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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근대)

설정식 시인 / 해바라기 쓴 술을 빚어 놓고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12. 11.

설정식 시인 / 해바라기 쓴 술을 빚어 놓고

 

 

두고 두고 노래하고

또 슬퍼하여야 될 팔월(八月)이 왔소

 

꽃다발을 엮어

아름다운 첫 기억을 따로 모시리까

술을 빚어 놓고 다시

몸부림을 치리까

 

그러나 아름다운 팔월(八月)은 솟으라

도로 찾은 깃은 날으라 그러나

 

아하

숲에 나무는 잘리우고

마른 산(山)이오 눈보라 섣달

사월(四月) 첫 소나기도 지나갔건마는

어데 가서 씨앗을 담아다

푸른 숲을 일굴 것이오

 

아름다운 팔월(八月) 태양(太陽)이

한 번 솟아 넓적한 민족(民族)의 가슴 우에

 

둥글게 타는 기록을 찍었소

그는 해바라기

해바라기는 목마른 사람들의 꽃이오

그는 불사조

괴로움밖에 모르는 인민의 꽃이오

 

오래오래 견디고

또 기다려야 될 새로운 팔월(八月)이 왔소

 

해바라기 꽃다발을 엮어

이제로부터 싸우러 가는

인민십자군(人民十字軍)의 머리에 얹으리다

 

해바라기 쓴 술을 빚어 놓고

그대들 목을 축이러 올 때까지 기다리리다

 

팔월(八月)은 가라앉으라

도로 찾은 깃을 접고 바람을 품으라

붉은 산(山) 황토벌도

역사의 나래 밑에 그늘진 자유

방자 엄돋는 인민의 꽃 해바라기에 물을 기르라

 

자유가 두려운 자

아름다운 사상과 때에 반역하는 무리만이

이기지 못하는 무거운 역사의 그림자

 

팔월(八月)은 영화(榮華)로운 팔월(八月)의 그림자를 믿으라

죽임을 모르는 인민들은

죽임을 모르는 팔월(八月)의 꽃

해바라기에 물을 기르라

 

종(鐘), 백양사, 1947

 

 


 

 

설정식 시인 / 헌사(獻詞)

부제: 미소공동위원회(美蘇共同委員會)에 드리는

 

 

화강석

천년 낡은 뜻은

산을 떠나

불기둥 됨이라

메어다 쌓아 올린 성채(城砦)

굽은 어깨로 늙은

인민의 땀은 숭늉이러니까

해에 저린

고마움이어

오장(五臟)에 배이도록

천년을 가는 것을

 

천년을 가는 것은

청동(靑銅)만이오니까

꽃을 날리고

가시 돋음은

뿌리를 지킴이라

미음 같은 땀을 삼키며

굵은 뿌리로 헤아리는

조국의 흙이어

네 바람 속에

안식을 나르게 할

나래 돋치려

천년을 묵은 인민의 어깨라

 

이제 때 정(正)히 왔음은

보람 헛되지 않음이니

역사가 스스로 구을리고 또

떨어뜨리는 과실이라

새삼스러이

혈서(血書)를 써서 무삼하리오

산을 떠나 불기둥 되어

일어선 우람한

성채(城砦)는 바위라 그는 곧

인민공화국주권(人民共和國主權)이니

 

요마(妖魔) 물러섬을 이름이오

방위(方位)

바로잡힘을 고(告)함이라

내 다시

경건하게 이르거니와

팽배한 세계의 조수(潮水)여

쓸리고 또 밀리는

민주주의(民主主義)의 흐름이어

네 바람 속에

깃들인 나래같이

활개 펴게 하여

천년 늙은

어깨를 가벼이 하라

 

포도, 정음사, 1948

 

 


 

설정식 시인(薛貞植/1912년-1953년)

함경남도 단천 출생. 아버지는 개화운동에 참여하였던 한말 관리였다. 1929년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서울공립농업학교에 입학하였으나 광주학생운동에 연루되어 퇴학당하였다. 그 뒤 중국으로 건너갔다가 다시 돌아와 1933년 연희전문학교 별과에 다니기도 하였다. 1935년 일본으로 건너가 상업학교에 편입, 졸업하고 귀국하여 1936년부터 이듬해까지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다니다가 1937년 미국으로 유학, 마운트유니언대학(영문학 전공)·컬럼비아대학 등을 다녔다. 1940년 귀국하여 광산·농장·과수원 등을 경영하였다.

그는 일제치하에서 시인으로도 활동하였으며, 광복 직후인 1945년 8월 18일 결성된 조선문학건설본부 회원으로 참여하였다. 1945년 11월에는 『동아일보』 복간문제로 교섭이 있던 미군정청에 들어가 공보처 여론국장으로 재직하였다. 1946년 9월 임화(林和)·김남천(金南天) 등의 권유로 조선공산당에 입당하였고, 1947년 1월에는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의 사무직인 부비서장으로 재직하다가 8월 사직하고 문학가동맹 외국문학부장으로 활동하였다. 1948년 11월에는 영문 일간지인 『서울타임즈(The Seoul Times)』의 주필로 활동하다가 『서울타임즈』가 폐간되고 체포령이 내리자 1949년 12월 보도연맹에 가입하여 체포를 면하였다.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자 조선인민군 전선사령부 문화훈련국에 들어가 활동하였다. 1951년 정전회담의 통역을 담당하기도 하였으나, 1953년 박헌영(朴憲永)·이승엽(李承燁) 등을 숙청할 때 사형을 언도받았다. 저서로는 1949년 민교사에서 발행된 장편소설『청춘(靑春)』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