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남정 시인 / 굴헝
저녁이었다 덤불 속 별똥별이 떨어진 자리였을 것이다 알 수 없는 그림자가 일렁거렸다
어머니의 기저귀를 간다 멈칫 미세한 경련 같은 것이 스쳐갔다 욕창 난 둔덕이 무너져 있었다 음모 몇 가닥이 수풀 우거졌던 자리에 엉켜 있었다 폐정처럼, 깜깜한 구렁이 간신히 밀어낸 검푸른 돌덩이
화산재 뒤덮인 기름지고 아름다운 땅이었을 핏덩이가 솟아오르던 간헐천이었을 끓어오르던 숨길이었을 그 화산에서 아직 유황냄새가 난다
어머니의 기저귀를 간다 바싹 마른 가랑이 사이로 여진처럼 무한(無限)이 태어나고 있었다 어린 계집아이의 사타구니를 닦아내던 어머니처럼 나는 어머니의 깊고 깊은 어둠을 닦아낸다
식어버린 분화구에서 검멀레 해변에서 화산석을 줍는다
몸부림치며 굳은 돌 속에는 신비한 굴헝*이 있다
* 구렁의 제주도 방언
웹진 『시인광장』 2019년 11월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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