받는 인사는 모두 다섯 차례다. 이 대화는 단순한 통상적 인사말이 아니라 부활하신 주님께서 현존하심을 확인하는 것이므로 전례가 이루어지는 토대를 일깨워주는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우리말 번역에서 “또한 사제와 함께.”는 의역이고 원문을 직역하면 “또한 당신(그대)의 영과 함께.”라고 할 수 있다. 새 미사 경본에서 바뀐 점은 ‘당신(그대)’를 ‘사제’로 바꾸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영’이라는 단어를 삭제했다는 것이다. ‘당신(그대)’ 대신 ‘사제’라는 말로 번역한 것은 쉽게 이해된다. 하지만 우리말에서 존경을 드러낼 때 사용하는 극존칭 ‘당신’과 단수 2인칭 대명사인 ‘너’와 ‘당신’을 사용할 때 생겨날 수 있는 모호함 때문에 회중의 응답에서 ‘당신의(그대의)’에 해당하는 ‘tuo’는 ‘사제의’ 또는, 상황에 따라 ‘부제의’로 번역하는 것이 올바르다.

 

그런데 ‘영’이라는 말은 동양에서 부정적인 의미가 강한 것이 사실이지만 초기 교회의 전통과 교부들의 증언에 따르면 “Et cum spiritu tuo.”의 ‘spiritus’가 사제의 영혼이 아니라 그가 서품식 때 받은 성령과 그 성령께서 주시는 직무수행의 은사를 가리키고 있음을 알아 두어야 한다. 그만큼 사제직이 중요함을 의미한다. 구체적인 증거로는 로마 히폴리투스(170/175-236)의 「사도 전승」 4장과 25장의 증언이다(로마의 히폴리토, 「사도 전승」, 이형우 역, 분도출판사 참조): “(…)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면, 모든 이는 ‘또한 사제의 영과 함께’(Et cum spiritu tuo)라고 응답할 것이다. ‘마음을 드높이.’ ‘우리는 주님께 (마음을) 향하고 있습니다.’ ‘주님께 감사합시다.’ ‘마땅하고 옳은 일입니다.’ 서품은 성령께서 내려주시는 특별한 은사이므로 각 직분에 맞게 베풀어 주신다. 이 작품에 따르면 주교 서품에서는 “위대한 영”을, 사제 서품에서는 “은총과 의견의 영”을, 부제서품에서는 “은총과 열의의 열성의 영”을 받는다고 언급한다. 따라서 이 인사는 사제가 서품식 때 받은 이 성령의 은사로써 주님의 뜻에 따라 특별하고 초월적인 방식으로 자신의 직무를 수행함을 가리킨다는 해석으로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주의할 점은 주례 사제가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를 “여러분의 영과 함께”로 바꾸면 안 된다.

 

[2018년 1월 14일 연중 제2주일 전주주보 숲정이 9면, 안봉환 스테파노 신부(광주 가톨릭대학교)]

 

 


 

 

「로마 미사 경본」(2002년 제3표준판과 2008년 수정판 한국어)의 두 번째로 큰 변경사항은 “(‘모든 이’ →) 많은 이를 위하여”(Pro multis : 마태 26,28 참조)이다. 경신성사성의 결정에 따라, 감사 기도에서 주님의 말씀 가운데 “모든 이를 위하여”가 라틴어 본문에 충실하게 “많은 이를 위하여”로 수정되었다. ‘너희와 많은 이(라틴어 : pro multis, 그리스어: hypèr pollòn)를 위하여’에서 바뀐 (‘모든’ →) ‘많은’은 “이는 죄를 용서해 주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내 계약의 피다”(마태 26,28)라는 성경 본문을 그대로 살린 것이다. 과거에 ‘모든’이라고 쓴 것은 예수 그리스도 속죄 예물의 보편성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이해를 돕기 위해서, 교황 베네딕토 16세, 「나자렛 예수」 제2권, pp.163-177을 요약해 본다.

 

최근 가톨릭교회 사제 요제프 파셔의 작품 「성찬례」(1947)의 노선에 따라 새롭게 해석되고 있는 점은, ‘흘리는 것’이 텍스트의 언어 구조상으로 ‘피’가 아니라 ‘잔’과 연관되어 있다는 점을 고려해 볼 때 ‘잔’에 대한 말씀은 십자가 죽음의 경과와 그 효과에 대해서가 아니라 ‘성사적 행위’를 언급하고 있다고 본다. 예수님의 죽음이 ‘모든 이를 위하여’ 유효하지만 그분의 죽음이 지니는 성사로서의 효력 범위는 제한되는 것이다. 성사적 효력은 ‘많은 이’에게 미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이’에게 미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많은 이를 위하여’ 표현은 그리스어 의미가 아닌 셈족어 의미로 이해하더라도, 예수께서 ‘(유다인) 백성을 위해’ 죽으시지만 이는 유다 백성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전 세계에 흩어진 하느님의 자녀들, 곧 유다인과 이방인, 인류 전체를 하나로 모으기 위해 죽으셨다고 볼 수 있다. 이사야서에서 ‘많은 이’가 근본적으로 이스라엘 전체를 의미하는 것이라면, 교회는 믿음 안에서 예수님이 ‘많은 이를 위하여 흘릴’이라는 표현을 새롭게 사용한 것에 대한 응답으로써, 그분은 실제로 모두를 위해 돌아가신 것이라는 사실이 더욱 분명해진다. 따라서 ‘많은 이를 위하여’는 모든 사람을 다 포용하는 열려 있는 표현이며 동시에, 구원이 개인의 원의나 참여 없이 기계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믿는 이는 은총의 선물을 신앙으로 받아들이고 거기에 참여하여 초자연적 생명을 받도록 초대받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 신비와 하나 되어 끝까지 항구하게 살아가면서, 구원의 결실을 맺는 ‘많은 이’들 가운데 하나로 서게 된다.

 

[2018년 2월 25일 사순 제2주일 전주주보 숲정이 9면,

안봉환 스테파노 신부(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홍보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