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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 돋보기 - 「사랑의 기쁨」과 가정 성화] 「사랑의 기쁨」을 통해 보는 오늘날 가정의 현실 안선희 데레사
「사랑의 기쁨」 제2장 ‘오늘날 가정의 현실’(32-49항)을 보면 가정의 다양한 문제는 국가를 초월하는 어떤 공통분모가 있다. 가정의 문제들은 시간과 공간만 다를 뿐, 그 문제를 일으키는 원인은 세계 어디든 같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공통분모 안에 담긴 그 무언가를 찾고자 먼저 위급한 현실 두 가지를 언급해 본다.
혼인 감소와 출생률 감소
얼마 전 대통령 직속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에서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혼인해야 한다는 인식이 갈수록 낮아지는 추세이다. 혼인의 필요성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도 2016년 51.9%로 2010년 64.7%에 비해 떨어졌다.
특히 미혼 여성들의 혼인에 대한 긍정적인 인식은 매우 저조하다. 분석 결과 미혼 여성 열 명 가운데 세 명 정도가 혼인의 필요성을 긍정적으로 인식했다. 이처럼 혼인에 대한 긍정적인 응답이 낮다는 것은 이혼한 뒤에도 결혼하지 않겠다는 ‘비혼’이 대중화되고 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나타낸다.
한편 통계청 발표에 따르면 2018년 2분기 합계 출생율(가임기 여성 한 명이 평생 낳을 수 있는 자녀의 수)은 0.97명에 그쳤다. 그 수가 두 명 이상이어야 인구가 현상 유지되는데, 2018년도 합계 출생율은 한 명 아래로 떨어질 게 확실시된다고 한다. ‘국제연합인구기금’(UNFPA)에서 발표한 ‘2017년 세계 인구 현황 보고서’에 따르면 전 세계 198개국 가운데 합계 출생율이 한 명 이하인 나라는 없었다. 우리나라가 불명예스러운 기록을 남길 날이 가까이 온 듯하여 씁쓸하다.
합계 출생율이 한 명 이하로 떨어진다는 것은 젊은이들이 출산 기피를 당연시한다는 반증이다. 저출산으로 새 생명의 탄생 소리가 줄어들고, 상대적으로 노인 인구는 늘어나고 있다. 이는 의학 기술 발전의 혜택도 있지만, 저출산으로 인구 연령의 분포가 비정상적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2000년도에 이미 65세 이상이 전체 인구의 7% 이상인 ‘고령화 사회’에 진입했고, 올해는 65세 이상이 전체 인구의 14% 이상인 ‘고령 사회’에 들어섰다. 이 진입 속도는 굉장히 빠르다. 이 속도대로라면 2023년엔 한국의 65세 이상이 전체 인구의 20%를 차지하는 ‘초고령 사회’가 될 것으로 예측된다.
저출산으로 말미암아 소비를 가장 많이 하는 연령대가 급속도로 줄어들면 이른바 ‘인구 절벽’에 다다를 것이다. 출생 인구보다 사망 인구가 더 많은 몇몇 지역은 유령 도시가 될 수도 있다. 그러면 경제 성장은 더욱 어려워질 것이고 개인 생활은 물론 국가도 여러 위기에 처할 것이다. 이것은 먼 미래, 딴 나라 이야기가 아니다. 빠르면 30년, 늦어도 40년 이내의 우리 현실이다.
또 다른 어둠의 현상
혼인 감소와 출생율 감소라는 이 위급한 현실은 ‘동거와 안락사의 합법화’라는 강력한 어둠의 현상을 조장한다. 청년층을 중심으로 혼인은 감소하지만, 비혼과 동거율은 증가하고 있다. 또한 ‘조력 자살’이 전 세계 가정을 심각하게 위협하고 있다. 많은 나라에서 이를 합법화하고 있지만, 교회는 이러한 관행을 강력하게 반대한다(48항 참조).
‘동거의 합법화’는 말 그대로 합법적으로 동거를 인정하는 것이다(53항 참조). 이 단어는 1999년 프랑스에서 도입한 시민 연대 계약인 ‘팍스’(PACS, Pacte civil de solidarite)에서 비롯한다. 팍스 계약은 혼인과 비슷한 공동생활 형태로 동성을 포함하여 성인 두 사람을 결합하는 제도이다.
팍스 계약서를 관할 법원에 제출한 두 사람은 혼인에 준하는 공식적인 동거 짝이 되고, 그들의 자녀 또한 사회적 보장 제도의 혜택을 받아 양육할 수 있게 된다. 새로운 방식의 이 팍스 계약은 혼인 계약과는 다르게 친족 관계도 발생시키지 않으며 계약을 파기할 시에는 간편하게 재산 분할만 하면 된다.
이처럼 혼인의 본질에서 가정 경제와 자녀 보호를 부각한 팍스 계약 방식을 선호하는 국가가 늘고 있다. 하지만 과연 혼인의 본질이 가정의 경제 유지와 자녀 보호에만 국한할까?
독일은 2001년 ‘생활동반자법’으로 동거를 법제화했다. 또한 일본에서는 2015년에 도입한 ‘동반 관계 증명 제도’가 일본 전역으로 확산되고 있는데, 이는 중앙 법원이 아닌 지방 자치 단체의 조례를 통해 이뤄졌다. 우리나라에서도 ‘생활동반자법’을 추진하려는 움직임이 있다. 2014년부터 논의되기 시작해 지금은 본격적으로 여성가족부를 중심으로 추진 중이다.
혼인하지 않고, 생명을 선택하지 않으려는 이러한 움직임이 유행하는 오늘날, 이것을 따르지 않으면 시대 흐름에 한참 떨어진 사람처럼 취급하는 사회가 우리에게 어떤 행복을 줄 수 있을까? 우리 그리스도인은 이러한 시류의 옳고 그름을 올바르게 식별하고 있는지 반추해 본다.
가정 문제의 공통분모
이렇게 꼬리를 물며 확장해 가는 가정과 관련한 문제들의 공통분모는 무엇일까? 전 세계 어디든 가정과 관련한 여러 문제의 공통 원인 가운데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바로 ‘왜곡된 자유’와 ‘잘못 이해된 정의’에서 비롯된다. 이로 말미암은 지나친 개인주의는 가정의 유대를 왜곡시켜 결국 가족 구성원을 고립된 개체로 만들어 버린다.
소유와 쾌락에 사로잡힌 개인주의와 올바른 길을 벗어난 개성주의는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성할 때나 아플 때나 일생을 함께하겠다.”는 혼인 서약을 위협한다(33항 참조). 이러한 위협은 가정을 잠시 머무는 장소로 전략시켜 버린다. 자신에게 유익할 때, 또는 자기의 권리를 주장할 수 있을 때만 가정이고, 계산적인 관계가 끝나면 가족의 결속도 불확실해진다.
노선을 잃은 개인주의와 개성주의에 젖은 이들이 자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혼동하는 듯하다. “나 말고는 나를 이끌어 주는 그 어떤 진리와 가치와 원칙은 없다. 또한 모든 것은 내 마음대로 판단할 수 있다.” 이들은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타인을 이용하고 조종하며 더 이상 필요하지 않으면 이내 내쳐 버린다.
그렇기에 자신을 기꺼이 내주는 혼인의 삶은 한 개인의 상황과 기분에 따라 쉽게 흔들린다. 또 혼인의 위기가 오면 서로 인내하고 깊이 용서하며, 화해하고 희생하려는 노력 없이 성급하게 마무리하려 한다(41항 참조). 결국 이들은 함께 늙어 가며 서로를 돌보고 서로에게 힘이 되어 주는 혼인의 이상을 거부한다(39항 참조).
‘참된 자유’는 개인의 기분과 상황에 따라 쉽게 결정되는 것이 아닌 이성과 의지를 바탕으로 숙고를 통해 행하는 능력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능력이라 함은 어떤 일을 해낼 수 있는 힘으로, 이 힘은 꾸준한 개인적 수양을 통해 키워야 하는 것이다. 또한 이 자유는 인간 행위의 고유한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인간은 선을 행하면 행할수록 더욱 자유로워지며 선과 정의를 위해 봉사할 때에만 참된 자유를 얻는다. 그래서 자유로운 사람은 늘 선을 행하는 사람이다. 그 반면 선을 행하는 것이 아닌, 자신의 쾌락과 소유 욕망에 사로잡힌 이들은 텅 빈 자유를 외치기에, 결국 늘 회피하고 도망을 다니는 삶을 살아갈 뿐이다.
혼인과 가정의 왜곡된 정의
정의는 매우 가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정의를 잘못 이해하면 어떻게 될까? 오로지 대접받는 데에만 관심 있는 사람이 된다(33항 참조). 정의가 존재하는 이유는 자기 자신의 안녕을 위한 것이라 생각한다. 또한 타인의 아픔 따위에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교회가 말하는 참된 정의는 하느님께 드릴 것을 드리고(경신덕), 이웃에게 주어야 할 것을 주려는 지속적이고 확고한 의지라 할 수 있다. 사람을 향한 정의는 각자의 권리를 존중하고, 공평과 공동선을 촉진시키는 조화를 인간관계 안에서 확립하는 것이다(가톨릭교회 교리서, 1807항 참조). 이러한 의미에서 자유의 권리를 외치며 힘없는 이들의 생존권을 앗아 가는 행위는 왜곡된 정의의 대표적인 예이다.
오늘날의 문화는 젊은이들과 혼인한 이들에게서조차 가정을 꾸리는 것을 단념하게 만든다. 그 이유로 증가하는 실업률과 주택 문제, 또는 어렵게 잡은 일자리이지만 아기를 낳으면 받게 되는 불이익 등을 들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이 혼인과 가정과 생명을 선택하지 않게 하는 이유의 전부는 아닐 것이다.
또 다른 이유로는 “혼인과 가정의 가치를 낮게 평가하는 관념의 영향, 다른 부부의 실패를 보며 그 실패를 피하려는 바람, … 단순히 동거하는 것만으로도 얻어지는 사회적 기회와 경제적 이익, 사랑에 대한 순전히 감상적이고 낭만적인 사랑에 대한 개념, 자신의 자유와 독립을 포기해야 하는 두려움”(40항)등이 있다.
그렇다고 선이 결핍된 사회적 시류를 따르고자 혼인을 옹호하는 일을 멈출 수는 없을 것이다. 이 일을 멈춘다면 우리가 세상에 줘야 하는 가치관을 제시하지 않는 것이다. 이제는 권위와 규범을 강요하는 것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음을 깨달아야 한다. 그동안 마음에 와닿는 적절한 언어와 현실적인 제안으로 혼인과 가정을 포기해야 하는 현실에 놓인 젊은이와 기성 부부들을 위로하고 격려해 왔는지에 대한 교회의 자기반성이 필요하다(36항 참조).
젊은이들과 기성 부부들에게 혼인과 가정을 선택해야 하는 이유와 동기를 제시하는데 커다란 책임을 느껴야 하고, 마음을 다해 노력해야 한다. 젊은이들에게 단순히 교리적이고 생명 윤리적이며 도덕적인 주제들을 강조하는 것은 혼인에 대한 거부감을 더욱 초래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먼저 그들이 은총에 기꺼이 응답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35항 참조).
사랑이신 하느님
하느님의 계획 안에 있는 남자와 여자의 사랑을 젊은이들과 기성 부부들에게 전하는 것은 시대에 뒤떨어진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변치 않는 진리를 선포하는 것이며, 이 진리를 선포하는 데 무엇보다 “선교적 창의성”(57항)이 필요하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스위스의 신학자 칼 바르트(Karl Barth)는 이렇게 말했다. “그리스도인들은 한 손에는 성경을, 한 손에는 신문을 들고 살아야 합니다.” 이 말의 의미는 하느님의 뜻을 분명히 알고 세상의 현실을 제대로 알아 그분의 뜻을 올바르게 전하라는 것이다.
혼인과 가정에 대한 사목은 시대의 흐름을 빠르게 파악하고, 사목 현장에서 그들의 눈높이에 맞춰 혼인과 가정 사목의 핵심인 ‘사랑’을 지혜롭게 전하는 것이다. 남자와 여자는 혼인을 통해 서로를 하느님께서 주신 선물로 받아들이고 사랑을 키우며 때때로 찾아오는 갈등도 지혜와 인내로 극복해야 한다. 또한 교회는 시대가 요청하는 ‘선교적 창의성’으로 사랑의 열매인 자녀를 기쁘게 맞이하며 양육하도록 선포해야 한다.
혼인으로 맺어진 가정의 힘은 경제적 능력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서로 사랑하는 능력에서 나오는 것임을 잊지 말자. 가정의 힘은 사랑이다. 그리고 그 사랑은 바로 하느님이시다.
* 안선희 데레사 - 대전교구 가정사목부 연구원으로 한국천주교주교회의 가정과생명위원회 위원이다. 교황청립 요한 바오로 2세 혼인과 가정 신학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경향잡지, 2018년 12월호]
[경향 돋보기 - 「사랑의 기쁨」과 가정 성화] 혼인 유대 사목의 관점으로 본 「사랑의 기쁨」 제8장 김상용 요셉 신부
저자의 의도와 가르침에 대한 해석
프랑스의 일간지 ‘르 피가로’의 장 마리 게누아 기자가 프란치스코 교황의 세계주교대의원회의 후속 교황 권고 「사랑의 기쁨」 305항의 각주(351)에 대해 프란치스코 교황에게 물었다(2016년 4월 16일). “왜 그렇게 중요한 사항을 각주로 처리하셨습니까?” 이에 대해 교황은 “그 각주가 기억나지 않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이 각주는 이혼한 뒤 재혼한 이들에게 영성체를 허용하는 결단을 교황이 내렸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제시하는 근거이기도 하다. 저자인 교황 자신이 명확히 기억하지 못하는 이 사항을 두고, 요즘도 한쪽에서는 교황을 ‘혁명가’ 또는 ‘이단아’로 규정하면서 신학과 사목을 정치화하고 있는 행태는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다.
「사랑의 기쁨」은 가정을 ‘문제’가 아니라 ‘기회’(7항)로 본 프란치스코 교황이 촉구하는 ‘사목 쇄신’이다. 이는 교황 권고 「복음의 기쁨」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사랑의 기쁨’은 “더디지만 분명하게, 드러나지는 않지만 확고한 신념으로서, 극심한 비탄 속에서도 서서히 되살아나도록 해야 하는”(「복음의 기쁨」, 6항) ‘신앙의 기쁨’과 연계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기쁨을 먼저 받아들여 열성으로 빛나는 삶을 살려는 복음의 봉사자”(「복음의 기쁨」, 10항), 곧 복음화의 주체로 가정을 교육하고 양성하는 사목의 전환이 절실해진다.
교황의 이 같은 사목 전망은 「사랑의 기쁨」의 전체적 맥락뿐 아니라, 2014년과 2015년에 개최된 세계주교대의원회의의 경과 전반, 가톨릭교회 전통의 연속성을 고려할 때 더욱 뚜렷해진다. 그러므로 나약하고 불완전한 가정에 대한 ‘동반·식별·통합’을 다루는 「사랑의 기쁨」의 제8장 또한 교황의 이러한 복음화 관점에서 이해하고 해석해야 한다.
혼인 유대 사목
모든 사람은 출생 때부터 혼인을 준비한다. 이는 혼인이 긴 시간을 요구하는 일종의 ‘여정’임을 시사한다. 하지만 혼인 자체가 이 여정의 목적지는 아니다. 혼인은 우리를 당신께로 이끄시는 하느님 아버지께서 부르시는 하나의 방식, 곧 성소이다(「사랑의 기쁨」, 211항 참조). 혼인이 하느님의 위대한 계획에 참여하는 길이요 완덕과 성화를 실현해 가는 방편이라는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혼인과 가정을 ‘위한’, 그리고 혼인과 가정에 ‘의한’ 감정과 본능 교육(148항), 사랑 교육(211항)을 통해 ‘점진적으로’ 덕을 길러 감으로써 인간의 내적 변화를 도모하는 사목이 요청된다.
이에 교황은 서로를 더욱 깊이 사랑하고 문제점과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도록 돕는 ‘혼인 유대 사목’을 특별히 제시한다(211항). 이와 같은 맥락에서, 덕행의 삶을 통한 자유의 형성과 강화(267항), 자기 증여적 사랑을 성장시키는 정숙과 정결의 덕을 강조한다(206, 282항). 혼인 생활에 실패한 이들에 대한 사목보다 혼인을 강화하여 그 파경을 막는 사목적 노력이 더 중요하다고(307항) 역설하는 이유도 이런 전망 안에 있다.
이 사목은 혼인한 이들을 ‘한 몸’으로 보고 그들의 ‘유대’를 보존하며 성장시키는 데에 집중한다. 위기와 도전을 통하여 그 유대라는 포도주가 더욱 맛있게 숙성(성숙)된다고 본다.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구체적인 삶을 기반으로 삼는 유대를 낳는 혼인 합의의 말이 현재에 국한되지 않고 앞날을 포함한 전체성, 곧 “죽음이 두 사람을 갈라놓을 때까지”를 의미한다는(214항)사실에 주목한다. 그래서 ‘어떠한 경우든 화해가 가능하다’는 희망의 인식으로 혼인 관계가 깨진 이들에게 다가간다(116-117, 238항).
혼인 유대는 혼인성사 때에 부어지는 하느님의 은총의 힘으로 꾸준히 성장되고 굳건해진다(134항). 혼인의 불가 해소성은 가톨릭 신자가 특별히 부담해야 하는 ‘멍에’ 같은 법이 결코 아니다. 성사를 통해 받게 되는 실제적 ‘은총’이다(62항). 길을 보여 주시는 하느님께서 은총의 힘으로 실천할 수 있도록 예외 없이 모든 이에게 주시는 선물이다(295항).
성소로서의 혼인은 하느님의 은총을 통해 항구히 보전되며 성장한다. 유대가 어려운 상황에 부닥치거나 상처를 입게 된 경우에 이 은총은 혼인한 이들이 회개하고 그 유대를 회복할 수 있는 실제적인 빛과 힘을 제공해 준다.
혼인 유대 사목은 긴 시간의 동반을 통해 점진적으로 진행한다
‘비정상적인’ 상황에 있는 신자들, 곧 동거나 사회혼만 한 신자들, 이혼한 뒤 재혼한 신자들에 대한 혼인 유대 사목은 은총을 원리로 하고 회개를 내용으로 삼아 성화를 목표로 한다. 긴 시간에 걸친 동반을 통해 꾸준하고도 점진적으로 진행된다. 교회의 가르침이나 교회법 규정에 대한 예외를 인정하거나 변경함으로써 비정상적인 관계를 유효하거나 적법한 혼인 유대로 인정하는 데에 사목적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다. 문제의 외적 해결이 아니라 사람의 내적 성화를 사목의 목적으로 삼기 때문이다.
이 같은 사목에서는 무엇보다 한 인간이 태어나고 성장해 가는 가정 공동체가 그 주역을 담당한다(200항). 사목자의 개별적 돌봄뿐 아니라 성숙한 부부들로 구성된 다른 가정들의 동반이 필요하다(223, 230항). 이들을 체계적으로 조직하고 전문적으로 교육하는 상설 기구를 본당이나 교구 단위로 설치하여 상처에 대한 응급 처치뿐 아니라 악성 질병을 전면 퇴치해 가는 복음화의 기지로써 운용해야 한다(229항).
청년 사목과 연계하여 정서적·성적으로 성숙한 젊은이들을 양성하고, 신혼부부들을 적극적으로 동반함으로써 그들의 사랑이 그리스도교적으로 더 성숙하도록 돕고자 가정 사목의 외연을 확대하고 심화할 대책을 세워야 한다.
이민 가정, 혼종혼, 한 부모 가정, 낙태한 부부, 이혼한 뒤 재혼하지 않은 이들에 대한 사목 또한 이 같은 전망 안에서 수행한다. 그리하여 ‘복음의 진리와 사랑의 요구’에 충실한 사목을 발전시킨다(300항).
통합, 자신이 맺은 성사적 유대를 충실히 살아가는 것
혼인 유대 사목에서 동반의 목적은 통합이다. 통합이란, 혼인한 이들이 자신의 삶 속에 하느님의 계획을 완수하도록 성장시키는 것, 곧 자신이 맺었던 성사적 유대를 성령의 힘으로써 충실히 보존하며 살아가는 것을 뜻한다(297항). 복음에 따라 살려고 이혼한 뒤에도 재혼하지 않은 이들은 혼인의 신의를 증언하는 이들로서 주목받는다. 따라서 이들을 방치하지 않고 성체성사로 삶의 형태를 지탱해 주는 양식을 찾도록 격려하면서, 자신이 겪은 불의를 용서할 수 있도록 ‘화해와 중재를 위한 사목’을 시행한다(242항).
이 점은 이혼한 뒤 재혼한 이들에 대한 사목에서도 중요하다. 이들은 세례를 받은 형제자매로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 여전히 속해 있다. 사실, 이들은 세례를 받은 이들로서 교회의 각종 전례와 애덕 활동에 참여하고 신앙으로 자녀들을 교육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복음화 사명을 다른 이들과 공유한다(299항).
그렇지만, 이들이 이전 배우자와 유효한 혼인 유대를 맺고 있으면 서도 다른 이와 결합하여 살고 있다는 데에 주목해야 한다. 재혼이라는 새로운 관계를 고수하는 객관적 상태야말로 그리스도와 교회의 항구한 일치를 드러내 보여 주는 성체성사로 가는 길을 가로막는 주범이다. 그런데도 영성체를 ‘권리로써’ 요구하거나, 규정을 변경함으로써 성사의 영역에 속하는 것을 허용하거나 인용받을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은 신앙과 은총의 논리에 절대적으로 모순된다.
이에 따라 권고 또한 “사제가 쉽게 ‘예외’를 허용할 수 있다고 생각하거나, 어떤 이들이 자신이 교회에 좋은 일을 하였다는 것을 빌미로 성사적 특전을 받을 수 있다.”(300항)고 여기는 태도를 경계한다.
교회가 모든 이를 예외 없이 영성체로 늘 초대한다는 사실은 ‘사목적 자비’를 구체적으로 실천해야 할 이유와 동기가 된다. 자비는 고통에 대해 함께 아파하는 연민, 또는 잘못을 덮거나 견디어 주는 관용에 머물지 않는다. 악을 정화하고 사람을 변화시킨다. 정의와 진리를 배척하지 않는다(311항). 따라서 이혼한 뒤 재혼한 이들에 대한 사목적 자비는 그들 스스로가 자신이 속해 있는 유효한 유대로 회개하도록 이끌어 주는 데에 존재한다. 영성체를 하도록 내버려 두거나 허용해 주는 데에 있지 않다는 점이다.
영성체를 할 수 없다는 사실로 말미암아 그들이 상처받지 않게 돌보는 데에서 자비는 시작된다. 배령할 수 없는 성체 앞에서 자신의 악한 객관적 상황을 직시하고 자신이 걸어가야 할 길이 얼마나 남아 있는지에 대한 식별을 통해 그들을 변함없이 끌어당기는 하느님에 대한 회개의 여정에 박차를 가하도록 인도하는 방식으로 ‘성사적 도움’(각주 351)을 베풀어야 한다. 이런 뜻에서 성체는 이들에게도 약이요 음식이 된다.
교회와 함께 느끼고 알아가는 것, 식별
다양한 상황은 그 각각에 상응하는 서로 다른 처방을 요청한다. 자신의 처지를 고려하여 목적지를 두고 어느 길이 가장 적합한지를 알아보는 데에 식별은 필요하다. ‘성화’라는 목적지는 변할 수 없다. 하지만 자신의 상황을 살피지 않고 다른 이들처럼 교회 생활을 하려는 것은 지혜로운 일이 아니다. 자신에게 이롭지도 않다. 그래서 식별이 중요하다.
식별은 자기 자신과 하느님의 관계가 어떠한지 ‘홀로’ 판단함으로써 이루어지지 않는다. 서로 인격적 관계를 전제로 하는 공동체적 활동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냐시오 성인은 ‘교회와 더불어 생각한다.’(Sentire cum Ecclesia)라고 말한다.
이혼 뒤 재혼한 이들에 대한 식별은 그들이 은총 상태에 있는지, 또는 유효한 혼인 유대가 객관적으로 존재함에도 두 번째 결합을 인정할만한 주관적인 요인이 있는지를 따져 묻는 데에 있지 않다.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마르 10,9)라고 복음이 요구하는 바에 대한 예외를 찾는 데에 식별은 기여하지 않는 것이다(300항). ‘복음의 진리와 사랑의 요구’ 안에서 행하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하느님 앞에서 자신의 상황을 자세히 살펴봄으로써(300항), 자신의 처지가 지닌 객관적인 한계(재혼)에도 하느님께 응답하며 성장해 갈 방법을 찾아가는(305항) 과정이 바로 식별이다. 그리하여 첫 번째 배우자와의 화해 가능성, 두 번째 결합의 포기 가능성, 금욕의 가능성 등을 따져 물음으로써 사목적 동반에서 통합에 이르는 과정에서 채택할 수 있는 가장 적절한 방식을 발견해 내는 것이다.
「사랑의 기쁨」의 새로움
이혼한 뒤 재혼한 이들의 영성체 인용으로 이들에 대한 사목을 환원시키는 시각이나 혼인 무효를 폭넓고도 쉽게 ‘허락’해야 한다는 관점은 근본적으로 사람의 변화 가능성에 대한 비관주의를 기초로 하는 법률 중심주의적 사고로부터 기인한다. 그러나 사랑은 모든 것을 희망한다(1코린 13,7 참조). 사람이 “변하여 성숙해지고 놀라운 아름다움을 발산하며 몰랐던 능력을 보여 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한다(116항).
교황의 권고가 선사해 주는 새로움은 이처럼 사랑에 따른 인간의 변화 가능성에 대한 믿음을 토대로 동반·식별·통합이라는 구체적인 과정으로 구성된 혼인 유대 사목을 제시하는 방식으로써 오늘날 혼인 위기의 상황 너머로 ‘가정에 관한 그리스도교의 기쁜 소식’(1항)을 선포하는 데에서 찾을 수 있다.
* 김상용 요셉 - 전주교구 신부. 광주가톨릭대학교 교수로 윤리신학을 가르친다. 교황청립 우르바노 대학교에서 교회법 석사학위, 교황청립 요한 바오로 2세 혼인과 가정 신학대학에서 윤리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경향잡지, 2018년 12월호]
[경향 돋보기 - 「사랑의 기쁨」과 가정 성화] 사랑의 혁명 강영목 요한 보스코 신부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가정과 관련한 당신의 기억 하나를 말씀하셨다. “저는 형제가 다섯이었는데, 누가 더 좋은지 묻자 엄마가 대답하셨습니다. ‘나에게는 다섯 손가락과 같은 자녀들이 있단다. 하나를 때려도 아프고, 다른 손가락을 때려도 모두 다 아프다.’ 가정이 바로 이와 같습니다! 자녀들은 다 다르지만 모두가 같은 자녀들입니다”(2015년 2월 11일 일반 알현 중에).
교구에서 가정 사목을 맡고 있던 시절, 어떤 자매가 나에게 말했다. “신부님,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없습니다. 십자가 없는 가정이 어디 있겠습니까?”
사랑은 기쁨이자 십자가이며 이로 말미암은 아픔이기도 하다. 결국 이 모든 것을 넘어 십자가 뒤에 예수님의 부활이 우리에게 보여 주신 것이 참된 희망과 하느님의 무한하신 사랑인 것처럼, 사랑은 결국 참된 기쁨이다. 그러기에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교황 권고 「사랑의 기쁨」을 시작하며 가정의 기쁨이 곧 교회의 기쁨이 된다고 하신 것이다(1항 참조).
오늘날은 시대가 변하고 기술이 나날이 발전하며 모든 것이 지난날에 비해 더할 나위 없이 편리한 세상이 되고 있다. 이는 더 이상 인간이 많은 일을 하지 않아도 될 또 다른 혁명과도 같은 일, 곧 4차 산업 혁명의 시대가 도래할 것이라고 사람들은 말한다.
그 반면, 인간의 편리가 더욱 좋아질수록 인간 사이의 만남과 관계가 더욱 요원해지는 현실을 우리는 이미 맞이하였다. 오늘날 한국 사회의 가정에 대한 이야기는 긍정적인 것보다 무척 부담스럽고 힘든 현실이라 느껴진다. 혼자 사는 1인 가구의 증가, 고령화 되는 가정, 불안정한 가정, 대화 없는 가정 등이 늘고 있다. 어쩌면 더욱 심화되고 있는 과정인지도 모른다.
또한 변화하는 시대에 대한 기대감과 동시에 나 아닌 다른 누군가의 존재에 대한 무관심과, 쉽게 무언가를 행하기보다 이내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더 큰 현실 속에 살아가는지도 모른다. 이 가운데 우리의 가정은, 우리의 교회는 어떻게 기쁠 수 있을까? 교황님은 왜 기쁨을 계속 이야기하실까?
변하지 않는 가정의 기쁨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물으면 대부분은 가족과 건강이 먼저라고 대답하곤 한다. 나 자신의 행복한 삶과 함께 가족은 언제나 변하지 않는 사랑의 원천이며 기쁨이자 때론 십자가이기도 하다. 사랑으로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만나 가정을 이루고, 사랑의 선물인 자녀를 다시 사랑으로 돌보게 된다. 이러한 가정의 근본적인 구조는 예나 지금이나 변화될 수 없는 것이다. 곧, 늘 사랑의 기쁨으로 살아가는 가장 작은 공동체가 바로 가정이어야 한다.
지난여름 세계 가정 대회가 열린 아일랜드 더블린을 방문하신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지속적인 것이 없어져 가는 문화 안에서 이미 익숙해져 가는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사랑 안에는 일시적인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변하지 않는 지속적인 사랑을 무엇보다 가정 안에서 깨닫고 배운다. 여든이 넘은 어머니가 지긋한 나이의 자식을 보고도 늘 어린아이 때의 기억을 떠올리는 것은 자식에 대한 변치 않는 사랑 덕분이다. 그러기에 교황님은 지난 세계 가정 대회에서 “결혼은 단순한 하나의 제도가 아니라 앞으로 나아가는 삶으로써의 소명”이라고 말씀하셨다. 이 안에는 가장 본질적인 사랑이 담겨 있다.
이러한 시각에서 가정에 관한 교황 권고 「사랑의 기쁨」은 단순한 교리 해석이나 교회적 가르침의 이론이 아니다. 지속적인 모든 것이 메말라 가고 더 복잡한 현대 사회의 각 가정에 사랑의 기쁨을 다시 일깨우고 희망을 불러일으키는 현대 가정의 안내서이다. 이를 통해 교황님이 가정과 관련하여 말씀하시는 핵심 내용은 가정의 본 가치를 되찾게 하시려는 데에 집중된다. 그 본 가치는 가정이 사랑의 공동체라는 것으로, 당연하면서도 간과하기 쉬운 표현이기도 하다.
가장 작은 교회인 가정
교구 가정 사목을 맡던 시절, 가정의 본 가치는 사랑의 공동체라는 것을 많은 가정이 이미 알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만 녹록지 않은 현실을 마주하며, 또한 교황님이 말씀하신 것 가운데 많은 것이 임시적이고 빠르게 변하는 데에 우리 스스로의 의식들이 습관화되다 보니, 사랑이 없이 대했던 것이다. 가족에 대한 사랑도 내 기준과 내 방식으로, 기다려주지 못하는 마음으로 대했던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교황님의 권고 「사랑의 기쁨」은 그 서두에서 우리에게 다른 시각으로 바라볼 것을 이야기한다. “가정은 문제가 아니라 무엇보다 기회입니다”(7항).
새로운 한 가정은 참된 사랑을 실천하는 가장 작은 교회의 시작이다. 가정의 본 가치를 계속해서 되돌리려는 노력의 공간으로 가정을 바라볼 수 있다면, 수없이 우리에게 다가오는 크고 작은 가정의 일이 문제가 아니라, 기회가 될 수 있다. 이 기회란 한 번 더 사랑할 수 있는 기회이다. 교황님은 세계 가정 대회에서 “사랑이 사랑으로 커 나가지 못한다면 오래가지 못한다.”라고 말씀하셨다.
교황님의 말씀대로 사랑은 임시방편이나 통과 의례가 아니다. 사랑은 계속되는 것이기에 변할 수 없다. 가정에서의 사랑과 희망이 우리를 계속해서 성장시키는 원동력임을 잊지 않고 한 번 더 실천하는 것이 더욱 절실한 지금의 가정의 모습이며 교회가 지지해야 할 참역할이다.
시간에 집중하는 가정 사목을
1인 가구를 위한 음식이 가게에 늘어나고, ‘혼밥’이나 ‘혼술’이라는 말이 어느덧 익숙하게 들려온다. 실제로 우리나라 1인 가구의 비율은 30%에 육박한다. 이는 고령화 사회와 비혼 인구의 증가, 그로 말미암은 저출산 사회가 뉴스에 자주 등장하는 한국 사회의 현 모습을 그대로 드러낸다.
이러한 상황 속에 앞으로의 가정에 대한 사목은 어떻게 이루어져야 할까? 무엇보다도 가정 사목으로 영역을 정해 놓은 표현부터 바꾸어야 하겠다.
우리는 이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부터 가정의 일원이고 이 연결은 계속된다. 가정 사목을 단순히 일반적인 부모와 자녀로 이루어진 가정에만 집중하는 사목으로 한정할 수 없기에 사목은 모두가 가정 사목에서 출발한다고 말할 수 있다. 기존의 가정 사목에 대한 인식의 전환과 함께 모든 역량을 가정이라는 전체적인 맥락에서의 통합적 사목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하느님 나라의 구원을 위한 교회의 모든 활동’이라 정의되는 사목은 이제 ‘공간’이 아니라 ‘시간’에 집중할 수 있는 사목이어야 한다(「복음의 기쁨」, 222항; 「사랑의 기쁨」, 3항 참조).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두 교황 권고에서 “시간이 공간보다 위대하다.”라고 언급하셨다. 이는 눈앞의 즉각적인 결과가 아닌, 시간이 걸리더라도 확실하게 일을 하도록 도와주는 원칙이다(「복음의 기쁨」, 223항 참조).
이러한 맥락에서 가정 사목 또한 공간이 아닌 시간에 집중할 수 있는 사목으로 나아가야 한다. 다시 말해, 한정된 공간 안에서만 기다리는 수동적 태도가 아니라, 먼저 다가갈 수 있는 적극적인 시간의 공유가 이루어지도록 노력해야 한다.
교황님이 진단하시는 ‘임시적인 문화’가 팽배한 이 세상에서 우리는 당장의 결과에 더욱 집착하게 된다. 기회가 아닌 문제로 받아들이기에 당장 문제의 정답을 원하는 것이다. 가정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서로 어떤 결과를 바라기 때문에, 그러한 만족감이 채워지지 않으면 이내 불화가 생기고 갈등이 조성된다.
‘임시적인 문화’가 만연한 오늘날, 우리 의식 속에서 당장의 성과를 바라는 조바심과 금방 싫증 나 버리는 의식이 인간관계에 미치는 현상들을 보게 된다. 심지어 인내와 기다림보다 무관심과 나만의 행복에 몰두한 나머지, 소통 없는 가정이 많다는 것은 총체적인 가정의 위기이다.
부모와 아동이 하루에 함께하는 시간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은 평균 2시간 30분 정도인 반면에, 한국은 48분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 이러한 연구 자료에서 알 수 있듯 한국 가정은 가족 간 사랑의 소통과 연결점의 기능이 약화된 것이다.
이러한 단절된 문화를 가정 안에서부터 개선하고 새롭게 시작해 나가도록 힘을 불어 넣는 것이 가정 사목이 해 나가야 할 방향이다. 교황님이 ‘가정’에 대한 가르침을 계속 강조하시는 것은 사랑이 삶의 원천이자 보금자리가 되는 가정에서부터 변화를 만들어 가야 한다고 알려 주시는 것이다.
개별 가정의 특수성을 고려하여
교황님은 우리의 신앙을 전수하는 것도 바로 가정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계속해서 강조하신다. “신앙을 전하기 위한 처음이자 가장 중요한 장소는 가정입니다”(2018년 아일랜드 세계 가정 대회에서).
교황님은 신앙 교육을 위한 교리 교육 프로그램을 학교와 본당에서 준비하고 실행하는 것이 기본이며 중요하지만, 가정이 최우선의 공간이라 이야기하셨다. 이는 가정 사목의 방향에 있어서도 기존의 교회 차원의 프로그램에 집중하기보다, 각 가정이 자체적으로 신앙을 전수하고자 노력을 기울이도록 지원하고 배려하는 데에 힘을 기울이라는 것이다.
이는 오늘날 이야기되는 이른바 ‘다운사이징’(downsizing)이라는 경제 용어를 교회적으로 재해석한 것이다. ‘다운사이징’이란 소형화를 의미하는데, 작게 만들고 효율은 더 좋게 함을 의미한다. 1인 가구가 늘어나고, 사회의 개인적 취향과 기호가 더 선호되는 풍조에서 개별 가정의 특수성을 고려하지 않은 채 성가정의 모습만 강조하는 가정 사목은 실효성이 없을 수밖에 없다. 이에 한 가정, 한 사람에게 세밀히 다가갈 수 있는 사목자의 열정과 노력이 더 필요한 시대이다.
또한 부모와 자녀, 부부간의 개별적 소통과 나눔의 시간을 만들어 가는 문화를 그리스도인 가정에서부터 계속 연습해야 한다. 자기 아이는 자신이 가장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정작 모르고 있었다며 놀라는 부모의 모습을 여러 차례 보았다. 결국 가정의 본 모습을 회복하고자 꾸준히 노력하며, 시행착오를 거치더라도 인내롭게 기다려 주어야 한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지난 8월 세계 가정 대회에 모인 많은 가정 앞에, 세상에 ‘사랑의 혁명’이 필요하다고 하시면서 다음과 같이 당부하셨다.
“이기주의와 개인적 관심사라는 돌풍이 몰아치는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은 사랑의 혁명이 필요합니다!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에서 시작하는 사랑의 혁명 말입니다!”
바로 우리 가정 안에서부터 감춰진 채 잊고 있었던 사랑의 기쁨을 다시 발견하고 확인하는 노력을 당장 시작하는 것에서부터 새로운 사랑의 혁명이 시작될 수 있다. 아무리 어렵고 힘든 전혀 다른 변화의 시대라 하더라도 말이다.
* 강영목 요한 보스코 - 대구대교구 신부, 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에서 사목신학을 가르치고 있다. 교황청립 라테라노 대학교에서 사목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지난해까지 교구 사목국에서 가정 사목을 담당했다.
[경향잡지, 2018년 12월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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