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승찬의 나직한 인터뷰] 노회찬 아저씨와 밥 먹은 날

[백승찬의 나직한 인터뷰] 노회찬 아저씨와 밥 먹은 날, 너무 좋은 사람이라서 발을 막 굴렀죠 경향신문 백승찬 기자 l 2018.12.21. 18:09     문단과 출판계에 나가면 김민정(42)을 ‘누나’나 ‘언니’라고 부르는 이들이 500명은 될지 모른다. 그냥 ‘민정’이라 부르는 이들도 500명은 될 것이다. 등단 19년에 시집 3권을 상재한 시인이고, 역시 그만큼의 기간 동안 400권이 넘는 책을 펴낸 출판인이지만, 김민정은 ‘시인님’ ‘대표님’ ‘선생님’이 아니라 오늘도 참으로 친근하게 불린다. 본인은 ‘상궁’이라 그렇다고 말하지만, 조금 그럴듯하게 ‘허브’라고 불러보자.   언제 어디서나 교정지를 들고 다니고, 오늘도 누군가와 술을 마시는(혼자서는 매일 마신다는) 김민정을 19일 서울 정동에서 만났다. “집에 돌아가서도 (머릿속의) 램프가 안 꺼진다. 다들 밤에 안 자는 문인들이라 밤 1시고 2시고 서로 전화를 한다”는 김민정은 스스로 ‘일중독’임을 인정했다.   19일 서울 정동길에서 만난 김민정 시인. 그는 자신이 대표인 난다 출판사에서 내년 첫 책으로 나올 막상스 페르민의 소설 <눈> 교정지를 들고 나왔다. /강윤중 기자 yaja@kyunghyang.com   나같은 거 하나 시 안쓴다고 큰일 안나 그래도 시집을 갖고 싶어 단거리 선수처럼 벼락치기 생긴대로 말하고 시를 써야   -세번째 시집 <아름답고 쓸모없기를>에 실린 ‘시인의 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시도 없이 시집 탐이 너무 났다.” 100권 넘는 시집을 만든 편집자라서 그런 건가요.   “2004년부터 시집 일을 하면서 알게 된 게 제가 시인으로 별 재능이 없다는 사실이었어요. 쓰는 일보다 만드는 일에 한 9배쯤 열정이 더 쏠리더라고요. ‘나 같은 거 하나 안 쓴다고 뭔 큰일이 나겠냐’ 하면서 두 번째 시집을 내고 한 5년 동안 시는 안 쓰고 ‘문학동네시인선’ 편집에만 몰두하는데 어느 날 ‘나도 이거 갖고 싶다’는 마음이 든 거예요. ‘내 안에 시로 떠드는 애’가 하나 있는데 걔한테 집을 주고 싶다…. 어느 날 돌 하나를 손에 쥐고 ‘아름답고 쓸모없기를’이란 시를 썼는데 이 제목으로 된 시집이면 여한이 없겠다 했죠.”   -‘시가 됐다’는 느낌은 어떻게 아나요.   “‘시는 평생 안됐다 싶은 거다’ 이걸 인정하면서 시라는 강박으로부터 좀 자유로워졌던 것 같아요. 제가 ‘촉’은 좀 있지만 시간이 없어서, 뭐라도 하나 생각나면 오래 기억해요. 그리고 마감이 있으면 막 쓰죠. 제가 초등학교 때 육상 단거리와 멀리뛰기 선수였거든요. 장거리면 폐활량을 조절하겠지만, 멀리뛰기는 발구름판만 생각하면 돼요. 그때 몸이 저를 그렇게 만든 것 같아요.”   -시집에는 지인과의 카카오톡 대화가 그대로 실려있기도 합니다. 어떤 시를 읽으면 ‘시인이 오늘 화났구나’ 하는 생각도 들고요. 자신을 세상에 드러내는 일이 쑥스럽지는 않나요.   “애초부터 전 ‘말씀’이 되는 시는 안 쓰겠다고 결심했어요. 이를테면 레모나 빈 껍데기로 이를 쑤시는 아저씨를 보면 그 껍데기에서 무슨 냄새가 날까 그런게 궁금한데 사람들과 그런 걸 공유하고 싶은 거예요. ‘난 이렇게 생겼다’고 말할 수밖에 없고, 그게 안되면 언어를 못 쓰겠어요. 전 누구든 솔직한 사람이 좋아요.”   -‘년’ ‘좆’ ‘젖’ 같은 어휘도 등장하더라고요.   “최승자 시인의 시를 읽다가 ‘못잊어 개새끼’라는 구절을 만났어요. 어라, 시에 ‘개새끼’를 넣어도 되는 거였어? 그 구절 속에서 진짜 사랑이란 걸 하는 여자가 절절히 보이는 거예요. 모두 그런 건 아니지만 보통 우리가 학교 때는 욕을 많이 하는 편이잖아요. 평소엔 해대면서 왜 시에서는 감추나. 제 시가 일상을 다룬 것들이 많다보니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 나오는 대로 내버려둔 것 같아요.”   시인이자 출판인 김민정. /강윤중 기자   김민정이 대표로 재직중인 출판사 난다에서 펴낸 <밤이 선생이다>.   김민정의 세번째 시집 <아름답고 쓸모없기를>. 문학동네시인선의 표지는 기존 색상집에 없는, 새로 물감을 섞어 만든 색깔이다.   ‘선생님’은 편하고 ‘후배들’은 좋아하고 가는 곳마다 ‘누나’ ‘언니’   원래 김민정은 소설을 쓰려고 대학에 갔다. 오정희처럼 ‘영악스러운 여자 아이’가 나오는 소설을 쓰고 싶었다. 그러나 김민정이 써낸 글을 본 교수와 친구들은 하나같이 “소설이 아니라 시 같다”고 평했다. 시를 전혀 모르던 김민정은 점심값을 아끼며 구내서점에 가 시집을 샀다. 무엇부터 읽을지 몰라 일단 시인의 약력을 뒤진 뒤, 자신의 고향인 인천 출신 시인의 시집을 골랐다. 인천에 대한 시라면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다가 인천 출신 장석남의 시에서 김민정이 아는 동네, 아는 레코드 가게, 아는 날씨를 만났다. “삽으로 떠서 벽에 걸고 싶은 예쁨”이 있었다. 김민정은 그런 시를 갖고 싶었고, 그래서 썼다. 1999년 김민정이 데뷔했을 때 ‘이것도 시냐’는 논쟁이 있었지만, 김민정은 꿋꿋이 써나갔다.   -김춘수, 박상륭 같은 대가들과의 만남도 시로 남겼습니다. 나이 차가 많이 나는 ‘선생님들’과도 잘 지내시네요.   “사람들마다 일반화되지 않는 아름다움이 있는데, 그걸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저는 운이 좋았어요. 어린이처럼 할말, 못할 말 구분 없이 종달새처럼 떠들 수 있게 선생님들이 품을 많이 내어주셨어요. 이상하게 전 어르신들이 편하더라고요.”   -‘누나’ ‘언니’라 부르는 사람도 많죠.   “피는 안 섞였는데 온갖 경조사 챙기는 친척 느낌이랄까. 위로 선배들은 고정됐지만 후배들은 계속 태어나잖아요. 그런데 저라는 사람을 가만 보니까 후배들을 엄청 좋아하는 거예요. 후배들에게는 일단 지고 보는 거예요. 제가 첫 시집에 특히나 애정이 넘치는데 그건 제가 첫 시집 만들 때 엄청 고생을 해서 그렇거든요. 어떻게 정리를 해야 하는지 알려주는 사람이 없었으니까요. 두려웠으니까요. 그래서 후배들이 첫 시집을 낼 때는 지나칠 정도로 곁에 붙어 참견쟁이가 되었던 것 같아요. ‘최소한 혼자라는 기분은 들게 하지 말자’ 하는 심사로. 근데 이제는 이모, 고모라고 부르는 이들도 생겨나기 시작한 거 있죠?”   화려한 패션 감각을 자랑하는 김민정 시인은 이날 메탈릭 플리츠 스커트를 입고 나왔다.   황현산 선생은 꼭 내 또래처럼 말해 허수경 시인의 수목장 나무에서 가져온 도토리 한 알 노회찬 의원은 발을 구를 정도로 좋았던 사람 아는 사람이 많으니, 떠난 사람도 많다. 김민정의 지인 중 많은 이들이 올해 타계했다. 황현산 문학평론가의 첫 대중적 저술인 <밤이 선생이다>는 김민정이 대표로 있는 출판사 난다에서 2013년 나왔다. 이 책은 7만부 팔렸고, 황현산은 금세 최고 반열의 칼럼니스트로 자리했다. 재독 시인 허수경, 노회찬 의원의 죽음도 올해 김민정을 덮쳤다.   -<밤이 선생이다>는 어떤 과정으로 내셨나요.   “문예중앙에서 일할 때 문학상 심사위원으로 모시면서 자주 뵙게 되었던 것 같아요. 제가 아끼고 좋아하는 시인들의 시집을 찾아보면 선생님이 해설자인 게 많았어요. 우리 아빠하고 동갑인데 말씀은 꼭 제 또래처럼 하세요. 저 같은 년이 뭐라고 말도 잘 들어주시고…. 그러다가 선생님이 고려대에서 정년퇴직을 하셨는데 제가 서운한 거예요. 정년퇴임 선물로 책을 드리고 싶어서 선생님 산문을 모았어요. 책이 인기를 얻으니까 퇴임 후 선생님을 찾는 곳이 엄청 많더라고요. 아마 돌아가시기 전 5년이 선생님 평생보다 더 바쁘셨을 거예요.”   -허수경 시인의 독일 장례식에도 다녀오셨죠.   “2004년부터 e메일로 원고 청탁하면서 인연이 됐어요. 언니가 ‘점점 우리말을 잃어버리는 기분이야. 소설이라도 좀 쓰면 나을까?’ 했고 제가 그것도 좋겠다 해서 소설 <박하>를 내기도 했어요. 언니는 편지 끝에 자주 ‘너는 시인이야. 시인이라는 걸 잊어버리면 안돼. 사랑해 민정아’라고 써주곤 했어요. 그러다가 지난 3월 e메일에서 작년에 암 수술을 받았고, 살 수 있을지 알았는데 다 전이됐다고 하더라고요. 당장 독일 가려고 전화했더니 ‘몸이 구겨진 종이 같으니 오지 말라’는 거예요. 대신 제게 남은 일들을 정리해달라고 부탁했어요. 그래서 자주 독일에 전화를 했는데 그때마다 너무 두려운 거예요. 안 받으면 언니가 죽은 거니까, 전화가 그렇게 무서울 수가 없더라고요. 황 선생님과 수경 언니는 서로 안면이 없었지만 저를 사이에 두고 안부를 전하곤 했어요. 선생님이 8월8일 돌아가셨는데 이후 언니의 컨디션이 급격하게 나빠지더라고요. 언니가 9월26일엔가 ‘목소리 좋아지면 내가 전화할게’라고 했는데 그게 마지막 통화였어요. 10월3일 황 선생님 보내드리는 낭독회를 열었는데 그날 언니가…. 언니와 통화할 때마다 다 녹음을 해두었어요. 행여나 제가 언니의 당부를 놓치는 게 있을까봐. 저는 저를 잘 믿지 못하거든요. 지금도 노래 듣듯이 언니와의 대화를 들어요. 독일에서 언니 수목장을 하고 나오는데, 장례지도사가 제 어깨를 치면서 그 나무에서 떨어진 도토리를 줬거든요. 그게 좀 길쭉한 도토리인데요, 그 한 알을 아끼는 그릇에 놓아두고 언니려니, 언니구나, 보곤 해요.”   -노회찬 의원은 어떻게 만나셨어요.   “아저씨(김민정은 노 의원을 ‘아저씨’라 불렀다)가 <밤이 선생이다> 읽고 제 트위터 쪽지로 ‘잘봤다’는 말을 전해오면서 인연이 시작되었던 것 같아요. 아저씨가 책이 좋아서 사고 보면 다 난다 책이라고, 그러니 제가 얼마나 힘이 났겠어요. 작년 여름에 황현산, 노회찬, 저, 준이(박준 시인) 넷이서 밥을 먹은 적이 있어요. 밥 먹고 나오는데 미치겠는 거예요. 사람이 너무 좋아서, 세상에 이렇게 좋은 사람이 있을 수도 있구나, 막 발을 구르게 되는 거예요. 정말이지 아저씨는 ‘책으로 만들어진 사람’이에요. 신간이 나와 책을 보내드리면 반드시 문자로 리뷰를 보내오곤 했어요. 아저씨 버킷 리스트가 읽은 책에 관한 책을 내는 거였는데 전 ‘정치인 노회찬엔 관심 없고 책 읽는 노회찬에 관심 있다’고 하니, ‘내가 말하는 게 그거다’라 그러시더라고요. 아저씨는 ‘축 회찬의 여덟돌 맞이. 엄마. 1964년 8월31일’이라고 어머니가 당신 생일에 선물로 준 책까지 여태 다 가지고 있었어요. 아저씨가 사건에 휘말렸을 때 말도 걸지 못하겠고 해서 읽으실 책만 잔뜩 보내드렸거든요. 그중 한 권이 베를린을 주제로 한 책이었는데 거기 로자 룩셈부르크에 관한 얘기가 나와요. 아저씨가 이렇게 문자를 보내주었어요. ‘특히 로자 룩셈부르크를 다뤄줘서 고마웠습니다. 1996년 그녀의 주검이 던져진 폭 5m도 안되는 란트베르 운하를 찾고 프리드리히펠데 묘지로 가서 그녀 이름인 장미를 바치고 독일 소주를 바쳤던 일이 생각납니다. 못다 쓴 주제들로 후속편 만들면 바로 사보겠습니다^^’ 그렇게 몰래몰래 책을 준비했는데….”   -책 많이 내셨죠. 어떤 책이 기억에 남나요.   “번뜩 떠오르는 건 <민병헌 사진집: 누드>요. 민병헌 선생님을 인터뷰한 뒤였는데 하루는 저한테 누드를 찍자고 하시더라고요. 전 깜짝 놀라서 ‘내가 그럴 몸이 아니다’라고 손사래 치고 그랬는데, 선생님 누드를 보며 알았죠. 기가 막히게 아름다운 거예요. 누드가 시였던 거예요. 정말 ‘아름답고 쓸모없죠’. 또 하나는 단원고 아이들의 시선으로 쓴 육성 생일시 모음 <엄마, 나야>요. 시인 34명이 단원고 34명 아이의 생일시를 썼어요. 시인들이 많이들 울면서 썼다는데 전 웃으면서 쓴 거 있죠. 그 아이가 제 곁에 와 있는 게 느껴지는 거예요. 잘 지내고 있다는 저만의 안도 같은 게 들어서요. 책 나온 뒤에 아이 어머니가 전화를 주시면서 물어요. ‘선생님, 그런데 우리 아이 잘 있어요?’ 그때 제가 ‘어머니 걱정 마세요. 아주 잘 있어요’ 했어요. 정말 그런 것 같았어요.”   -언제 가장 행복한가요.   “필자의 원고가 도착하면 일단 집의 프린터로 출력해요. 그러고는 목욕물처럼 뜨거운 원고를 들고 욕조에 들어가요. 원고를 한 장 한 장 읽으면서 세숫대야에 옮기거든요. 그러다보면 제목이 오고, 부제가 오고, 표지로 어떤 그림을 할지도 오는 날이 있어요. 그러면 밤 12시고 1시고 저자에게 전화해요. 그게 가장 빠른 속도로 정리된 게 준이 책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이었어요. 욕조 물이 채 식기도 전에 바로 나와 전화했으니까요. 준이가 첫 시집 내고 두번째 시집 내겠다고 시 들고 찾아왔는데 기대한 것보다 별로 안 좋은 거예요. 걱정이 되어 제가 그랬어요. ‘너 망했어, 준아.’ 그래서 첫 시집의 참고서 같은 글을 산문집으로 먼저 털자고 했지요. 15만부 팔렸어요. 저는 제가 아는 사람들이 잘되면 그게 그렇게 좋은 거 있죠.”   백승찬 기자 myungworry@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