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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관련>/◆ 신 앙 관 련

[바티칸 뉴스] 기도에 대한 교리 교육

by 파스칼바이런 2020. 6. 19.

기도가 중요한 이유... 인간은 “하느님께 비는 걸인”이기 때문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예리코에 사는 눈먼 거지 바르티매오에 관해 설명하면서 ‘기도’에 관한 수요 일반알현 교리 교육 여정을 새롭게 시작했다. 바르티매오는 예수님에게 자신의 믿음을 ‘고함치고’, 다시 볼 수 있게 해달라고 ‘간청’한다. 그는 “우리를 억압하는 악”에 적응하지 않는 “인내의 사람”이자 구원받을 희망을 외치는 사람이다.

 

기도에 대한 교리 교육 : 1. 기도의 신비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안녕하세요!

 

오늘 기도를 주제로 하는 교리 교육의 새로운 여정을 시작합시다. 기도는 믿음의 숨결이며, 믿음의 가장 적절한 표현입니다. 하느님을 믿고 신뢰하는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외침과 같습니다.

 

복음서에 나오는 인물인 바르티매오의 이야기를 생각해 봅시다(마르 10,46-52 참조). 이 이야기는 저에게 있어서 다른 모든 이야기보다 가장 귀여운 이야기라는 것을 여러분에게 고백합니다. 그는 장님이었습니다. 자신이 살고 있던 예리코의 변두리 길가에 앉아 구걸하고 있었습니다. 익명의 인물이 아니라, 얼굴과 이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티매오의 아들” 바르티매오였습니다. 어느 날 그는 예수님이 자신이 앉은 곳을 지나가시리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사실 예리코는 많은 사람들이 지나다니던 곳이었습니다. 순례자들과 상인들이 지속적으로 지나다니는 교통의 중심지였습니다. (거기서) 바르티매오는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가능한 모든 일을 했을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 역시 그렇게 했습니다. 나무에 올라 갔던 자캐오를 기억해 봅시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보려고 했습니다. 자캐오 역시 그러했습니다.

 

이처럼 바르티매오는 고함치는 목소리처럼 복음서 안으로 들어갑니다. 그는 눈이 멀었기에, 예수님이 가까이 있는지 멀리 있는지 알지 못했지만, 어느 순간 사람들이 예수님이라고 말하는 소리를 들었고, 예수님이 가까이 오셨다는 것을 느낍니다. (…) 하지만 그는 완전히 혼자였습니다. 아무도 그를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바르티매오가 무엇을 합니까? 그는 소리칩니다. 외치고 또 외칩니다. 그는 자기가 가진 유일한 무기를 사용합니다. 목소리를 사용합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47절) 하고 외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계속해서 이렇게 고함쳤습니다.

 

그가 반복해서 외치자 사람들은 귀찮아졌습니다. 예의 바른 행동으로 보이지 않았고,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를 꾸짖으며 잠자코 있으라고 말합니다. “그렇게 하지 말고, 예의 바르게 구시오!” 하지만 바르티매오는 잠자코 있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큰 소리로 외칩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47절). 은총을 구하고, 하느님 마음의 문을 두드리고 또 두드리는 사람들의 이런 고집은 매우 아름답습니다. 그는 외치고 두드립니다. “다윗의 아들”이라는 표현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 표현은 ‘메시아”를 뜻합니다. 메시아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모든 이들에게서 멸시를 받던 바르티매오의 입에서 나온 신앙 고백입니다.

 

예수님이 그의 고함소리를 듣습니다. 바르티매오의 기도는 예수님의 마음과 하느님의 마음에 닿았습니다. 그를 위한 구원의 문이 열렸습니다. 예수님이 그를 불러오라고 하십니다. 그는 벌떡 일어났습니다. 그에게 조용히 하라고 말했던 사람들이 이제는 그를 스승이신 예수님께로 인도합니다. 예수님이 그에게 물으십니다. 그에게 소원을 말하라고 말하십니다. 이는 아주 중요합니다. 곧, 외침이 청원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는 청합니다. “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51절 참조).

 

예수님이 그에게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52절)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가난하고, 힘없고, 멸시받는 바르티매오에게서 하느님의 자비와 힘을 끌어내는 믿음의 온전한 힘을 다시 인식하십니다. 신앙은 들어올린 두 손과 고함치는 목소리를 갖는 것입니다. 구원의 선물을 청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교리서는 “겸손은 기도의 초석”(『가톨릭교회 교리서』, 2559항)이라고 말합니다. 기도는 땅에서 나옵니다. 기도는 흙(humus)에서 나옵니다. 흙이라는 말에서 “겸손함(umile)”과 “겸손(umiltà)”이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기도는 우리 불확실성의 상태와 하느님을 향한 우리의 끊임없는 갈증에서 나옵니다(『가톨릭교회 교리서』, 2560-2561항 참조).

 

우리는 바르티매오에게서 믿음이 외침이라는 것을 보았습니다. 믿음이 아닌 것은 그 외침을 방해하는 것입니다. 바로 바르티매오에게 잠자코 있으라고 했던 사람들의 태도입니다. 그들은 믿음이 없었으나, 바르티매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 외침을 질식시키는 것은 일종의 “묵비권 행사(omertà)”입니다. 신앙은 우리가 알아듣지 못하는 고통스러운 상황을 거슬러 저항하는 것이지만, 신앙이 아닌 것은 우리가 적응한 상황을 (다시) 경험하는 것에 그치고 맙니다. 신앙은 구원받기를 희망하지만, 신앙이 아닌 것은 우리를 억압하는 악에 적응하여 계속 그런 식으로 지속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바르티매오의 외침과 함께 수요 일반알현 교리 교육 여정을 시작합시다. 어쩌면 그의 모습에 이미 모든 게 적혀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바르티매오는 인내의 사람입니다. 그의 주변에는, 청원해도 소용이 없다고, 청원하는 것은 응답 없는 외침일 뿐이라고, 그냥 귀찮은 소음일 뿐이라고 설명하면서, 그러니 소리지르지 말라고 꾸짖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침묵하지 않았고 결국엔 바라는 것을 얻었습니다.

 

사람의 마음 안에는 그 어떤 반대 주장보다 더 강력하게 청원하는 목소리가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이러한 목소리가 있습니다. 아무도 명령하지 않았지만 자발적으로 나오는 목소리입니다. 특히 우리가 어둠 속에 있을 때, 이 세상에서 우리 여정의 의미에 의문을 제기하는 목소리입니다.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이는 아름다운 기도입니다.

 

그런데 어쩌면 이 말들은 피조물 전체에 아로새겨져 있지는 않은지요? 모든 것이 자비의 신비를 통해 자신의 궁극적인 완성을 찾으려고 청원하고 간청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혼자 기도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기도의 고함소리를 모든 이와 함께 나눕니다. 지평은 아직도 넓어질 수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모든 피조물이 “탄식하며 진통을 겪고 있다”(로마 8,22)고 말합니다. 예술가들은 종종 이러한 피조물의 ‘침묵의 고함소리’를 표현합니다. 그 침묵의 고함소리는 모든 피조물 안에서 억압받은 것이지만 인간의 마음에서 가장 먼저 등장하는 무엇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하느님께 비는 걸인이기” 때문입니다(『가톨릭교회 교리서』, 2559항 참조). 인간이 “하느님께 비는 걸인”이라는 표현은 아름답습니다. 고맙습니다.

 

[바티칸 뉴스, 2020년 5월 6일, 번역 김호열 신부]

 

 


 

 

“우리는 하느님께 모든 것을 청할 수 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5월 13일 교황청 사도궁 도서관에서 인터넷을 통해 생중계된 수요 일반알현에서 “너(Tu, 하느님)”를 찾는 작은 “나(io)”의 목소리인 그리스도인 기도의 특징들을 설명했다. 교황은 교리 교육을 마친 후 인사말을 통해 오는 5월 18일이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탄생 백주년이라고 떠올리는 한편, 5월 14일에 있을 코로나19의 극복과 종식을 위한 ‘기도와 단식과 자선 실천의 날’에 자신도 동참한다고 말했다.

 

기도에 대한 교리 교육 : 2. 그리스도인의 기도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안녕하세요!

 

오늘은 지난주부터 시작한 기도에 대한 교리 교육 여정의 두 번째 단계를 살펴봅시다.

 

기도는 모두에게 해당됩니다. 모든 종교인에게, 그리고 어쩌면 아무런 신앙을 고백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해당됩니다. 기도는 우리의 내밀한 곳, 곧 영성가들이 종종 “마음”이라고 부르는 내적 공간에서 솟아 나옵니다(『가톨릭교회 교리서』, 2562-2563항 참조). 그러므로 내적으로 기도하는 것은 주변부의 어떤 것이 아니며, 우리의 이차적이고 부차적인 능력도 아닌, 우리의 가장 깊은 신비입니다. 기도하는 것이란 바로 이 신비입니다. (우리는) 감정으로 기도하지만, 기도가 한낱 감동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지능으로 기도하지만, 기도하는 것이 한낱 지성적 행위는 아닙니다. (우리는) 몸으로 기도합니다. 심지어 가장 심각한 육체적 장애가 있어도 하느님과 대화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마음”으로 기도한다면 온 존재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열정이며, 우리 자신을 넘어서는 탄원입니다. 우리 존재의 깊은 데서 솟아나는 무엇이며, 손을 뻗는 것입니다. 만남의 향수를 감지하기 때문입니다. 그 향수는 필요나 요구 그 이상이고, 필수적인 것 그 이상입니다. 그것은 하나의 ‘길’입니다. 기도는 어둠 속에서 손으로 더듬어 “너(Tu, 하느님)”를 찾는 “나(io)”의 목소리입니다. “나”와 “너”의 만남은 계산기를 두드려서 이뤄지는 게 아닙니다. 인간적인 만남입니다. 종종 나의 “나”가 찾고 있는 “너”를 찾기 위해 어둠 속에서 손을 더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 기도는 계시에서 나옵니다. “너”는 신비로움에 싸여 있지 않고, 우리와 나누는 관계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리스도교는 하느님의 “나타나심(manifestazione)”, 곧 하느님의 에피파니아(Epifanis, 公現)를 지속적으로 기념하는 종교입니다. 전례력의 첫 번째 축제들은 숨어 계시지만 사람들에게 당신의 우정을 베푸시는 하느님을 기념하는 것들입니다. 하느님은 베들레헴의 가난과 동방박사들의 묵상 안에서, 요르단 강에서의 세례와 카나의 혼인 잔치의 기적 안에서, 당신의 영광을 나타내십니다. 요한 복음서는 머리글을 다음과 같이 간결하게 마무리합니다. “아무도 하느님을 본 적이 없다. 아버지와 가장 가까우신 외아드님 하느님이신 그분께서 알려 주셨다”(요한 1,18). 우리에게 하느님을 알려주신 분은 예수님이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의 기도는 사람들에게 그 어떤 두려움을 불러 일으키지 않는 자애로운 얼굴을 지니신 하느님과의 관계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 기도의 첫 번째 특징입니다. 하느님께 다가가는 데 있어서 항상 일반 사람들은 약간 습관적으로 겁을 먹거나, 하느님의 매혹적이고 놀라운 신비에 약간 두려워하거나, 자신의 주인을 섬기는데 소홀하지 않으려는 종과 같은 복종적인 태도로 하느님을 섬기는 데 익숙합니다. 하지만 이와 반대로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을 “아버지”라는 이름으로 친근하게 부르면서 그분께로 나아갑니다. 더 분명히 말하자면, 예수님은 다른 단어를 사용하십니다. 바로 “아빠”라는 단어입니다.

 

그리스도교는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모든 “봉건적인” 관계를 없애버렸습니다. 우리 신앙의 유산 안에는 “예속”, “노예” 혹은 “신하” 같은 표현들이 없습니다. 대신 “계약”, “우정”, “약속”, “친교”, “친밀감” 같은 표현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긴 고별사에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희를 더 이상 종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종은 주인이 하는 일을 모르기 때문이다.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 내가 내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을 너희에게 모두 알려 주었기 때문이다.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너희가 가서 열매를 맺어 너희의 그 열매가 언제나 남아 있게 하려는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을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시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15,15-16). 이는 백지수표와 같습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을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시게 하려는 것이다!”

 

하느님은 친구, 동맹자, 신랑입니다. 예수님이 “주님의 기도”에서 하느님께 일련의 청원을 하라고 우리에게 가르치신 것이 과연 참인 것처럼, 기도 안에서 우리는 그분과 신뢰 관계를 맺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모든 것을 청할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을 말입니다. 모든 것을 설명하고, 모든 것을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부족함을 느끼더라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사실) 우리는 좋은 친구도 아니고, 고마워할 줄 아는 자녀도 아니며, 충실한 배우자도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은 우리를 계속 사랑하십니다. 이는 예수님이 최후의 만찬 때 분명하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잔은 너희를 위하여 흘리는 내 피로 맺는 새 계약이다”(루카 22,20). 이 행위로 예수님은 다락방에서 십자가의 신비를 미리 예견하십니다. 하느님은 충실한 동맹자이십니다. 하느님은 사람들이 (당신을) 사랑하기를 멈춘다 하더라도, 사랑이 자신을 골고타로 이끌지라도, 사랑하기를 멈추지 않으십니다. 하느님은 항상 우리 마음의 문 근처에 계시며, 우리가 당신을 향해 마음의 문을 열기를 기다리십니다. 때로는 우리 마음을 두드리시지만, 강요하지 않으십니다. 기다리십니다.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인내심은 한 아빠의 인내심이며, 우리를 너무 사랑하는 사람의 인내심입니다. 말하자면, 아빠와 엄마의 인내심입니다. 항상 우리 마음 가까이 계십니다. 우리 마음을 두드릴 때는 자애로움과 지극한 사랑으로 두드리십니다.

 

모두 함께 계약의 신비 안으로 들어가서 기도하기를 시도합시다. 하느님의 자비로우신 품 안에서 기도로 들어가 봅시다. 삼위일체의 삶인 행복의 신비에 싸여 있음을 느껴봅시다. 큰 대접을 받을 자격이 없는 손님처럼 느껴봅시다. 그리고 기도의 놀라움 안에서 하느님께 반복해서 말합시다. ‘당신이 사랑밖에 모르신다는 게 가능한 일입니까?’ 하느님은 미움을 모르십니다. 그분은 미움을 받았지만, 미움을 알지 못하셨습니다. 그분은 오직 사랑만 아십니다. 이러한 분이 바로 우리가 기도하는 하느님이십니다. 이것이 모든 그리스도인 기도의 빛나는 핵심입니다. 사랑이신 하느님은 우리를 기다리시고, 우리와 동행하시는 우리 아버지이십니다.

 

[바티칸 뉴스, 2020년 5월 13일, 번역 김호열 신부]

 

 


 

 

“기도는 희망의 문을 열어줍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5월 20일 수요 일반알현을 통해 기도에 관한 세 번째 교리 교육을 이어갔다. 교황은 기도하는 모든 이가 “사랑이 죽음보다 더 강하다고 믿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이번 교리교육은 신자들의 참여 없이 교황청 사도궁 도서관에서 인터넷을 통해 생중계된 열 번째 교리 교육이다.

 

기도에 대한 교리 교육 : 3. 창조의 신비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안녕하세요!

 

창조의 신비를 묵상하면서 기도에 관한 교리 교육을 계속 이어갑시다. 생명, 우리가 존재한다는 이 단순한 사실이 인간의 마음을 기도로 열어줍니다.

 

성경의 첫 페이지는 장엄한 감사의 찬미가와 비슷합니다. 창조에 관한 이야기는 존재하는 모든 것의 선과 아름다움을 지속적으로 강조하는 후렴구로 이뤄져 있습니다. 하느님이 당신 말씀으로 (모든 것을) 생명으로 부르시니, 모든 것이 존재하게 됩니다. 하느님이 말씀으로 빛과 어둠을 분리하시고, 낮과 밤이 반복되게 하시며, 계절을 바뀌게 하시고, 다양한 동식물로 다채로운 세상을 여셨습니다. 혼돈을 빠르게 물리치는 이 풍요로운 숲에서, 마지막으로 인간이 등장합니다. 인간의 등장은 만족과 기쁨을 증폭시키는, 넘쳐나는 환희를 자아냅니다. “하느님께서 보시니 손수 만드신 모든 것이 참 좋았다”(창세 1,31). 좋고 아름다운 일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모든 피조물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습니다.

 

창조의 아름다움과 신비는 인간의 마음 안에 기도를 불러 일으키는 첫 번째 움직임을 만들어 냅니다(『가톨릭교회 교리서』, 2566항 참조). 우리가 일반알현을 시작하면서 들었던 시편 제8장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우러러 당신의 하늘을 바라봅니다. 당신 손가락의 작품들을 당신께서 굳건히 세우신 달과 별들을. 인간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기억해 주십니까? 사람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돌보아 주십니까?”(4-5절) 시편 저자는 자기 존재의 신비를 묵상하고, 머리 위에서 반짝이는 별이 가득한 하늘을 보며 - 천체 물리학은 오늘날 우리에게 그 광대함을 보여줍니다 - 어떤 사랑의 계획이 이처럼 강력한 작품 뒤에 있어야 했는지 묻습니다. (…) ‘이 광대무변 안에서 인간이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하고 말입니다. 또 다른 시편은 “(인생이) 얼마나 덧없는가”(시편 89,48 참조)라고 말합니다. 이어 인간은 태어나고 죽는 존재이며, 매우 연약한 피조물이라고 말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주 전체에서, 인간은 아름다움의 풍요로움을 알고있는 유일한 피조물입니다. 태어나 죽고, 오늘 있다가도 내일 사라지는 작은 존재인 인간은 이 (창조의) 아름다움을 알고있는 유일한 존재입니다. 우리는 이 아름다움을 알고 있습니다.

 

인간의 기도는 ‘놀라움’ 혹은 ‘경탄’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인간의 위대함은 우주의 크기와 비교하면 극히 미소합니다. 인간의 가장 큰 업적조차 아주 사소한 것처럼 보입니다. (…) 우리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인간은 기도 안에서 자비심을 강하게 체험합니다. 우연히 존재하는 것은 없습니다. 우주의 비밀은 누군가가 우리의 눈빛에서 만나는 자비로운 눈길 안에 있습니다. 시편은 우리가 신들보다 조금 못하게 만들어졌지만, 영광과 존귀의 관을 썼다고 말합니다(시편 8,6 참조). 하느님과의 관계가 개별 인간의 위대함입니다. 인간의 영예로움입니다. 우리는 본성상 거의 아무것도 아니고 미소하지만, 그러나 소명으로, 부르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위대한 임금의 자녀들입니다.

 

우리 가운데 많은 사람이 그러한 체험을 했습니다. 인생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온갖  괴로움으로 인해, 때로는 우리 안에서 기도의 선물을 질식시킬 위험에 빠지게 한다 하더라도, (우리 안에) 감사의 불씨를 다시 타오르게 하기 위해서는 별이 빛나는 하늘과 일몰과 꽃 (…) 등을 묵상하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이 체험이 어쩌면 성경의 첫 페이지가 쓰여진 기초일지도 모릅니다.

 

창조에 관한 위대한 성경의 기록이 작성될 때만해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지 않았습니다. 원수가 무력으로 이스라엘 땅을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많은 이들이 포로로 잡혀갔고, 메소포타미아에서 노예로 살고 있었습니다. 더 이상 조국도, 성전도, 사회 생활과 종교 생활 그 무엇도 없었습니다.  

 

그래도 창조의 위대한 이야기에서 시작해서, 누군가는 감사의 이유를 찾고, (자신의) 존재에 대해 하느님을 찬미하기 시작했습니다. 기도는 희망의 첫 번째 힘입니다. 여러분이 기도하면, 희망은 커지고 이어집니다. 저는 기도가 희망의 문을 열어 준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분명 희망은 존재하지만, 나의 기도로 그 문을 여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기도하는 사람들은 기본적인 진리들을 지키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입니다. 곧, 우리 삶은 그 모든 어려움과 시련에도 불구하고 경이로운 은총으로 충만하다는 사실을 먼저 자기 자신들과 그리고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반복해서 말하는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삶은) 항상 지켜지고 보호받아야 합니다.

 

기도하는 모든 사람은 희망이 낙담보다 강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사랑이 죽음보다 더 강하고, 비록 그 시간과 방법은 모르더라도 언젠가는 우리가 반드시 승리할 것이라고 믿습니다. 기도하는 모든 사람들은 얼굴에 빛의 광채를 품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가장 어두운 날에도 태양이 그치지 않고 그들을 비추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여러분을 밝혀줍니다. 여러분의 영혼을 밝혀주고, 여러분의 마음과 얼굴을 밝혀줍니다. 가장 어두운 시기에도, 가장 큰 고통의 시기에도, 기도는 여러분을 밝혀줍니다.

 

우리 모두는 기쁨을 가져오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이에 대해 생각해 보셨습니까? 여러분이 기쁨을 가져오는 사람이라는 것을 생각해 보셨습니까? 그렇지 않다면 여러분은 나쁜 소식과 여러분을 슬프게 만드는 소식을 전하고 싶은 것입니까? 우리 모두는 기쁨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 이 삶은 하느님이 우리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슬픔과 비통으로 인생을 소모하기에는 너무 짧은 시간입니다. 그저 살아있다는 것에 만족하며, 하느님을 찬미합시다. 우주를 바라보고, 아름다움을 바라보고, 또한 우리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이렇게 말합시다. “당신은 존재하십니다. 당신은 당신을 위해 우리를 이렇게 만드셨습니다.” 하느님께 감사하고 찬미하도록 이끄는 마음의 동요를 느껴야 합니다. 우리는 모든 피조물에서 하느님의 서명을 읽을 수 있는 위대한 임금의 자녀들이며, 창조주의 자녀들입니다. 그 피조물은 오늘날 우리가 제대로 지키고 있지 못하지만, 그 피조물 안에는 그것을 사랑으로 창조하신 하느님의 서명이 담겨 있습니다. 주님이 우리로 하여금 이를 더 깊이 이해하게 하시고, 우리가 “감사합니다”라고 말할 수 있게 해주시길 빕니다. “감사합니다”는 아름다운 기도입니다.

 

[바티칸 뉴스, 2020년 5월 20일, 번역 김호열 신부]

 

 


 

 

"기도는 악을 막는 방패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5월 27일 수요 일반알현 교리 교육에서 창세기의 처음 장들을 해설했다. 교황은 악이 기름얼룩처럼 퍼져 나가지만, 의로운 사람들의 기도는 희망을 회복시키는 '생명의 연결고리'라고 말했다.

 

기도에 대한 교리 교육 : 4. 의로운 사람들의 기도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안녕하세요!

 

오늘 교리 교육은 의로운 사람들의 기도에 대해 살펴봅시다.

 

인류에 대한 하느님의 계획은 좋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악의 존재를 경험합니다. 일상적인 경험입니다. 창세기의 처음 장들은 인간사에서 벌어지는 점진적인 죄의 확산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자신의 행복을 방해하는 질투의 신과는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생각하면서, 하느님의 너그러운 의도를 의심합니다(창세 3,1-7 참조). 여기서 반란이 생깁니다. 곧, 그들은 그들의 행복을 바라시는 관대하신 창조주를 더 이상 믿지 않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악한 자의 유혹에 굴복하면서 절대적인 권능을 취하려는 망상에 사로잡힙니다. “우리가 이 나무의 열매를 먹으면, 하느님처럼 될 것이다”(5장 참조). 이것이 유혹입니다. 마음속에 생기는 야망입니다. 하지만 그들의 경험은 반대 방향으로 흘러갑니다. 그들의 눈이 열려, 아무것도 없이 알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7절 참조). 여러분, 이 점을 잊지 마십시오. 유혹자는 좋지 않은 대가를 치르게 하는 자입니다. 나쁜 대가를 치르게 한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악은 다음 세대와 함께 더욱 파괴적이고 강력해집니다. 바로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입니다(창세 4,1-16 참조). 카인은 동생 아벨을 질투합니다. 질투의 벌레가 있었습니다. 카인은 자신이 장자임에도 불구하고, 아벨을 자신의 장자권을 넘보는 경쟁자로 보았습니다. 그의 마음에 악이 얼굴을 내밉니다. 카인은 이를 통제할 수 없었습니다. 악이 그의 마음으로 들어가기 시작합니다. 그는 항상 다른 사람을 의심하고 나쁘게 바라봅니다. 이러한 일이 생각 속에서도 일어납니다. “이 사람은 나쁜 사람이고, 나에게 해를 끼칠 거야.” 이러한 생각은 마음으로 들어갑니다. (…) 이처럼 첫 번째 형제애 이야기는 살인으로 끝납니다. 저는 오늘 인간의 형제애를 생각합니다. (…) 온 세상이 전쟁으로 가득합니다.

 

카인의 자손들은 공예와 예술을 발전시키지만, 복수의 찬가처럼 울려 퍼지는 라멕의 재앙의 노래에서 드러난 폭력도 발전시킵니다. “나는 내 상처 하나에 사람 하나를, 내 생채기 하나에 아이 하나를 죽였다. 카인을 해친 자가 일곱 갑절로 앙갚음을 받는다면, 라멕을 해친 자는 일흔일곱 갑절로 앙갚음을 받는다”(창세 4,23-24). 복수입니다. “당신이 행한 것에 대가를 치를 것이다.” (복수는) 판사가 이렇게 저렇게 판결하는 게 아니라, 내가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내가 상황을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악은 모든 상황을 통제할 때까지 기름얼룩처럼 퍼져 나갑니다. “주님께서는 사람들의 악이 세상에 많아지고, 그들 마음의 모든 생각과 뜻이 언제나 악하기만 한 것을 보셨다”(창세 6,5). 전 세계적 홍수(6-7장 참조)와 바벨탑(11장 참조)의 장엄한 이야기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될 새로운 창조와 같은 새로운 시작이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럼에도 성경의 처음 장들에는 또 다른 역사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눈에 덜 띠고, 훨씬 더 겸손하고 신심적이며, 희망의 구속을 나타내는 기록입니다. 거의 모든 사람이 증오와 정복을 인간사의 큰 동력으로 삼고, 잔인한 방식으로 행동한다 하더라도, 성실하게 하느님께 기도할 수 있고, 인간의 운명을 다른 방법으로 써 내려갈 수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벨은 맏배를 주님께 제물로 바쳤습니다. 아벨이 죽은 후 아담과 하와는 세 번째 아들인 셋을 낳았습니다. 셋은 에노스(‘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의미)를 낳았고, “그때부터 사람들이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기 시작했다”(창세 4,26)고 말합니다. 그런 다음 “하느님과 함께 살았으며”, 하느님께서 데려가신 에녹이 등장합니다(창세 5,22.24 참조). 아울러 의롭고 “하느님과 함께 살아갔던”(창세 6,9) 노아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느님은 노아를 보시고 인류를 땅 위에서 쓸어버리겠다는 생각을 철회하십니다(창세 6,7-8 참조).

 

이러한 이야기들을 읽으면서, 기도란 세상에서 자라나는 악의 홍수를 막는 인간을 위한 방패이자 피난처라는 인상을 받습니다. 면밀히 살펴보면,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서 구원되기를 또한 기도합니다. 이렇게 기도하는 게 중요합니다. “주님, 제발 제 자신과 저의 야망들과 저의 욕망들에서 저를 구하소서.” 성경의 처음 장들에서 볼 수 있는 기도하는 사람들은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입니다. 사실 진정한 기도는 폭력적인 본능에서 우리를 자유롭게 합니다. 기도는 하느님을 향한 눈길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사람의 마음을 돌보기 위해 돌아오시기 때문입니다. 『가톨릭교회 교리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모든 종교의 수많은 의인들이 이 같은 기도를 구현하였다”(『가톨릭교회 교리서』, 2569항). 기도는 인간의 증오가 사막만 넒혀갈 수 있는 곳에서 ‘새로 태어남’의 화단을 가꿉니다. 기도는 강력합니다. 왜냐하면 기도는 하느님의 권능, 곧 항상 생명을 주시는 하느님의 권능을 불러오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생명의 하느님이십니다. 새 생명을 주시는 분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의 주권이 세상에서 종종 오해를 받거나 소외된 사람들을 관통하는 이유입니다. 세상은 하느님을 섬기는 사람들이 기도로 끌어내는 하느님 권능의 은총으로 살아가고 성장합니다. 이러한 관계망은 헤드라인을 장식할 정도로 시끄러운 것이 아닙니다. 비록 그럴지라도 세상에 대한 신뢰를 회복하는 게 매우 중요합니다. 저는 어떤 분의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그분은 지금은 아니지만 예전에 정부의 중요한 일을 맡은 분이었습니다. 그분은 마음속에 종교적 감각을 가져본 적이 없었던 무신론자였습니다. 하지만 어릴 때부터 할머니가 기도하는 소리를 들었으며, 그것이 그분의 마음에 남아 있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삶에 어려운 순간이 찾아오자 그 기억이 다시 마음에 떠올랐습니다. “그래, 할머니는 기도하셨었지. (…)” 그분은 할머니가 사용했던 기도문으로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예수님을 발견했습니다. 기도는 항상 생명의 연결고리입니다. 기도하는 사람들은 생명의 씨앗을 뿌리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생명의 씨앗을 뿌립니다. 작은 기도라는 씨앗 말입니다. 이러한 까닭에 아이들에게 기도하는 법을 가르치는 게 매우 중요합니다. 저는 아이들이 십자성호를 긋지 못하는 모습을 보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모릅니다. 아이들에게 십자성호를 잘 그을 수 있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왜냐하면 십자성호를 긋는 것은 첫 번째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이 기도하는 법을 배우는 게 중요합니다. 물론 그들은 (나중에 자라면서) 기도하는 법을 잊어버리고, 다른 길을 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어린시절에 배운 첫 번째 기도는 마음속에 남아 있습니다. 왜냐하면 첫 번째 기도는 생명의 씨앗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과의 대화의 씨앗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역사 안에서 하느님의 여정은 (의로운) 사람들을 통해 흘러갑니다. 하느님의 여정은 인류의 “나머지”를 거쳐갑니다. 그들은 가장 강한 이들의 법을 따르지 않으면서 하느님께 당신의 기적을 행하시길 청하고, 특히 돌과 같은 인간의 마음을 살과 같은 마음으로 바꾸어 주시길 청원하는 이들입니다(에제 36,26 참조). 이것이 (우리의) 기도에 도움이 됩니다. 왜냐하면 기도는 돌과 같은 우리의 마음을 인간의 마음으로 변화시키면서, 하느님을 향한 문을 열어주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커다란 인류애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인류애를 통해 제대로 기도할 수 있습니다.

 

[바티칸 뉴스, 2020년 5월 27일, 번역 김호열 신부]

 

 


 

 

“아브라함은 아들이 아빠에게 하는 것처럼 하느님과 대화하라고 가르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6월 3일 수요 일반알현에서 기도에 관한 교리 교육 여정을 이어가며, 신앙 선조인 아브라함의 기도에 대해 설명했다. 교황은 아브라함의 기도가 토론을 배제하지는 않지만 주님의 말씀에 대한 전적인 신뢰와 순응을 특징으로 하는 주님과의 대화였다고 설명했다.

 

기도에 대한 교리 교육: 5. 아브라함의 기도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안녕하세요!

 

아브라함의 생애에 갑자기 울리는 한 목소리가 있었습니다. 터무니없는 것임을 알고 있는 여정을 시작하라고 부르시는 목소리입니다. 새로운 미래, 색다른 미래를 향해 나아가고자 조국에서 떠나고, 자기 가족의 뿌리에서 떠나라고 부추기는 목소리입니다. 이 모든 것은 약속에 기초한 것입니다. 오직 그 약속을 신뢰하는 것만 필요했습니다. 하지만 약속을 신뢰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용기가 필요합니다. 아브라함을 약속을 신뢰했습니다.

 

성경은 신앙 선조인 아브라함의 과거에 대해서는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여러 정황 논리에 따르면 그가 다른 신들을 숭배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는 아마도 지혜로운 사람이었을 것이고, 하늘과 별들을 관찰하는데 익숙했을 것입니다. 사실 주님은 그에게 그의 후손들이 하늘에 떠있는 별들만큼이나 많을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떠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분의 말씀을 신뢰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신뢰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아브라함의 출발로 인해 하느님과의 관계를 인식하는 새로운 방법이 생겨납니다. 이러한 까닭에, 신앙 선조인 아브라함이 유다교와 그리스도교 및 이슬람교의 위대한 영적 전통 안에서, 완벽한 하느님의 사람으로, 또한 자신의 의지로는 감당하기 어렵고 이해할 수 없을 지라도 하느님께 순종할 줄 아는 사람으로 여겨집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말씀의 사람’입니다. 하느님이 말씀하실 때, 인간은 그 말씀의 수용자가 되고, 인간의 삶은 말씀이 육화되기를 요구하는 곳이 됩니다. 이는 인간의 신앙 여정 안에서의 크나큰 새로움입니다. 믿는 이의 삶은 소명, 곧 부르심이며, 약속이 성취되는 장소라고 생각하기 시작하는 새로움입니다. 그리고 인간은 세상에서 단순히 불가사의함의 무게로 움직이는 것에 그치지 않고, 언젠가 이루어질 약속의 힘으로 움직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약속을 믿었습니다. 히브리서에서 말하는 것처럼, 그는 믿었으며,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떠났습니다(히브 11,8 참조). 그러나 그는 하느님의 약속을 신뢰했습니다.

 

창세기를 읽으면서 우리는 아브라함이 어떻게 자신의 여정에 주기적으로 나타난 하느님 말씀에 대한 변함없는 충실성 안에서 기도하는 삶을 살았는지 발견하게 됩니다. 요약하면, 아브라함의 삶에서 믿음은 역사가 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믿음이 역사가 되었습니다. 참으로, 아브라함은 그의 삶과 모범을 통해 믿음이 역사가 되는 이 여정을, 이 길을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하느님은 더 이상 멀리 계신 분, 공포를 불러 일으키는 존재처럼 우주 현상 안에서만 볼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의 하느님은 나의 발걸음을 인도하시고, 나를 버리지 않으시는, 나의 개인적인 역사의 하느님, 곧 “나의 하느님”이 됩니다. 나의 일상의 하느님, 나의 모험의 동반자, 섭리이신 하느님이십니다. 저는 제 자신과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에 대한 이러한 체험이 있습니까? “나의 하느님”, 나와 함께 하시는 하느님, 나의 개인적인 역사의 하느님, 나의 발걸음을 인도하시는 하느님, 나를 버리지 않으시는 하느님, 나의 일상의 하느님이십니까? 우리는 이러한 체험이 있습니까? 잠깐 생각해 봅시다.

 

아브라함의 이 체험은 또한 영성사에서 가장 독창적인 텍스트 중 하나인 블레즈 파스칼의 저서 『회고록』(Memoriale)이 다루기도 했습니다. 이 저서는 다음과 같이 시작합니다. “철학자들과 학자들의 하느님이 아닌,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 (가슴 깊이 느껴지는) 확신, 감성, 기쁨, 평화. 예수 그리스도의 하느님.” 이 회고록은 파스칼이 작은 양피지에 써서 윗옷 안쪽에 붙이고 다녔으며, 파스칼이 죽은 후에 발견되었습니다. 이 회고록은 파스칼 자신과 같은 학자가 하느님에 대해 생각할 수 있다는 지성적인 생각을 말하는 게 아니라, 생생하고 풍부한 체험을 일으킨 하느님 현존에 관해 말하는 것입니다. 파스칼은 자신이 그와 같은 현실을 느끼고, 마침내 그 현실을 체험한 순간을 정확하게 기록했습니다. 바로 1654년 11월 23일 저녁이라고 기록했습니다. 추상적이거나 형이상학적인 하느님이 아니었습니다.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가 체험한 하느님은) 인격적인 하느님, 부르심의 하느님,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요셉의 하느님, 확실하신 하느님, 감성의 하느님, 기쁨의 하느님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의 기도는 먼저 행동으로 표현된다. 말이 없는 사람 아브라함은 머무는 곳마다 주님께 제단을 쌓는다”(『가톨릭교회 교리서』, 2570항」. 아브라함은 성전을 짓지 않고, 하느님의 지나가심을 기억하는 돌의 길을 흩뿌립니다. (아브라함의 하느님은) 세 손님의 모습으로 그를 방문하여 아들 이사악의 탄생을 알렸을 때 그가 아내 사라와 함께 친절하게 맞이했던 놀라우신 하느님이십니다(창세 18,1-15 참조). 당시 아브라함의 나이는 백 살이었고, 그의 아내는 구십 살 정도 되었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을 믿고, 신뢰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아내는 잉태했습니다. 그 나이에 말입니다! 그러한 분이 바로 우리와 함께 계시는 아브라함의 하느님, 우리의 하느님이십니다.

 

이처럼 아브라함은 하느님과 가족처럼 가까워졌습니다. 그는 하느님과 논쟁할 수도 있었지만, 항상 하느님께 충실했습니다. 하느님과 대화하고 토론했습니다. 하느님이 그에게 유일한 상속자인 아들 이사악을 희생시키라고 요구하는 최고의 시련을 받을 때까지 충실했습니다. 그 순간 아브라함은 별빛 없는 하늘 아래에서 손을 더듬어 가며 밤을 보내는 것과 같은, 극적인 믿음을 체험합니다. 이처럼 어둠 속에서도 믿음을 가지고 걷는 일은 우리에게도 종종 일어납니다. 하느님은 아브라함이 진정으로 온전하게 순응한 모습을 보셨기 때문에 (이사악을) 희생시킬 준비가 되어 있는 아브라함의 손을 멈추게 하셨습니다(창세 22,1-19 참조).

 

형제자매 여러분, 아브라함에게서 배웁시다. 믿음을 가지고 기도하는 법을 배웁시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걸어가고, 토론에 이르도록 대화합시다. 우리는 하느님과 토론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저는 이단처럼 보이는 것에 대해 말하겠습니다. 저는 자주 사람들이 저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을 듣습니다. “아시겠습니까? 저에게 이러저러한 일이 일어났고, 그래서 저는 하느님께 화가 났습니다.” “당신은 하느님에게 화를 낼 용기가 있습니까?” “네, 저는 화가 났습니다.” “그것이 바로 기도의 한 형태입니다.” 왜냐하면 아들만이 아빠에게 화를 낼 수 있고, 다시 아빠를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으로 기도하고, 대화하고, 토론하되, 항상 하느님의 말씀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실천하는 것을 아브라함에게서 배웁시다. 아들이 아빠에게 하는 것처럼 하느님과 대화하는 방법을 배웁시다. 하느님 말씀을 듣고, 응답하고, 토론하는 것을 배웁시다. 하지만 아들이 아빠에게 하는 것처럼 솔직해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그렇게 기도하라고 우리를 가르칩니다. 고맙습니다.

 

[바티칸 뉴스, 2020년 6월 3일, 번역 김호열 신부]