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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하고픈 정치인] 김부겸(金富謙)

by 파스칼바이런 2018. 8. 16.

[기억하고픈 정치인] 김부겸(金富謙)

 

 

 

 

대한민국의 행정안전부 장관  

임기  2017년 6월 16일 ~  

대통령  문재인  

총리  이낙연  

전임  홍윤식  

대한민국의 경기 군포시의 국회의원(제16, 17, 18대)

임기  2000년 5월 30일 ~ 2012년 5월 29일

전임  유선호(제15대)  

후임  이학영(제19대)  

대한민국의 대구 수성구의 국회의원(제20대)

임기  2016년 5월 30일 ~  

전임  이한구  

 

신상정보  

출생일  1958년 1월 21일(1958-01-21) (60세)  

출생지  대한민국 경상북도 상주군 오대리  

거주지  대한민국 대구광역시 수성구 만촌동  

학력  연세대학교 행정대학원 행정학 석사  

경력  행정안전부 장관(2017년 ~ )

제20대 국회의원(2016년 ~ )

민주통합당 최고위원(2012년)

제16,17,18대 국회의원(2000년 ~ 2012년)

 

정당  더불어민주당  

소속  행정안전부  

부모  김영룡(부), 차숙희(모)  

형제  1남 3녀 중 장남  

배우자  이유미  

자녀  3녀  

군사 경력  군복무  면제 (실형)

 

김부겸(金富謙, 1958년 1월 21일 ~ )은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다.

 

1978년 대통령 긴급조치 9호 위반 등의 사유로 1981년 병역 소집이 면제됐다. 김대중 내란음모사건 등 2번의 구속으로 제적과 복학을 반복했다. 제정구 의원을 정치적 스승으로 모셨다.

 

1990년대 민주당에 입당했고, 국민통합추진위원회(통추) 조직위 부위원장을 지냈으며, 통합민주당과 신한국당의 합당으로 인하여 2000년 한나라당 소속으로 경기도 군포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이후 탈당해 열린우리당 창당에 참여했다. 2004년, 2008년 연속으로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2012년 4선이 보장된 군포를 버리고 대구 수성구 갑에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하지만 40.42퍼센트 득표율을 올리며 이변을 예고했다. 2014년에는 대구 시장 후보로 출마했으나 떨어지고 말았다. 하지만 이번에도 40퍼센트 넘는 득표율을 얻어 주목을 받았다.

 

2016년 대구 수성구 갑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대구에서 야당 후보가 당선된 건 신도환 국회의원 이후 31년만이다.(소선거구제하에서는 45년만) 지역주의를 극복하고 62.3% 득표율로 당선되었다.

 

2017년 6월 16일 문재인 정부의 초대 행정안전부 장관으로 취임하였다.

 

학력

상주남부초등학교 입학

대구초등학교 전학

대구초등학교 졸업

대구중학교 26회 졸업

경북고등학교 56회 졸업

서울대학교 정치학과 졸업 (정치학사)

연세대학교 행정대학원 외교안보 전공 석사과정 졸업, 행정학석사 (학위논문명 : 동북아시아 다자간 안보협력체에 관한 연구)

 

생애

1958년 경북 상주 오대리에서 부 김영룡, 모 차숙희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만 4세에 상주남부초등학교에 입학했다.

 

1967년 대구초등학교로 전학 후 대구중학교를 거쳐 1972년 경북고등학교 입학했다. 학생회장에 출마하여 차점자로 낙선했고, 학생회 문예부장으로 활동했다.

 

1975년 경북고등학교(56회)를 졸업했다. 동아일보 광고 탄압 사태에 항의하기 위하여 친구들과 함께 격려 광고를 게재했다. 서울대학교 낙방 후 성균관대학교에 진학했다. 대학 휴교령이 떨어지자 사법고시 공부를 하려다가 다시 대학입시를 준비했다.

 

1976년 서울대 사회계열에 입학했다. 이념 서클인 ‘농업경제학회’에 가입했다. 2학년 때 정치학과로 진로 선택했다. 1977년 11월 서울대 중앙도서관 점거 유신 반대 시위를 주도하다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구속 및 제적되었다. 1978년 서울고등법원에서 징격 1년, 자격정지 1년을 선고받고 영등포 구치소, 서울 구치소, 안양 교도소에서 복역하고 출소했다.

 

1979년 인천 부평 소재의 화공업체에 취업. 노동운동을 준비하던 중 ‘민주화운동으로 인한 수형자 병영문제(녹화사업) 대책위원회’를 구성하고 대구지역 연락책을 맡았다.

 

1980년 징병검사에서 수형으로 인한 소집 면제 처분되었다. '서울의 봄' 당시 학생운동 지도부로 활동. 5.17계엄령 확대와 함께 신군부의 포고령 위반 혐의(김대중 내란음모 사건)로 공개 수배됨. 두번째로 구속, 제적되어 안양 교도소에 복역.

 

1982년 민주화 운동 동지이자 친구인 이영재(목사)의 동생 이유미와 결혼. 12월에 첫딸 연수 태어남.

 

1983년 대구 미 문화원 폭파사건의 용의자로 몰려 수차례 강제 연행. 고초를 피해 가족들과 함께 서울로 이사.

 

1984년 작은 전자 회사에 취직, 처음으로 직장생활을 함.

 

1985년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년)에 가입하여 활동하며 신촌에서 서점 '오늘의 책'과 출판사 '이론과 실천'을 선배 김태경, 유재현 등과 함께 엶.

 

1986년 신림동 네거리에 '백두서점'을 엶. 재야운동에 본격적으로 투신하기로 하고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 간사생활을 시작함.

 

1987년 제적과 복학을 반복하다 마침내 서울대 정치학과의 졸업장을 받음. 6월 민주화 대투쟁 당시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의 집행위원으로서 명동성당 농성에 참여. 둘째딸 지수 태어남.

 

1988년 87년 12월 대선에서 양김의 분열로 패배한 후 예춘호, 조순형, 장기욱 등 야당 인사와 민청학련 세대인 제정구, 유인태, 원혜영, 고영하 등과 함께 '반지역주의 개혁 정당'을 표방한 한겨레민주당을 창당. 동작 갑선거구에서 첫 출마. 총선에서 실패한 후 '민중의 당' 추진 인사들과 함께 진보적 대중 정당 건설을 위한 정치운동 단체인 '진보정치연합'을 만들고 대변인으로 활동.

 

1990년 민주연합추진위원호(대표 이우재) 이재오 대변인과 함께 부대변인으로 활동.

 

1991년 3당 합당을 거부한 민주당(이기택 총재)에 입당하면서 제도정치권에 정식으로 입문. 9월 신민주연합당(김대중 총재)과 합당한 민주당에서 부대변인을 맡음. 당시 대변인은 노무현. 홍사덕.

 

1992년 서울 동작 갑 선거구 공천에서 낙천. 대선을 앞둔 11월에 '이선실 간첩단 사건'연루, 국가안보법 위반 혐의로 세번째 구속.

 

1993년 서울지법에서 국가보안법 중 불고지죄에 해당한다는 죄목으로 징역1년, 집행유에 2년을 선고받아 2월에 석방. 당무기획실 부실장(실장 제정구)으로 복귀. 대여 공세의 아젠다를 설정하던 '정세보고서'를 매주 발간하여, 당무기획실이 '야당의 안기부'라는 별호를 얻음.

 

1994년 셋째 딸 현수 태어남.

 

1995년 민주당 4대 지방선거대책위원회 기획실장, 수석 부대변인으로 일함. 지방선거에선 대승을 거두었으나 새정치국민회의의 분당 사태 일어남.

 

1996년 민주당이 개혁신당과 합당. '통합민주당'으로 출범. 15대 총선 과천.의왕 선거구에 출마하여 낙선. 이후 통합민주당에 남아 있던 중 '구당(救黨)모임'의 김원기, 박석무, 제정구, 김정길, 노무현, 유인태, 원혜영, 홍기훈 등이 결성한 국민통합추진회의(통추)에서 조직위 부위원장을 맡았다.

 

1997년 조순 서울시장을 후보로 내세워 대선을 준비하던 중 다시 조순-이회창의 연대로 통합민주당이 신한국당과 합당. 새로 창당한 한나라당 당적으로 변경되었다.

 

1998년 제정구 의원으로 선거구였던 경기도 군포시의 한나라당 지구당 조직책으로 임명, 중앙당 부대변인으로 활동했다.

 

1999년 한나라당 내 30~40대 신진 개혁 정치인 그룹인 '미래를 위한 청년연대'창립, 남경필과 공동대표를 맡음. 연세대 행정대학원에서 외교안보전공으로 석사학위 취득.

 

2000년 260표 차로 제16대 국회의원에 당선. 국회 정무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던 중 한국자산관리공사 임직원의 해외 금융기관 이직과 그에 따른 이해 상충 문제를 폭로. 백봉신사상 베스트 10에 선정되었다.

 

2001년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위원으로 보임됨. 김정일 위원장의 서울 답방과 관련, 국가보안법 개정 논의 당시 한나라당의 소장개혁파들과 당론에 맞서 자유 투표(크로스보팅) 및 개정 찬성 입장을 주장. 이후 크로스보팅에 대해서는 '정치 개혁을 위한 의원 모임(정개모)' 소속의 이재정, 정범구, 장성민, 한나라당의 김원웅, 김영춘 등과 함께 국가보안법 등 개혁 입법과 각종 민생법안에 적용토록 한다는 데 의견을 모음. 백봉신사상 대상 수상.

 

2002년 '미래연대' 단일 후보로 추대되어 정풍과 쇄신을 기치로 최고위원 경선에 출마하나 민정계가 석권한 가운데 낙선. 국회 공적자금 국정조사 특별위원회 위원으로 보임. 민주화보상심의위원회로부터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받았다.

 

2003년 이부영, 김홍신, 김부겸, 김영춘, 안영근, 원희룡, 이성헌, 심재철 등 10여 명의 개혁 성향 의원 모임인 '국민 속으로' 결성, 한나라당 내부 개혁을 위한 활동에 돌입. 여야의 개혁 성향 의원 35명과 함께 '유엔의 동의 없는 미국의이라크전 강행에 반대'하는 성명 발표. 민주당 의원들이 불참한 가운데 열린 본회의에서 '대북송금사건 특검 법안'에 대해 재석 162명 가운데 유일하게 반대표를 던짐. 김부'결'의원으로 불리며 당내에서 고립되기 시작. 고영구 국정원장에 대한 사퇴권고결의안에 대해 개력 성향 의원6명과 함께 반대 및 결의안 철회 촉구 성명 발표. 전국의 정치개혁 관련 단체와 여야 개혁파 의원 등 1천여 명이 모인 '정치개혁을 위한 범국민대회'에서 연설. 7월 7일 이우재 이부영, 안영근, 김영춘과 함께 한나라당을 탈당하고 '지역주의 타파 국민통합연대'를 결성. 언론에서 '독수리 5형제'로 불림. 11월 11일 민주당 탈당파 40명, 개혁당 2명의 국회의원들과 함께 총 47석으로 열린우리당을 창당.

 

2004년 김근태 원내대표 체제에서 홍보부대표를 맡았으나, 수석부대표의 공석으로 사실상 직을 대행하면서 노무현 대통령 탄핵 국면에 대응. 17대 총선에서 재선, 국회 통일외교통상위원회 위원에 보임. 신기남 당의장의 비서실장직을 맡음. 열린우리당 중앙위원으로 선출. 2001년에 이어 두번째 백봉신사상 대상을 수상. 여론조사기관 KSOI의 정치전문가 대상설문조사에서 원희룡, 유시민과 함께 '차세대 정치인으로 가장 주목되는 인물'에 선정됨.

 

2005년 정세균 원내대표 체제에서 원내수석부대표직에 선임. 4대 개혁입법과제 중 '과거사법'과 '사학법'을 처리하는 데 성공. 정기국회 중 국회 기자실에서 정부 여당의 쌀 의무도입 비준안 상정 방침과 관련 "세상에 어느 정부가 자국 농민들을 절망으로 몰고, 농민들을 죽이기 위해 비준안 처리를 하려고 하겠는가?"라는 브리핑을 마친후 눈물을 흘림.

 

2006년 전국 정당 건설을 슬로건으로 내걸고 전당대회에 처음으로 출마했으나 낙선. 국회행정자치위원회 위원으로 보임. 열린우리당이 급속히 약화되면서 구성된 비상대책위원호(7명, 위원장 김근태)에 상임위원으로 선임. 연말 여야를 망라한 중도 개혁세력을 규합하기 위해 손학규, 김효석, 고진화와 함께 서울 백범기념관에서 '대한민국 선진화대회'를 엶.

 

2007년 대통합민주당의 대선 후보 경선에서 손학규 후보의 선거대책본부를 총괄 책임지고 선거를 치렀으나 패배. 12월 정동영 대통령 후보의 경기도 선거대책위원장을 맡음.

 

2008년 통합민주당에서 박재승 위원장이 이끈 18대 총선 공천심사위원회 위원으로 선임. 18대 국회의원으로 당선. 국회 교육고학기술위원회 위원장으로 피선. 정권 고체기인 2월 국회 대정부질문에서 "민주주의를 죽이고 경제를 살릴 수 없다"는 제하로 이명박 대통령을 맹렬히 비판.

 

2009년 교과위 위원장 임기 2년 중 1년을 마친 후 사임. 원내대표 선거에 출마하여 낙선. 국회 문화체육관광방송통신위원회 위원에 보임. 문방위 국감에서 각종 입찰 비리와 수당의 부당 지급 등 부정 사실을 폭로, 현장 답사를 통해 문화재 보존 실태 보고서를 내는 등 국감 우수의원으로 선정되자 언론에서 '초선급3선 의원'으로 부름. 사형제 폐지 법안을 대표 발의.

 

2010년 연초 지방선거를 앞두고 '빅텐트-선거연합론'을 주창. 이어 시민사회 진영에서도 같은 주장을 제기하는 가운데 범야권에 걸친 야권 통합 논의를 촉발시킴. '당 개혁 특별위원회' 당원제도 분과위원장을 맡음. '더 큰 민주당'이라는 캐치프레이즈로 원내대표 선거에 재도전했으나 낙선.

 

2011년 4월 재보선에서 손학규 당대표의 분당 출마를 권유하고 선거사무소에 상근. 동아일보 창간기념 여론조사에서 '10년 뒤 한국을 빛낼 100인'에 선정됨. 브라질 룰라 대통령과 PT당의 정파등록제 연구 세미나에 참석, "진정 어린 대화와 소통의 정치, 좌우를 아우르는 포용의 리더십을 통해 브라질은 사회적 통합을 이루었다"는 연설로 진영의 논리가 지배하고 있는 우리 정치권에 상생의 정치가 필요함을 역설. 국회 저출산고령화대책특별위원회 위원장을 맡음.

 

2012년 민주통합당 최고위원 당선. 19대 총선을 앞둔 즈음, “한 지역구에서 4선 국회의원은 월급쟁이에 불과하다.”며 민주당 당적을 지닌 채 ‘보수의 심장’ 대구(수성 갑)로 출마했으나 낙선.

 

2014년 대구시장 선거 출마하였으나 낙선.

 

2016년 20대 총선에서 62.3%라는 높은 득표율로 당선되었으며, 이에 대하여 정치권과 언론에서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동진정책과 노무현 전 대통령의 전국정당화를 이어받았다는 평가가 나오기도 하였다.

 

2017년 대선을 준비하였으나, 진보와 보수 양 진영 모두에서 환영을 받지 못했다. 분권형 개헌이라는 국가 시스템의 체질개선안을 개발했고, 공동정부 구성안이라는 국민 통합안을 이끄는 계기가 된 개방형 공동경선을 제안했지만 힘이 실리지 않았다. 2월 7일 불출마 선언으로 이어졌다.

 

병역

1978년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실형 복역

1980년 수형으로 인한 소집면제 처분

 

경력

1977년 : 유신 반대 시위로 구속, 제적

1980년 : '서울의 봄' 당시 학생운동 지도부로 활동. 5.17계엄령 위반으로 구속, 제적

1986년 :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 간사

1987년 :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집행위원

1990년 : 민주연합추진위원회 부대변인

1991년 : 김대중 · 이기택 공동대표 민주당에서 본격적인 정치 시작

1991 ~ 1994년 : 민주당 부대변인, 당무기획실 부실장

1995년 : 민주당 4대 선거대책위 기획실장, 수석 부대변인

1996년 : 국민통합추진위원회(통추) 조직위 부위원장

1998년 : 한나라당 군포시 지구당 위원장, 부대변인

1999년 : 30~40대 신진개혁 정치인 그룹인 '미래를 위한 청년연대' 공동대표

2000년 5월 30일 ~ 2004년 5월 29일 : 제16대 국회의원 (경기 군포시) / 국회 정무위원회 위원

2001년 : 제16대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위원

2002년 : 제16대 국회 공적자금 국정조사 특별위원회 위원

2003년 : 국보법 폐지, 대북송금특검법 반대를 주장하며 당내 수구세력들과 갈등

2004년 5월 30일 ~ 2008년 5월 29일 : 제17대 국회의원 (경기 군포시) / 국회 통일외교통상위원회 위원/ 열린우리당 당의장 비서실장/열린우리당 중앙위원/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위원

2005년 : 열린우리당 원내수석부대표

2006년 : 제17대 국회 행정자치위원회 위원/열린우리당 상임비상대책위원

2007년 : 대통합민주신당 손학규 대통령경선후보 선거대책본부 부본부장/ 대통합민주신당 정동영 대통령후보 경기도 선거대책위원장

2008년 5월 30일 ~ 2012년 5월 29일 : 제18대 국회의원 (경기 군포시) / 통합민주당 공천심사위원회 위원/ 국회 교육과학기술위원회 위원장

2009년 : 제18대 국회 문화체육관광방송통신위원회 위원

2009년 : 4.27 경기도 분당(을) 재보선 선거대책본부장

2011년 : 제18대 국회 저출산고령화 대책특별위원회 위원장

2012년 : 민주통합당 최고위원/ 제19대 총선 대구 수성(갑) 출마, 40.4% 득표 낙선

2013년 : 미국 뉴욕 폴 니츠 고등국제학대학(SAIS) 펠로우쉽 연수

2014년 : 제6회 지방선거 대구시장 선거 출마, 40.3% 득표 낙선

2016년 5월 30일 ~ 2020년 5월 29일 : 제20대 국회의원 (대구 수성구 갑) / 제20대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위원/ 제20대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위원

2017년 6월 ~ 현재 : 제1대 행정안전부 장관

 

전과

대통령긴급조치9호위반: 징역 1년, 자격정지 1년 - 1978년 5월 12일 선고, 1980년 2월 29일 일반복권

국가보안법위반(기타): 징역 1년 집행유예 2년, 자격정지 1년 - 1993년 2월 22일 선고, 1995년 8월 15일 특별복권

 

가족

배우 윤세인은 김부겸의 차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